사실 엄마 장례식에서 생각보다 눈물을 많이 흘리지는 않았다. 무슨 알량한 자존심인지 사람들 앞에서는 펑펑 울고 싶지 않았다. 물론 내가 울면 사람들은 '엄마를 잃었으니 얼마나 슬플까?' 공감해 줄 것이다.
그 점이 싫었다. 내 슬픔을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고 싶지 않았다. 가슴이 미어지는 이 심정을 사람들 앞에서 눈물을 보임으로서 쉽게 공감받고 싶지 않았다. 이해당하고 싶지 않았다. 이 감정은 몇 방울의 눈물로는 설명할 수 없다. 내 마음을 조금이라도 설명하려면 아주 길고 복잡한 이야기가 될 것이다. (그래서 약간의 시간이 흐르고 이제야 글로 풀어내고 있다.)
입관할 때와 발인할 때는 관객이 없어서일까 무너져 울 수 있었다. 엄마 앞이니 그래도 될 것이다. 우리가 펑펑 울어주면 엄마는 '에구 쟤네 왜 저런대니' 심란해하면서도 은근히 기뻐할 것이다.
'하긴, 쟤네가 날 좀 사랑했어야지.' 의기양양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또 한 번. 장례식장에 첫째 은유가 내 앞에 갑자기 나타났을 때.
마주칠 거라고 기대하지 못한 그 익숙한 얼굴 앞에서 나는 아이처럼 엉엉 울고 말았다. 내 어린 아기들은 장례식장에 오지 않는 것으로 결정됐지만 어머님께서 외할머니 사랑을 듬뿍 받고 큰 은유를 엄마와 마지막 인사 할 수 있도록 데리고 와주신 것이다.
알록달록한 옷들 속에서 어렵게 찾아냈을 검은 원피스를 입고 은유는 해맑게 손을 흔들며 들어왔다. 영정사진 속 엄마를 가리키며 '어? 할머니네!' 반갑게 말했다.
엄마가 죽고 나서 누구에게도 '슬퍼서 어떡하지? 엄마가 보고 싶어서 어떡하지?' 이런 바보 같은 질문은 하지 않았다. 답이 있을 리 없고 누가 죽은 엄마를 살려내 해결해 줄 수 있는 문제도 아니니까.
그런데 세상에서 제일 답을 모를 것 같은 네 살짜리 어린애를 붙들고 '은유야 엄마 어떡하지? 엄마 이제 할머니를 어디에서 보지?' 흐느꼈다.
처음 보는 엄마의 모습에 당황한 채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서있는 아이를 어머님께서 간신히 내 품에서 떼어냈다.
그 순간 오직 그 아이만이 나의 위로였다. 세상에서 나만큼 본인을 사랑해 주는 존재를 잃고도 지금 본인이 뭘 잃었는지조차 모르는 그 순수한 그 눈동자가 내가 만든 감정의 벽을 간단하게 무너뜨렸다.
그때 '앞으로도 나는 오랫동안 슬프겠지만 나약해질 순 없겠구나. 지금 나를 무너뜨린 이 아이가 내일의 나를 일으키겠구나.' 막연하게 나의 미래를 짐작할 수 있었다.
하루는 장례를 마치고 며칠 동안 망설였던 일을 해치울 결심을 했다. 자려고 누워 은유 손을 잡고
'은유야. 엄마 얘기 잘 들어봐. 있잖아. 외할머니는 나무가 되셨어.' 하고 말해준 것이다.
엄마가 살아계실 때 나는 은유에게 엄마를 단 한 번도 외할머니라 칭하지 않았다. 은유와 친한 친(親) 할머니와 은유의 바깥에 존재하는 외(外) 할머니로 구분하는 것 같아 그 단어가 불편했다. 종종 지역명을 붙여 잠실할머니, 마포할머니라고 부르기도 했으나 여태까지는 두 분 다 그냥 할머니로 칭해도 큰 불편함이 없었다. 하지만 이제 더 이상 마포에 살지 않는 할머니를 마포 할머니라 부를 수는 없는 노릇이다.
지금이라도 친할머니와 외할머니로 명칭을 구분 지어주지 않는다면 매일 새로운 경험을 하며 짧은 기억 따위 아쉬워하지도 않고 금세 지워버리는 이 천진한 아기에게 할머니는 빠른 시일 내에 단 한 분이 되어버리고 말 것이다.
그래서 이제 외할머니는 멋진 나무가 되어 언제나 은유 마음속에 살아계시다고 알려주려 했다. 외할머니란 엄마의 엄마를 말하는 거라고, 은유에게 엄마 몰래 솜사탕을 사주고 왈왈 짖는 강아지 인형을 선물하던 그 할머니가 바로 외할머니라고 가르쳐주려 했다.
지금은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음. 외할머니가 어째서인지 나무가 됐구나.' 가볍게 느끼기만이라도 하다가 시간이 점점 흘러 외할머니의 얼굴과 기억을 완벽히 잃어버리게 되더라도 언제나 나를 사랑하고 지켜주는 외할머니 나무가 마음속에 있다는 것만은 부정할 수 없는 당연한 사실이 되길 바랐다.
어떤 이야기들은 축적된 시간의 힘으로 보편적인 진리가 되기도 하니까.
오래오래 전해 내려오는 전설처럼, 아름다운 구전동화처럼..
그런데 은유는 웃으며말했다
'하하 엄마. 아니야. 우에할머니는 병원에 있어요.'
은유는 '외'발음이 잘 되지 않는지 '우에'할머니라고 했다. 외할머니라는 단어를 처음 써보는 건데 내가 말하자마자 외할머니가 우리엄마인걸 아는 게 신기했다. 마지막 몇 달 동안은 병원에서만 만났으니 어린아이의 순수한 생각에 외할머니는 병원에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나는 현명한 대답을 찾으려 머리를 굴리다가 곧 포기하고 "그래. 맞아. 외할머니는 많이 아파서 병원에 계셔. 나중에 만나게 될 거야."
지혜도 없고 일관성도 없는 답을 했다.
언젠가 은유가 외할머니를 잊으면 엄마는 얼마나 서운할까. 죽은 사람이 서운함을 느낄 리 없을 텐데도 자꾸 그런 생각이 든다. 어쩌면 그저 내가 서운한 걸까?
내게는 엄마 추모 영상이 하나 있다. 엄마 생전에 찍어둔 사진과 동영상을 모아 편집해 둔 것이다. 장례식을 마친 그날, 엄마가 보고 싶을 때마다 보려고 울면서 만들었다. BGM은 엄마가 가장 좋아했던 가수 임영웅의 <무지개>다.
사진과 동영상은 95프로 이상이 엄마가 암 판정을 받은 2018년도 이후에 찍은 것들이다. 그전엔 바보같이 엄마 동영상 찍을 생각을 못했다.
나머지 5프로는 엄마 아프기 전 엄마나 아빠 생일, 혹은삼 남매 중 누군가가 입학하거나 졸업하거나 하는 특별한 날에만 한 두장 형식적으로 찍어둔 것들이다. 그때는 앞으로도 우리가 함께 보낼 생일과 여행, 특별한 날들이 수 십 번 수 백 번 잔뜩 있을 거라 생각했으니까.
예쁘고 귀한 것을 보면 눈에 담을 생각보다 카메라부터 들이대는 전형적인 요즘사람이었는데 왜 엄마 사진은 안 찍었을까? 내게 엄마가 예쁘고 귀하지 않았던 걸까?
아냐, 그건 너무 슬픈 생각이다.
아마 공기처럼 물처럼 당연해서 카메라에 담아 넣을 생각조차 못한 것이다. 누구라도 없으면 당장 죽는 산소가 귀해서 매일 비닐봉지에 담아 진공포장 해두진 않는 것처럼.
엄마가 투병을 시작하고는 자주 엄마의 사진을 찍으려 했다. 어쩌면 엄마를 찍을 시간이 생각보다 많지 않을 수 있다는 걸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던 거겠지. 그제야 뜬금없이 '엄마. 셀카 한 장 찍을까?' 소리를 달고 살았다. 엄마는 카메라 앞에서 웃지 않았다.
엄마는 카메라가 어색하고 자기는 사진빨이 너무너무 안 받기 때문에 찍기 싫다고 했다. (정말 그런지는 잘 모르겠어. 엄마 미안.. 그때는 엄마가 아팠으니까 기분 좋으라고 동조한 거야. 나 이제는 말할 수 있어. 엄마는 사진처럼 생겼어!!)
그런데 내 아이들이 태어나자 엄마는 자연스럽게 카메라 앞에서도 웃었다. 사실 손주들만 눈앞에 있으면 카메라가 없어도 웃었다. 난 그걸 자연스럽게 포착하기만 하면 되었다.
그래서 내가 편집한 이 영상 속 대부분의 사진과 동영상은 우리 아이들과 찍은 것이다.
매일 봐도 매일 같은 생각이 든다. '영상 속 엄마 무진장 행복해 보인다.'
그 동영상을 자주 은유에게 보여준다. 은유는 이 영상을 좋아한다. 누나가 좋아하니 멋모르는 20개월 동생 은호도 좋아한다.
장면장면마다 '할머니가 은유를 보면서 하하 웃네' '할머니가 은유랑 하나 둘 셋 수를 세네' '할머니가 은유 업었네' 열심히 설명을 하면서 본다. BGM으로 넣은 임영웅 가수의 <무지개>를 '우리 함께 가요 뚜루루뚜뚜' 혀 짧은 소리로 따라 부른다.
자려고 누워 어두운 방에서 이 영상을 틀어주면 은유와 은호는 재밌는지 키득키득 웃고 그걸 보는 나는 눈물이 난다. 아이들이 놀랄까 봐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줄줄 흐르는 눈물을 조용히 닦아낸다.
그런데 하루는 은유가 이 노래를 듣더니 "어! 이상하다. 내가 왜 자꾸 눈물이 나지?"라고 했다. 은유가 좋아하던 이 노래가 갑자기 슬프게 느껴질 수는 없다. 언젠가 이 노래를 듣고 내가 우는 모습을 봤나 보다. 다신 은유 앞에서 울지 않기로 다짐하며 "정말? 엄마는 이 노래를 들으니 행복해서 웃음이 나는데?" 엉덩이 씰룩씰룩 춤까지 추면서 오버액션을 했다. 은유가 이 노래가, 이 영상이 싫다고 하면 서운하고 슬플 것 같아서다.
세상에 본인들을 그렇게나 사랑했던 존재가 있었다는 그 사실만으로도 아이들은 좀 더 나은 인간이 될 거라 믿는다. 인간을 긍정적으로 변화시키는 건 사랑 또 사랑이니까.
그럼에도 우리엄마가 아이들에게 곧 존재하지도 않았던 사람처럼 기억 속에서 잊힌다고 생각하니 엄마 대신 내가 서럽다. 그런 날은 괜스레 은유를 채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