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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호 Mar 29. 2024

엄마가 죽은 집에서 이사를 가야 할까?

유품정리와 이사

오늘도 실패다. 몇 번을 해봐도 비빔국수만큼은 도저히 엄마 맛이 나지 않는다. 나는 자칭타칭 '못하는 게 없는 사람'이다. 뭐든 일단 하기만 하면 중간 이상은 한다. 

문제는 들보다 월등히 잘하는 한 가지는 없다는 것. 그래서 내 어중간한 재능들은 밥벌이에 도움이 되지는 않는다는 것.


서른 넘어 결혼해서 처음 시작한 요리도 언제나 중간 이상은 해내는 인간답게 곧잘 한다는 평을 들었다. 묵은지등갈비찜, 육개장 같이 꽤나 난이도 있는 음식도 먹을만하게 다. 그런데 도저히 비빔국수만큼은 엄마 근처도 못 가는 것이다.


엄마는 비빔국수의 달인이다. 아빠가 국수를 좋아해서 밤낮없이 자주 해주다 보니 그리 되었나 보다. 아빠는 방에 누워 TV에 나온 국수 맛집을 보다가 갑자기 그 집을 찾아 서울에서 강원도까지 갈 만큼 국수 마니아다. 그런 아빠조차도 비빔국수는 전국에서 네 엄마보다 잘하는 사람이 없다고 할 정도니 나는 엄마가 건강할 때 왜 비빔국수 전문점을 차리라고 안 했는지 후회가 된다. 그러면 매일 적자가 나는 아빠 사업보다 훨씬 성공해서 대박을 터뜨렸을 텐데.

이미 늦었다. 엄마는 없고 엄마 흉내를 내지 못해 '2대째 내려오는 비빔국수맛집!' 간판을 내걸  없는 무쓸모한 삼 남매가 남았을 뿐이다.


"엄마. 밥 말고 뭐 먹을 거 없나?"

"그럼 비빔국수 해줄까? 일단 커피 한 잔 먹꼬~~"


늘 앞치마를 입고 생활을 하는 엄마는 앞치마를 둘러메는 준비동작도 필요 없이 믹스 커피 한 잔마시면 바로 요리 시작이다. '일단 커피 한 잔 먹꼬~'는 무조건 K아줌마 운율로 노래하듯 말해야 한다.

엄마 옆에서 오이 썰라면 썰고 간 좀 보라면 보고 보조 역할 하며 함께 요리하는 시간 재밌었다. 결혼하고 나서는 엄마 옆에 바짝 붙어 서서 배우려고 애를 썼다.

"엄마. 지금 내 눈앞에서 해 봐. 똑같이 재료 넣었는데 나는 왜 이 맛이 안 나지? 내가 쭉 볼게? 한 번 해 봐. 잠깐! 기다려 봐. 좀 적어두게. 간장 두 스푼이야? 설탕 한 스푼이야?"


엄만 늘 잘 모르겠다고 했다.

"그냥 요큼 넣는 거야. 적당히."


그래도 어깨너머 배운다더니 비빔국수를 빼고는 제법 엄마 맛을 흉내 낸다.

평생 내 요리 기준은 엄마가 되겠지. 엄마 맛이 나면 성공, 엄마 맛이 안 나면 실패라 느끼며.




삼우제가 끝나고 일주일쯤 지나서 우리 삼 남매는 용기를 내 엄마집에 모였다. 대강이라도 유품 정리를 해보려는 것이다. 동생은 마지막까지 엄마와 같이 살았으니 그 집에 가는 것이 괴로워 친구집이나 누나들 집을 전전하고 있었다. 나와 언니는 엄마가 마지막 몇 개월은 병원에 있었기 때문에 엄마 집에 가는 것이 정말 오랜만이었다.


비밀번호를 누르고 집에 들어선 순간 적막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엄마 없는 이 집은 처음 와 본 남의 민박집 같이 어색하고 썰렁했다.

왠지 러워 눈물이 날 것 같아서 빈집에 대고 갑자기 아무 말이나 뱉다.


".. 계세요~?"


우리 셋은 갑자기 튀어나온 내 실없는 말에 큭큭대고 웃다가 의미 없는 말장난을 2절, 3절까지 멈추지 못한다.


"집 좀 보러 왔습니다."

"됐어요. 집 안 보여줘요. 여기 귀신 살아요."


웃으며 들어선 엄마 방은 엄마만 없을 뿐 엄마 있을 때와 모든 것이 변함없어서 오히려 엄마의 부재가 도드라졌다. 엄마의 촌스럽고 딱딱한 돌침대, 종양이 온몸에 튀어나와 누워서 자지 못 해 급하게 사 1인용 리클라이너 소파, 겨울에도 쉴 새 없이 땀이 흘러 자꾸만 켜대던 선풍기, TV소리 없인 잠들지 못해서 24시간 켜있던 TV.

그리고.

그리고 우리 엄마의 앞치마.


엄마는 언제나 앞치마를 입고 있었다. 그거 몸에 붙은 거냐며 놀렸지만 엄마가 되고 나니 알았다. 하루종일 청소, 빨래, 요리를 하다 보면 언제나 옷이 물에 젖을 위험이 있었던 것을. 입었다 벗었다 하는 것보다 그냥 입고 생활하는 것이 덜 귀찮다는 것을. 언제나 그 처지가 되어봐야 알 수 있다. 겪어봐야 이해할 수 있다.


엄마는 조금이지만 금도 가지고 있었고 우리가 사준 괜찮은 가방과 지갑도 있었다. 보험회사에서 나올 사망보험금도 있었다.

하지만 우리가 정작 가지고 싶어서 놓고 싸운 건 앞치마였다. 엄마의 트레이드마크이자 한 몸 같았던 엄마의 앞치마가 두 개 밖에 없었다.

조악한 꽃무늬와 촌스러운 컬러의 앞치마를 입고 요리할 생각도 없으면서 누나들은 앞치마를 입어야 하는 주부 아니냐며 동생에게 양보를 강요해 한 개씩 얻어냈다.


서랍을 정리하려 열어보니 엄마는 여태 우리가 용돈을 주었던 봉투를 전부 가지고 있었다.(아쉽게도 돈은 다 쓰고 없었음) 심지어 언니와 나의 결혼식 때 하객들이 주었던 축의금 봉투까지 모두 모아두었다.

"이 아줌마 아기 다람쥐 아니냐? 뭘 이런 걸 다 모아놔."


웃다 울다 하며 1차 유품정리를 마쳤다.

가방과 지갑, 엄마의 새 옷과 운동화들은 이모들에게 나누어 주기로 했다. 나머지는 전부 버렸다. 예전에는 고인이 쓰던 물건을 태워서 고인과 함께 떠나게 한다는 믿음이 있었지만 요즘은 그런 믿음 자체가 희미해진 데다 아무 데서나 물건을 태웠다가는 폐기물관리법에 따라 과태료를 물 수도 있다. 우리는 제일 최근에 사드린 엄마 새 옷 한 벌만 49재를 지 절에서 태우기로 하고 나머지는 헌 옷 수거함에 넣거나 종량제 봉투에 넣어 처리했다.




엄마의 앞치마를 돌돌 말아 안아 들고 시뻘게진 눈과 코를 하고는 엄마 집을 나섰다. 엄마의 공간에 잠시 있다 나오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마구 헤집어졌다. 동생을 서둘러 이사시켜야겠다는 생각이 확실해졌다.

브라이언 셔프, 론 마라스코가 쓴 <슬픔의 위안>에서는 퇴근해서 돌아와 보니 집에서 죽은 부인을 발견한 한 남자의 이야기가 나온다.


사람들은 대부분 남자가 집을 팔고 이사를 가리라고 생각했다. 본인도 그러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막상 지내보니 그 집에서 지내는 것도 괜찮았다.
몇 주 뒤 남자는 직장으로 복귀했고, 얼마 동안은 모든 게 순조로웠다. 그러던 어느 날, 차를 몰고 귀가하던 남자는 낯선 상황에 맞닥뜨린다. 남자의 집은 번화가의 모퉁이에 있었는데, 교차로에서 정지신호를 받고 멈춰 선 남자는 좌회전을 해서 자기 집 차로로 들어가려고 기다리고 있었다.
불현듯 회사를 다니던 내내 교차로에서 정지신호를 받을 때마다 부엌 창문 너머로 저녁을 준비하는 아내를 바라보던 사실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그날 신호가 바뀌기를 기다리면서 남자는 그 집을 팔게 되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아내가 없는 창문을 바라보는 일은 도저히 견딜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상실감은 삶 속에 고요히 잠복하다가 어느 날 불현듯 나를 찌른다. 그 공격은 너무 갑작스럽고 날카롭다. 동생은 엄마와 마지막까지 함께 살았으니 고개만 돌리면 어디에나 엄마가 있을 것이다. 먹는 엄마, 자는 엄마, 나물을 다듬는 엄마. 엄마가 몇 번이나 쓰러져 다급하게 응급실로 엄마를 실어 날라야 했던 그 기억들이 어느 날 갑자기 동생을 찌를까 두려워졌다.


동생은 나와는 7살, 언니와는 8살 차이가 난다. 그래서인지 서른 넘은 징그러운 성인남자인데도 철부지 애 같다. 언니와 나는 복잡하거나 돈에 관련된 결정들을 우리도 모르게 이렇게 말하곤 한다.

"애는 빼고 얘기하자. 애가 뭘 알아."



이번에 동생의 거취를 결정하는 문제에도 동생의 의견보다는 우리의 판단이 우선했다. 지금도 알코올의존이 있는 애니 아무 데나 내버려 두면 허구한 날 술이나 먹을 테지. 언니가 자기가 들여다본다며 본인 집 5분 거리에 멋대로 집을 구해버렸다. 말은 '멋대로'라고 지만 채광과 역과의 거리, 주차, 관리비, 등기부등본과 주인의 세금납부 현황까지 확인하고 저지른 일이다.


엄마집에 있는 모든 가전, 가구는 다음 이사 올 사람에게 넘기거나 폐기물업체를 불러 전부 버렸다. 그 집에서 가지고 나올 것은 옷가지와 건조기 한 대, 그리고 동생의 몸뚱이와 엄마와의 아름다운 추억뿐이다.

그 아이가 새로운 마음으로 시작을 했으면 좋겠다.


솔직히 우리 삼 남매가 아무리 끈끈하고 친하다 해도 동생이 느낄 혼자만의 외로움이 있을 것이다. 나와 언니는 우리가 스스로 꾸려낸 새 가족이 있으니까. 언니와 내가 아이들 똥을 치우고 밥을 챙겨 먹이느라 엄마가 비집고 들어올 틈도 없이 바쁠 때 동생에게는 시간의 여백이 너무 많고 자연스레 그 빈 공간은 엄마가 채우고 말 테니. 그래서 또 저녁이 되면 공허함에 술잔을 자꾸 들게 되는 것을 모른 체 해왔던 것이다.


우리는 엄마 앞으로 나온 보험금, 엄마가 살던 전셋집의 보증금을 모두 동생에게 줬다. 우리가 경제적으로 여유로워서가 아니고 사랑하는 룸메이트를 잃고 혼자 남겨진 사람에게 주는 위로금 같은 거였다.

몇 번의 앙상블로 무대에 선 무명의 뮤지컬 배우.

안정된 직장과 가정을 가질 확률이 높지 않은 동생에게 비빌 언덕이 되어 주고 싶은 누나들의 모성애 흉내다.

적지 않은 돈이었는데 사려 깊은 형부와 내 남편은 당연한 듯이 그러라 해주었다.


새 보금자리에서 그 아이가 날개를 달고 날아오르기를 바라고 있다. (그리고 좀 추스럽게 들릴 수 있겠지만 혹시라도 성공한다면 우리가 준 돈을 돌려주었으면 좋겠다^^;)


사랑하는 사람이 죽은 집에서 꼭 이사를 가야 하느냐 하면 그건 모르겠다. 그 부분은 정말로 개인의 선택인 것 같다. 떠난 사람의 흔적을 붙들고 살아가는 게 누군가한테는 위로와 위안일 수 있고 누군가한테는 미련한 미련일 수 있다. 

어떤 글에서 아빠가 돌아가시고 엄마를 이사시켜드리려 했으나 엄마가 그러면 죽을 것 같다고 본인이 살아있는 동안은 아빠와의 추억을 되새기며 살다 떠나고 싶다고 한 것을 봤다. 그것이 그분이 상실을 견디는 방법이었던 것이다.

내 동생은 틈만 나면 술에 취해 엄마 방에 들어가 엄마 의자에 앉아 우는 것 같았다. 그 꼴을 보고 있을 수가 없어 이사를 시켰다. 동생은 그곳에서 벗어나야만 한다. 그래야 엄마 잃은 아들이 아니라 그저 본인으로서 다시 살아갈 수 있다.




아이들 하원 시간이 임박해 엄마 앞치마를 가방에 넣고 달려왔다. 아이들을 평소보다 조금 늦게 하원시켜 집에 들어왔다. 아직 엉덩이 한 번 의자에 못 붙였는데 먹성 좋은 아이들은 배가 고프다고 성화다.


"엄마. 배고파요."

"배고파? 엄마가 은유 좋아하는 된장국 끓이고 생선 구워줄게. 잠깐만~ 엄마 커피 한 잔만 먹고~~"


이럴 수가. K아줌마 콧노래가 나와버렸다. 어느덧 완벽한 아줌마가 되었다. 엄마와 똑 닮은 말투에 웃음이 났다. 인스턴트 맥심커피가 아닌 더치커피에 우유를 섞어 마시는 것만이 내가 마지막까지 붙잡고 있는 젊은이라는 증거랄까, 자존심이랄까. (글쎄, 이런 걸 혼자 의식한다는 자체가 완전히 아줌마 같은데.)


앞치마를 둘러매고 싱크대 앞에 섰다. 어쩌면 나의 이 뒷모습이 훗날 아이들에게 오랜 그리움이 되리라 생각하니 주책맞게 벌써부터 마음이 아리다. 아이들은 내가 해준 음식 중에 어떤 음식이 가장 생각이 날까? 아무리 따라 해봐도 흉내조차 못 낼 맛이 뭐가 있을까? 우리 아이들도 조금만 크면 엄마는 왜 맨날 앞치마를 입고 다니나 놀리려나? 너희도 부모가 돼봐라. 짜식들아. 엄마도 몰랐지. 엄마도 엄마의 엄마를 너무 몰랐지.


최소한 은유가 임신할 때까진 건강히 살고 싶다. 내가 은유를 임신했을 때 엄마의 비빔국수가 못 견디게 먹고 싶어서 자주 오이를 사들고 엄마집에 갔다. 다른 식당 비빔국수로는 충족이 전혀 안 됐다.

나중에 은유가 먹고 싶은 엄마 음식이 있지만 해 줄 엄마가 없어서 기억을 되새기며 혼자 해보려고 애쓰지 않게. 싱크대에서 서러눈물 흘리며 칼질하지 않게.

내가 해주어야지. 울 엄마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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