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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호 Apr 23. 2024

아직 엄마를 잃지 않은 사람들을 위한 가이드북

에필로그

지난주 금요일. 마지막 정식 연재글을 마치고 발행하기 버튼을 누른 뒤 노트북을 닫았다. 그리고 서둘러 길을 나섰다. 미세먼지는 좀 있었지만 볕은 따뜻했다.

우리 엄마가 돌아가시고 맞이하는 첫 생일이었다.


사람이 죽고 첫 생일은 챙기는 거라고 주변에서 말하길래 줏대 없는 사람답게 그렇게 했다. 내 자식 생일파티를 준비하는 것처럼 은근한 설렘과 기쁨을 느끼면서 시장에서 장을 봤다. 과일 값이 금값이라더니 사과 3개, 배 3개, 망고 3개를 고르니 6만 5천 원이라는 숫자가 돌아왔다.


"헐"

당황의 감탄사가 눈치도 없이 입 밖으로 내뱉어졌다.

"배는 8천 원짜리 말고 7천 원짜리도 있는데 그걸로 드릴까?"

내 주머니 사정이 여의치 않아 보였는지 사장님이 물으신다.

"아니에요. 울 엄마 생일이니 8천 원짜리 주세요. 제일 크고 맛있는 걸로요."


엄마가 좋아하던 미니족발, 대왕카스텔라, 가래떡 샀다. 마지막으로 한우 국거리를 사서 사골국물을 넣고 미역국을 푹 끓였다. 아침에 아이들을 등원시키기 전에 미역국에 밥을 말아 먹이며 말했다.

"오늘 외할머니 생신이셔서 미역국 먹는 거야. 은유 은호는 좋겠다. 외할머니 덕분에 맛있는 미역국도 먹고. 누구 생일이라고~?"

"우에할머니!"

아직 '외'발음을 잘하지 못하는 첫째의 혀 짧은 소리가 듣기 좋다.

"자! 외할머니 생일이니까 특별히 요거트도 먹고 젤리도 먹고 쿠키도 하나씩 줄게. 어때? 외할머니 생일 정말 좋은 날이지?"

"네! 우에할머니 생일 너무너무 좋아요!"

오늘도 나의 '외할머니 잊지 못하게 하기 프로젝트'는 계속되고 있다.


엄마를 만나러 가는 길은 언제나 설렌다. 차로 1시간 반이나 가야 하는 거리감 때문인지 멀리 여행을 떠나는 기분이 든다. 수목장에 먼저 도착해 있는 언니와 아빠를 만나 바리바리 챙겨 온 짐을 나누어 들고 엄마 나무 앞에 섰다.


"엄마~ 우리 왔어"

엄마나무에 걸려있는 사진 속 엄마는 오늘도 인자하게 웃고 있다. 나는 그 명패를 제작할 때 사진 아래에 엄마를 찾아온 우리에게 엄마가 해줄 것 같은 말을 함께 썼다.

'예쁜 내 새끼들 어서 와. 내 곁에서 편히 쉬다가 가.'

두 팔 벌려 우리를 반기면서 저리 말하는 엄마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돗자리를 깔고 가져온 음식을 차려냈다. 엄마가 좋아하던 믹스커피도 한 잔 타 엄마 나무 옆에 올렸다. 그렇게나 좋아했지만 암 선고 후에 한 잔도 못 마시고 떠난 막걸리도 가득 따라 건다. 나란히 서서 엄마 나무를 바라보며 슬픔이 찰랑찰랑 차오르는 것을 느끼려는 순간 똥파리 한 마리가  과일들 사이로 윙윙하고 날아다니며 초를 쳤다. 우리 삼 남매 사이에 순식간에 장난기가 흘러 들어왔다.


"엄마다! 엄마가 파리가 돼서 왔다!!"

"엄마!! 사과 먹고 싶었어? 많이 먹어. 단 게 땡겼구나?"


낄낄대며 헛소리를 늘어놓다 다시 엄마 앞에 섰다.

"생일 축하 노래 하나 부를까?"

"무슨 노래를 불러야 하지?"

"어버이 은혜 부를래?"

"낳으실 제 괴로움 다 잊으시고.." 언니는 갑자기 코를 부여잡고 오열하는 척하면서 '어버이 은혜'를 부르기 시작했다. 나는 그 옆에서 "아이고 엄마! 나를 두고 어딜 가쇼!!" 출처를 알 수 없는 사투리를 하며 땅을 치고 곡을 했다.


"큭큭 그냥 절이나 하자."

겨우 웃음을 멈추고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우리 절할게. 엄마, 하늘나라에서 첫 생일 축하해."


생일 축하한단 말이 이렇게 슬픈 말인가. 방금까지 웃어놓곤 생일자 없는 생일파티가 서러워 눈물이 금세 차올랐다.

이게 엄마의 마지막 생일파티. 죽은 자는 기일이 생일이랬던가. 이제 엄마는 돌아가신 날에 기려질 것이다.




엄마가 암투병을 하는 동안 병간호를 하며, 엄마 장례를 치러내며 아쉬운 점들이 많았다. 특히나 엄마에게 묻지 못한 질문들이 계속 생각나고 다시는 엄마에게 질문할 수 없다는 사실이 안타까웠다.

누구에게라도 엄마가 살아계시다면 '이런 것들을 물어봐라. 이런 것들을 준비해라.' 붙잡고 얘기해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래서 전문적인 지식도 없으면서 이렇게 '아직 엄마를 잃지 않은 사람들을 위한 가이드북'을 쓰기 시작했다. 실질적인 도움이 됐으리라고는 생각 안 한다. 나는 장례지도사도 아니고 장례식장 직원도 아니니까. 내 경험은 한 번뿐이고 내가 겪은 모든 일들은 나라는 한 사람에 한정돼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단 한 명의 사람이라도 내 글을 보고 엄마 혹은 아빠가 돌아가시는 상상을 해보고, 부모님께 애틋한 마음이 생기고 그날 저녁이라도 당장 함께 눈을 맞추고 대화하며 함께 맛있는 식사를 했다면 그걸로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때때로 어리둥절해지곤 한다. 엄마가 죽은 지 아주아주 오래된 것 같기도 하고 아직 죽지 않은 것 같기도 하다. 엄마의 목소리 많이 흐릿해졌다. 엄마는 나를 어떻게 불렀더라, "유호야."라고 했나? "김유호!"라고 했나.

반대로 엄마가 죽어가던 모습은 지나치게 선명하게 각인 돼 가끔 도리질을 하며 억지로 떨쳐내기도 한다.

엄마의 기억이 흐릿해지는 동시에 선명해지는 희한한 경험을 하고 있다.


엄마 병원 1층에 있던 카페는 프랜차이즈이긴 하지만 지점이 아주 많지는 않다. 우리는 늘 그곳에서 커피를 마셨다. 어느 날 처음 가 본 어느 빌딩에서 누구를 기다리느라 앉아있을 만한 카페가 없나 두리번거리다 그 브랜드의 카페를 마주하고는 마음이 덜컹하고 움직였다.

앞으로도 늘 엄마가 애절하게 그립다기보다는 내 마음은 언제나 잔잔한 바다 같다가 어떤 추억의 바위가 갑자기 마음에 내던져지고 크게 렁이겠구나 예감했다. 하지만 나는 안다. 그 파도는 금세 잠잠해지고 곧 고요가 찾아오리라는 것을.


여전히 사랑하는 것들을 상실하는 것이 두렵지만 이제는 그게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것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나 역시 언젠가는 누군가의 상실이 되고 말겠지. 그러니 결국 내가 지금처럼 선명하게 살아있을 때 최선을 다해 사랑하며 살아가는 수밖에 없다는 진부하지만 진리인 결론이 도출되고야 만다.


엄마가 있을 때는 어른이 될 수 없었다. 이제야 어른이 된 기분이 든다.

아직 어른아이인 많은 자녀들에게 갑자기 어른이 되어버리는 순간이 오기 전 조금의 가이드라도 되어주고 싶어 썼다.

부모님 혹은 내 옆의 가족을 조금이라도 더 사랑하고 이해하게 되는데 약간이라도 도움이 되었다면 감사하고 행복할 것 같다.




그간 읽어주시고 경험을 공유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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