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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호 Apr 02. 2024

엄마가 죽으면 엄마 형제와 나는 어떤 관계가 될까?

외가 친척들과의 관계

우리 삼 남매는 친가와는 관계가 엉망이지만(결국 엄마 장례식 다음날 친가 식구들과 절연했다.) 외가와는 내게 기억이 남아있는 모든 시절 한결같이 가깝게 지냈다. 세 분의 외삼촌들과 세 분의 이모들이 계신데 하나같이 다정하고 좋으신 분들이다. 어른들이 그러하시니 사촌오빠, 언니, 동생들도 모두 선한 사람들이다. 가족 중에 빌런 하나 없기 쉽지 않은데 우리 외가는 그랬다.

 

엄마는 때가 되면 이모들과 옷을 맞춰 입고 네 자매 여행을 떠났다. 간혹 막내 외삼촌이 껴서 운전기사와 재간둥이 역할을 했다.

엄마와 이모들은 외삼촌이 말장난을 하고 들썩들썩 춤을 추면 방바닥을 구르며 웃었다. 눈물이 날 때까지 웃고 나면 어릴 때부터 먹던 추억의 음식인 감자버무리를 한솥 해서 나눠 먹으며 네가 더 많이 먹었니 내가 더 많이 먹었니, 엄마가 해준 그 맛이 맞니 아니니 실랑이를 했다.

그러면 막내외삼촌이 '에잇! 박씨 아줌마들 시끄러워. 춤이나 추자.' 덩실덩실 춤을 추고 똑 닮은 네 자매는 또 소리를 지르고 서로의 등짝을 때려가며 웃었다. 아기일 때부터 익숙하게 봐 온 풍경이다.



얼굴 똑같이 생겼는데 옷까지 똑같이 맞추고 여행 간 네 자매.




섬망이 심해 간병인을 무서워하던 엄마를 위해 마지막 병간호를 이모들이 번갈아가면서 했다. 큰 이모는 어지럼증이 심해서 무리하면 안 되는 상황이었는데도 병원에서 먹고 자고 하며 2주 동안이나 아기가 된 엄마를 돌봤다.

그 당시에는 몰랐지만 그때가 엄마가 거의 죽기 직전이었기 때문에 여러 임종증상이 나타났다. 먹은 것도 없이 엄청나게 많은 대변을 보고 감정기복이 심해 짜증을 많이 냈다. 특히 밤에 섬망이 심해져서 자꾸 탈출을 하려고 해서 이모들도 간병을 하는 내내 못 주무셨다.

그저 동생이라서, 언니라서 이모들은 그 상황을 웃으며 견뎌주었다. 우리가 고맙다고 말하면 싫어하셨다. 당신들 언니고 동생인데 너희들이 왜 고맙냐고.


큰외삼촌과 둘째 큰외삼촌은 과묵하지만 다정하시다. 둘은 성미가 급하고 기다림을 못 견디는 것이 똑 닮았다. 하루는 둘째 큰외삼촌이 다짜고짜 전화해서 너네 집 밑인데 문 좀 열어보라고 하더니 들어와서 엄마한테 "얼굴이 이게 뭐냐. 암 그거 다 마음만 굳게 먹으면 이겨낼 수 있는 거다. 너 이러니까 보기 힘들다. 에잇! 오빠 간다. 나오지 마." 대답할 기회도 안 주고 혼잣말을 쏟아내고는 10분도 안 돼서 나가버리셨다. 신발을 신으면서 눈물을 떨어뜨린 것은 나만 봤다. 억지로 쥐어주고 간 봉투를 슬며시 열어보더니 엄마도 그제서야 울었다. (아무래도 생각보다 액수가 컸지 않나 합리적 추측중)


모두 나에게 소중한 분들이다. 나의 유년시절을 군데군데 맛깔난 양념처럼 채워 버무려주셨다. 태어날 때부터 나의 친척이었으니 영원히 나의 친척일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중간고리인 엄마가 사라지자 어쩔 수 없이 묘하게 멀어진 낌을 받는다.

자식들은 부모들이 모이면 당연하게 끼어가는 부품 같은 것이다. 그런데 엄마라는 본체가 없으니 끼어갈 일 자체가 영 생기지 않는다.


각자 일과 삶이 있으니 서로 바쁘긴 하다. 그런데 엄마와 형제들은 바쁜 와중에도 시간을 맞춰 만나려 애를 썼다면 우리가 엄마의 형제들과 부러 그렇게 하기에는 좀 어색한 일이라고 해야 할까? 설명할 수 없는 애매한 마음의 거리감이 생겼다.

'우리가 집안 경조사를 제외하고 죽을 때까지 또 만날 일이 몇 번이나 있을까?'

어느 날 문득 이런 생각을 하고는 혼자 헉하고 놀랐다. 그 생각이 좀 불경하게 느껴지기도 한 동시에 지나치게 현실적이었기 때문이다.


엄마와 형제들의 끈끈함에 묻어갔던 것이지 내가 이모들, 외삼촌들과 개인적 끈끈함이 있는 것인가 이제와 생각하면 잘 모르겠다. 여태까지는 그런 생각을 해 볼 필요 자체가 없었다.

그럼 앞으로 사촌언니 오빠들, 동생들과는 어떻게 되는 걸까? 우리끼리 연락을 해서 약속 잡고 만나는 건가? 부모 잃은 다른 사람들은 친척들과 어떻게 지내는 걸까?


장례식에서 이모들은 엄마 없다고 이모들한테 연락 안 하고 그러면 안 된다고. 우리가 너무 보고 싶을 거라고 했다. 우리도 '엄마 없으면 이모들이 우리 엄마지. 자주 만나자.' 했다. 쌍방이 진심이었다.

그러나 이모들이 나에게 엄마 대타가 되어줄 수는 없다. 나 역시 이모들에게 자매가 되어줄 수 없듯이.

우리는 앞으로 우리가 예전 같지 않을 것을 미리 예견해서, 그래서 우리 그러지는 말자고 의리의 다짐을 한 것도 같다.


나는 엄마에게 대체로 사랑받았고 때로는 상처받았다.

나도 늘 엄마를 사랑했다고 생각하지만 종종 엄마의 마음을 할퀴었을 것이 분명하다. 나와 이모들은 그러한 시간과 기억을 공유하고 있지 않다.

그건 이모들 입장에서도 마찬가지다. 나는 이모들과 어렸을 적 외할머니가 해주신 감자버무리를 맛있게 먹은 기억도 없고 함께 한 공장에서 일하며 좁은 방 한 칸에서 부대껴 살아본 적도 없다.  


그러니 우리가 앞으로 이 정도의 관계나마 잘 지켜내기 위해서라도 나는 잘 살아가야한다.

혹여 아쉬운 소리를 하는 순간 어색함이 우리 모두를 잡아먹을 것 같다.

엄마라면 내가 범죄를 저지르더라도 어쩔 수 없이 나를 껴안고 갈 것이다. 나는 어쩔 수 없는 엄마의 새끼니까. 하지만 엄마의 형제들은 다르다. 이모들과 외삼촌들도 당신들의 사랑하는 자녀가 있고 손주도 있다. 환갑 넘어 또 다른 자식 셋을 이고 지고 갈 수는 없는 것이다.

나에게 효도하며 노후를 책임져야 할 노인이 갑자기 몇 명 더 생긴다면 당황스러운 것과 같으니 서운할 것은 없다.

그러니 지금처럼 적정선을 유지하며 아름다운 거리를 지키면서 피해를 끼치지 않고 즐거운 시간을 함께 보내는 담백하고 청량한 관계로 남고 싶다.


어쩌면 엄마가 떠나고서도 엄마의 형제들과 지지고 볶고 진짜 엄마아빠와 자식처럼 잘 지내는 사람들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기본적으로 남편을 제외하고 모든 인간관계에서 피해를 주는 것도 받는 것도 싫어하는 약간의 강박이 있는 사람이다. 둘 중에 굳이 고르자면 피해를 받는 편을 택하는 쪽. 그러니 살며 친척들에게 아쉬운 소리 하는 일이 생기지 않기를 간절히 바랄 뿐이다.




지난 명절에 셋째 이모가 우리 가족을 집으로 초대했다. 셋째 이모는 특히 엄마와 친해서 2주에 한 번씩 엄마 집에 놀러 와서 1박 2일 있다가 갔다. 우리도 이모가 오면 온 식구가 출동해서 이모랑 시간을 보냈다. 그래서인지 이모는 나의 자식들에게도 각별한 애정이 있다. 조카 손주들도 보고 싶고 명절 연휴 엄마가 그리워 내가 쓸쓸할까 봐 부른 것이다. 정성 들여 차린 집밥도 오랜만에 보는 친척동생들도 정말 좋았다.

하지만 이모네서 하룻밤 자고 일어나자 서둘러 집에 가고 싶었다. 이모가 청소도 하고 싶을 것 같고 조용히 쉬고 싶을 것도 같아서 아무도 뭐라 하지 않았지만 스스로 군식구가 된 느낌을 사서 받은 것이다.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남편은 하루 더 놀다 가자고 한다.


"은유가 언니들(내 친척동생의 딸들)도 좋아하고 이모님도 더 있다 가라고 하시잖아. 내가 저녁에 회 쏠게!"


해맑은 내 남편을 보며 이 남자는 참 구김살이 없구나 싶었다. 나는 늘 구김살 없는 사람이 신기했다. 내가 어느 정도는 구겨져있기 때문이겠지.

남편은 엄마 아빠뿐 아니라 할머니 할아버지까지 다 살아계시다. 어렸을 때부터 이모, 삼촌들의 큰 사랑을 받고 자랐다. 그 사랑은 내 남편의 자존감, 자신감의 원동력이 되었다. 사람들이 본인을 싫어할 리 없다는 강력한 확신을 갖고 있다. 그러한 확신은 태도가 되어 그는 언제나 밝은 기운을 내뿜고 정말로 모든 사람들이 내 남편을 좋아한다.

나로 말하자면 사람들이 나를 싫어하기 전에 그럴 일말의 여지조차 만들지 않는 편. 빨리 이모 집에서 떠나고 싶었다.


가만히 한 번 상상해 본다.

내가 어릴 때 엄마가 돌아가셨다면 갈 곳 잃은 엄마를 향한 사랑이 혹시 이모나 외삼촌들에게 가지는 않았을까? 어린 마음에 큰 기대를 하고 또 때로는 실망하지 않았을까.

세상을 어느 정도는 알고 또 적절히 이 세상에 물든 어른이 된 후에 떠나 준 엄마가 고맙다.

 

어쩌면 내가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 방식이 지나치게 조심스럽고 깔끔한 걸까? 잘 모르겠다.




쓸쓸할 때 떠올리면 마음이 데워지는 장면들이 있다.


엄마의 임종면회 때 몇 시간 내리 울다 지쳐 내 눈물이 말라버렸을 때도 잠그지 못하는 수도꼭지처럼 밤부터 아침까지 통곡하던 셋째 이모의 울음소리.

상조회사와 장지 등을 결정하느라 머리 아픈 우리 삼 남매 곁에서 함부로 참견하지 않으시고 뒷짐 진 채 맴돌며 '니들이 알아서 해. 니들은 똑똑하잖아. 외삼촌은 그냥 여기 있어줄 테니까. 응?' 하던 무뚝뚝한 둘째 외삼촌의 불뚝 나온 배.

상주들은 제단 앞을 지켜야 한다지만 밀려드는 각자의 손님들을 모른 채 할 수 없어 자꾸만 비워지는 빈소에 우리 대신 앉아서 '누나, 가서 얘기 나누고 있어. 내가 여기 지키다 손님 오면 부를게.' 하던 셋째 이모의 아들.

내 결혼식에서도 축의금을 받아주더니 천 원짜리 영수증 하나 빼먹지 않고 꼼꼼히 메모하며 조의금과 영수증을 정리하던 첫째 이모 아들.

도우미 이모들이 모두 퇴근한 새벽까지 손님이 끊이지 않아 쉴 새 없이 주방일을 하던 첫째 큰외숙모와 부산 새언니. '제가 할게요.' 하자 손사래를 치며 나를 밀어내던 두 사람의 다정한 손길.

어린아이들 두 명을 데리고도 태연하게 '언니. 나도 갈게.' 하며 49재에 참석해 하염없이 엄마를 위해 절을 올리던 셋째 이모 딸의 뒷모습.

쉴 새 없이 신발을 정리하며 '아오 다들 왜 이렇게 신발을 막 벗어.' 막내이모 아들의 구시렁거리던 목소리.


내가 사랑하는 나의 가족. 정다운 내 인연의 실들.

엄마가 없는 우리 사이가 이제 다시 완벽하게 예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어도 언젠가 그들이 나와 같은 아픔을 겪을 때 제일 먼저 달려가 가장 힘든 일을 해줄 것이다.

내 사랑과 아쉬움과 쓸쓸함을 담아 할 수 있는 모든 걸 도와주리라 다짐한다.


그리고 우리는 언젠가 깨닫겠지. 중요한 날마다 곁에 있던 서로의 존재를.

세월이 흐르며 어떤 삶은 끝나버리고 어떤 감정은 희미해져도 우리가 함께 했던 시간만은 진짜임을.

몇 년에 한 번쯤 앨범을 뒤적이다 서로의 유년시절을 발견하고 반가워할 수도 있겠지.

언제나 함께하는 친부모 친형제는 아니기에 그만큼 가깝진 않아도 또 그렇기에 서로 단 한 번도 상처 주지 않았음을.

그래서 우린 여전히 서로에게 좋은 기억이고 추억이란 것을.


신기하게도 이 글을 쓰는 와중 둘째 외삼촌께 전화가 왔다. 위에서 말한 그 성미 급한 외삼촌이다. 엄마가 돌아가시고 나서 첫 통화인 것 같다. 외삼촌은 내 대답에는 관심이 없으신 듯 어떻게 지내냐, 잘 지내냐, 애들 키우느라 고생이 많다, 애들은 유치원 갔냐, 그래그래 잘 지내라, 또 보자, 아빠한테 잘해라, 미워도 아빠다, 그래그래 들어가라. 하고 빠르게 말씀하시며 1분도 되지 않는 통화를 마쳤다.

나는 이게 우리 외삼촌 최대의 신경씀이란 걸 알고 있다.


우리 이렇게 서로 신경쓰면서 만나면 언제나 반가운 사이로 평생 지낼 수 있기를 바라고 또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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