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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호 Apr 05. 2024

어떤 화해의 모양 1

현재진행 중인 아빠와의 관계 회복

"발을 밟아서 미안해."

"괜찮아. 다음부터는 조심해 줘."


내가 아이에게 가르친 사과하는 법과 용서하는 법이다. 잘못을 저질렀다면 왜 미안한지 그 이유와 함께 미안하다는 말을 꼭 할 것. 고의로 그런 게 아니라면 괜찮다고 말하고 다음에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주의 줄 것. 만약 누군가와 싸웠다면 이렇게 화해하는 것이 정석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어떤 싸움은 아주 길고 또 복잡하고 화해의 모양도 미묘하다.

  



이곳에 스무 편의 글을 써왔다. 이번 글이 스물 한 편째가 될 것이다. 적지 않은 글들을 보며 누군가는 "이 집은 아빠가 없나? 아빠는 왜 이렇게 존재감이 없어?" 할 수 있다. 맞다. 실제로 우리 가족 사이에서 아빠는 존재감이 없다. 한때는 강력하다 못해 압도적인 존재감을 지녔던 적도 있지만 다 옛날이야기다. 엄마 없는 아빠는 아무 힘이 없다. 우리 모두 그걸 알고 있었는데 아빠 혼자 몰랐다. 그러니 엄마에게도 우리에게도 잘하지 않았던 거겠지.

그래서 지금 우리에게 말 한마디 쉽게 못 던지는 서글픈 노년을 면치 못한 사람. 나의 아빠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대단한 이야기는 아니다. 사업 실패, 경제적 어려움, 잦은 이사, 그에 따른 잦은 전학, 사춘기, 반복되는 부부 싸움, 친친척들의 말썽, 자녀에 대한 무관심, 자기 연민, 폭음, 술주정.

그 모든 지루하고 뻔한 일들이 몇십 년에 걸쳐 우리에게도 일어났을 뿐이다.


아빠라는 단어가 정말 불편했다. 아빠의 '빠'. 아기들의 옹알이 같기도 한 그 된소리는 소리 내어 말할 때마다 지나치게 친밀하게 들린다. 그 단어로 나의 아빠를 부르는 것이 불합리하게 느껴졌다. 아빠를 대체할 단어가 아버지 밖에 없음이 답답했다. 아버지라는 단어는 어느 정도 존경을 담고 있는 것처럼 들리므로.


어렸을 땐 아빠가 무서워 살갑게 굴었다. 나는 어렸고 힘이 없었고 아빠는 나이가 많았고 우리 집을 먹여 살리고 있었고 목소리가 컸고 술을 마시면 무서울 게 없는 어른이었으니까. 하지만 성인이 되니 더 이상 아빠가 겁나지 않았다. 다만 불편하고 싫었을 뿐. 그래도 나는 착실히 그런 감정을 잘 숨겼다.

나는 우리 가정이 일반적인 모양으로 보이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아빠가 나의 인생에 유일한 하자로 남는 것이 싫었다. 다른 말로 하자면 나는 아빠를 내 인생 유일한 오점으로 여기고 있었다.


자상한 엄마, 능력 있는 언니, 순한 남동생.

나는 그들을 언제나 사랑했다.

못나지 않은 얼굴에 모나지 않은 성격.  책을 세상에서 제일 좋아는 성향. 타고 태어난 나와 내가 만들어 낸 의 총합도 꽤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이 세팅값을 바꾸지 않고 살아가려 애를 쓴 것도 같다.


내가 설정해 놓은 이 이미지에 어떤 잡음도 끼어드는 것이 싫었다. 그래서 아빠의 존재 자체를 별로 의식하지 않고 지냈다. 다행히 아빠도 우리에게 썩 관심이 없었기에 크게 부딪히지 않고 살 수 있었다.




아빠의 잘못된 행동들은 대체로 엄마만을 향해 있었고 엄마는 절대 그 화풀이를 우리에게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럴 때마다 화를 꾹꾹 눌러 담아 사랑으로 바꾸어 쏟아주었으므로 내가 부모에게 '직접적으로' 받은 상처는 없다. 아빠는 우리를 단 한 대라도 때리긴커녕 야단조차  적이 없었다. 우린 그저 집이라는 공간 함께 존재해 왔을 뿐이다.


아빠는 우리에게 큰 관심은 없었으나 우리가 어떤 일에서 가시적으로 보이는 성과를 내면 누구보다 기뻐했다. 본인이 '내가 인생을 잘못 살지 않았다. 나는 부모라는 할을 잘 해내어 성과를 이뤘다.'라고 믿을 수 있는 도구와 수단이 주었기 때문이다

주변 사람들에게도 상당히 자랑을 했는데 그 자랑의 방식 몹시도 배배 꼬인 형태라 언뜻 들으면 비난처럼 들릴 지경이었다.


"얘는 ㅇㅇ대 밖에 가지 못했다. 그 주변에서 최고는 ㅁㅁ대 아니겠냐. 그깟 ㅇㅇ대를 누가 알아주냐. 얘는 머리는 좋은데 쓸데없이 얼굴을 치장하느라 바빠 공부에 신경 덜 써서 그런 거다."

아빠는 술에 취하면 이 요상한 말로 우리를 자식자랑 대회에 전시켰다. 그러면 앞에 있는 상대는

" 세상에 그게 무슨 소리냐 ㅇㅇ대도 좋은 대학교다. 이렇게 예쁜 딸을 두고 말을 그렇게 하냐. 자식 잘 키운 거다." 등의 정답을 말해줘야 끝나는 아주아주 피곤한 자랑법인 것이다.


상처 받지 않았다.

왜 저럴까, 왜 저렇게 교양 없는 말을 할까. 생각했을 뿐이다.

굳이 았다면 나의 교양이 상처를 받았 것이다.

우리 가족 전체 수준이 저하되는 느낌짢았다.


아빠가 그저 가족사진 안에 얌전히 박혀있어 주길 바랐다. 그렇다면 이런 말들 쯤이야 지하철에서 낮술 먹고 행패를 부리는 사람에게 우연히 들어버린 망언 정도로 치부하고 지하철에서 내리자마자 없던 일로 여겨줄 수도 있으니까.


다정을 하지도 않았다. sns에서 다정한 아빠에 관한 글을 보면 나도 눈시울붉혔다가 가슴이 훈훈해졌다가 한다. 

그러나 그게 나의 아빠 얼굴에 나의 아빠 목소리로 나에게 다정 상상을 하면 소름이 돋을 정도로 부담스러웠다.

이게 좋았다. 지금처럼 서로 무관심하고 싶었다. 별일 없는 안부를 엄마를 통해 전해 듣고는 다행이다 생각하는 이 정도의 선이 적당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을 위해 스터디를 하고 있던 어느 날. 엄마는 내가 아빠와 같이 일해주기를 바란다고 했다. 아빠는 우리가 중학교 때부터 사업을 하기 시작했는데 평범과 적자를 항상 아슬하게 오갔다. 아빠랑 같이 일한다는 것도, 그런 미래 없는 일에 발을 담그는 것도 싫었지만 결국은 수락했다.


첫째로 나는 엄마의 부탁을 저버릴 수 없는 착한 딸이었고 이제와 생각해 보니 둘째는 취업하기 귀찮기도 하지 않았을까? 여태껏 엄마를 위해 희생한 숭고한 딸의 연기를 했지만 이제 엄마도 없고 솔직해져 보기로 한다.


아빠와 같이 일하기 시작하니 집안 경제상태를 적나라하게 알게 되었다. 아빠가 사업적으로 일을 처리하는 방식이 무능하다고 느껴지거나 어려운 일이 닥쳤을 때 부딪히기보다 혼자만의 동굴로 숨어들거나 엄마에게 떠맡겨버리는 모습에 속이 터지는 일이 잦아졌다.


부부가 해결해야 할 일들에 자주 끼게 되었다. 예를 들면 아빠가 회사가 어렵다며 생활비는 주어놓고는 방탕하게 돈을 써버리는 작태를 카드내역관리를 하는 내가 자연스레 알게 되는 일. 그리하여 엄마 대신 나서서 아빠에게 대리발광을 떠는 일 같은 것들 말이다.


점점 엄마와 나는 한 몸처럼 되다. 우리가 어렸을 때 엄마는 아빠와 다투었어도 밤낮없이 아빠의 밥상을 차려주었고 우리에게도 아빠 잘 대해드리라고 했다. 친구들에게 속을 터놓을지언정 우리에겐 아빠 흉을 보지 않았다. 그러나 내가 성인이 되고 아빠와 같이 일하게 되자 엄마는 믿을만한 뒷담화 상대가 생겼다고 느꼈는지 아내로서 고단했던 삶에 대해 종종 말했다. 과거에 아빠가 속 썩였던 일들까지 듣다 보니 내가 그 부당한 일을 겪은 것처럼 열이 받고 치가 떨렸다.


어쩌면 엄마와 아빠는 보통의 부부처럼 싸우다 화해하기도 하고 경제적 어려움을 겪다 함께 이겨내기도 하는 평범한 관계였을지도 모르겠다.


오로지 나만 점점 더 엄마에게 이입해서 아빠를 못 견디게 싫어하게 되었고 집안에 생기는 문제들에 회사에 발생하는 일들까지 내 일처럼 떠맡 지쳐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엄마가 암에 걸렸고 내 분노는 자연스레 아빠를 향했다. 채식 위주의 건강한 식단에 매일 하던 유산소 운동, 술이라곤 막걸리 조금 먹을 줄 아는 게 다인 우리 엄마가 듣도 보도 못한 혈액암에 걸리는 이유는 스트레스 때문이고 그 스트레스의 원인은 아빠라는 합리적이지도, 그렇다고 영 말이 안 되지도 않는 결론 도출해 버린 것이다.


엄마가 드라마에 나올법한 심각한 병에 걸렸으니 아빠가 드라마틱하게 변화하리라 기대했지만 크게 변한 것 없는 모습들에 실망이 쌓여갔다. 아빠와 원래도 잘 하지 않던 대화가 더욱 단절되고 말도 섞기 싫어 필요한 말들은 카카오톡으로 주고받았다.

엄마의 병이 악화되는 것에 정비례하여 아빠와 자식들의 관계도 끝없이 멀어져만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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