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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호 Apr 09. 2024

어떤 화해의 모양 2

현재진행 중인 아빠와의 관계 회복

엄마가 죽는 날까지도 아빠를 이해할 수 없었다. 장례식에서까지 보였던 그 자기 연민의 태도.

'한평생 고생만 하다 떠난 불쌍한 내 아내'가 아니라 '아내를 잃은 불쌍한 나'에 빠져있는 그 모습을 애써 모른 척했다. 더 이상 할 실망도 없었다. 아빠의 형제들만 '불쌍한 우리 형, 불쌍한 우리 오빠' 하며 아빠를 달래고 있었다. 잔치라도 났는지 분홍색 꽃무늬 옷을 입고 와서 과장된 행동과 목소리로 아내 잃은 오빠를 위로하는 고모를 장례식장 밖으로 내다 던지고 싶었다. 아빠도 아빠의 형제도 다 짜증 나서 미칠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우리 엄마 장례식을 망칠 순 없지.

"너네가 참아. 그냥 무시해. 큰소리 날 일 만들지 마."

엄마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엄마를 봐서 참을게. 어차피 오늘이 마지막이야. 내일이면 연을 끊어버릴 거니까.




엄마 장례식 후 아빠는 사랑하는 아내를 잃고 폐인이 된 남편 연기를 하기로 마음먹었는지 일도 나가지 않고 집에 틀어박혀 술을 마셨다. 아빠는 소주를 대여섯 병을 마시고 만취를 해도 잠이 들지 않는 기인인데 술주정은 '말하기'다. 끊임없이 말을 한다. 현재의 괴로움을, 과거의 고생을, 자식들이 자기를 무시했던 일을, 엄마의 형제들에 느끼는 섭섭함을, 엄마가 자기한테 뭘 잘못했는지를, 자기가 이뤄낸 것들을, 이뤄내지 못한 것들을,

세상 온갖 말들을 한다. 오직 유일하게 말하지 않는 것은 자신의 과오뿐이다.


엄마는 생전 그 말들을 들어왔다. 꿋꿋이 들어내고야 말았다. 그저 견뎠다. 참고 견디는 것은 엄마의 재능이니까. 말을 끊지도 전화를 끊지도 않고 그저 들었다.

듣는 것쯤이야 돈 드는 일도 아니니까, 라는듯 무표정으로.

아빠의 못된 말들이 엄마의 몸 안에 남아 뭉쳐 암덩어리가 된 게 아닐까, 찝찝한 상상이 자주 들었다.


아빠 사업은 엄마 명의로 된 것이어서 엄마가 죽고 난 후 명의 이전을 할까 폐업을 할까 고민하다가 폐업을 하고 아빠 명의로 새로 사업자를 내면서 나도 드디어 10년 만에 아빠 사업에서 벗어났다. 애초에 엄마 명의가 아니었으면 하지 않았을 일이었다. 고정적인 월급이 아쉽지 않았던 것은 아니지만 아빠와 일적으로 부딪히지 않아야 우리가 가족으로나마 존재할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일을 같이 하지 않으니 일하면서 생겼던 서로에 대한 실망과 짜증이 없어졌다. 소리 높여 싸울 일이 없어서 좋았다. 나는 소리를 높이는 것도 싸우는 것도 정말 싫어한다. 나는 나를 다정하고 공감능력이 높은 사람이라고 자평하고 있는데 아빠랑만 엮이면 매정하고 사나운 사람이 되는 것 같아 그런 내 모습을 보기가 힘들었다. 본래의 나를 되찾은 것 같 내 마음의 평화가 찾아왔다.




우리 삼 남매는 아빠에게 최소한의 도리는 무조건 할 생각이었다. 명절과 생일을 챙기고 전화도 일주일에 한 번은 꼭 하려고 마음을 먹었다.

엄마가 살아계실 때는 나 대신 남편이 그 역할을 자처해 왔다. 아빠에게 아이들 사진을 보내고 영상통화로 아이들을 보여주었다. 엄마가 돌아가시고 나서 종종 우리 집으로 초대해서 아이들과 시간을 보낼 수 있게도 해주었다.


"일부러 그럴 필요 없어. 나도 안 하는 걸 뭐 하러 여보가 해."

"여보와 장인어른의 관계가 좋지 않은 건 알지만 나와 장인어른 사이에서 나쁜 일은 없었어. 이건 나와 장인어른 둘의 관계니까 네가 안 한다고 나까지 못하게 하진 않았으면 좋겠어. 난 가족 중에 소외된 사람이 있는 게 이상하고 불편해. 어른을 챙기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해. 이건 내 가치관이야."

표면적으로는 마지못해 허락하는 척했지만 내심 남편의 그런 행동 때문에 아빠에게 잘 못하는 딸로서의 죄책감을 덜었음을 고백한다.


아빠는 내 아이들, 특히 첫딸에게 각별한 애정을 갖고 있었다. 나와 친하지 않아서 마음대로 영상통화를 걸지 못하는 걸 알면서도 손주가 보고 싶어서 절절매는 그 마음을 모른 척했다. 가끔 밀린 숙제를 하듯 사진과 영상을 몰아서 보내주고는 이 정도면 할 만큼 한 거라며 스스로를 달랬다


남편은 엄마가 돌아가신 후 더 적극적으로 가족이 다 같이 여행을 가거나 우리 집에 모이도록 추진했다. 본인의 환갑잔치에도 나타나지 않았을 정도로 제멋대로인 사람이었지만(놀랍게도 실화임. 아빠 없이 가족, 친척이 모여 식사를 했다.) 손주가 태어나고는 아기들 볼 기회를 놓칠까 봐 가족모임을 한 번도 잊지 않고 달려왔다. 자식은 셋이나 있지만 육아에 참여해 본 적은 없어서 놀아주는 법을 몰라 그저 쳐다보고만 있었지만 말이다. 보고만 있어도 행복한 것 같았다. 안아보라고 주면 수박이라도 드는 것처럼 어색하게 떠안고 있다 금방 돌려주었다.


"어휴. 애를 키워본 적이 없어서 어떻게 안아야 되는지도 모르겠네."

"애 키워보니까 남편이 같이 해도 얼마나 힘든 줄 알아? 이걸 평생 혼자 해낸 엄마한테 고맙다고 해."

"우리 때는 다 그랬어. 애 안는 아빠는 팔불출이라고 놀렸어. 그래도 내가 박여사한테 고맙게는 생각하지.."


예전에는 내가 못한 게 뭐 있냐며 큰소리 뻥뻥 치더니 틈만 나면 엄마한테 사과하라는 자식들의 말에도 풀이 죽는다. 엄마가 없으니 이빨 빠진 호랑이가 다 됐다.


어느 날부터는 우리 집에 올 때 수산시장에 들러 첫째가 좋아하는 고등어갈치를 잔뜩 사 오곤 한다. 사온 보람이 있으라고 구워서 눈앞에서 먹게 하거나 먹는 사진을 찍어서 보내주면 천진하게 좋아했다. 새끼 입에 들어가는 것만 봐도 뿌듯한 부모의 마음을 이제야 느끼고 있는 것 같다.


그런가 하면 하루는 큰 스티로폼 상자를 들고 왔길래 열어보니 애들 먹을 생선과 본인이 홈쇼핑에서 시킨 돈가스, 젓갈 같은 걸 담아서 얼음팩을 넣고 테이프로 꽁꽁 싸서 가지고 오기도 했다.

"참나. 이젠 엄마 흉내를 다 내네."

웃기기도 하고 황당하기도 해서 던진 말에 민망했는지 그냥 많이 있어서 가져왔다며 딴청을 피웠지만 얼굴에 내심 피어난 뿌듯함을 감출 수는 없었다.


70년 가까이 살아온 성격이 하루아침에 변하진 않으니 그렇게 부모다운 행동을 한 날에도 어김없이 술 취하고 말실수를 하긴 한다. 예전에 잘못했던 걸 얘기하면 기억나지 않는다고 역정을 내기도 한다.

그런데 이상하게 전처럼 꼴 보기 싫지는 않다. 술에 취해 대자로 뻗어 코를 고는 아빠를 보며 처음으로 이런 생각을 했다.


'아빠는 어쩌다 저런 사람이 되었을까.'




타인을 공감하는 능력은 그 사람을 상상해 보는 것에서 시작한다. 내가 화를 잘 내지 않는 이유가 그것이다. 예를 들어 지하철에서 누가 내 발을 밟고는 사과하지 않고 지나가도 잠시 기분이 언짢았다가 '혹시 가족이 다친 건 아닐까? 너무 급하고 정신이 없어서 내 발을 밟은 것도, 사과를 해야 하는 것도 의식하지 못하고 있는 건 아닐까?' 상상하면 '그럴 수도 있지.' 하고 넘기는 것이다.

그런 식으로 세상 모든 사람들을 궁금해하고 이해하려 했다.

단 한 사람, 아빠만 제외하고.


단 한 번도 아빠의 과거가 궁금하지 않았다. 그래봤자 자기의 잘못들을 합리화하는데만 사용하겠지. 또 본인한테 어떤 일이 있었다고 해도 다른 가족들을 괴롭게 하는 것을 정당화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 내가 처음으로 아빠를 궁금해하기 시작한 것이다.


'엄마가 죽어서 제일 괴로운 건 아마 우리가 아니라 아빠일 것이다.'라는 생각도 들었다. 죄책감과 후회가 더해졌으니 괴로움은 배가 되겠지. 아빠는 자기 연민에 빠져있다가 자기는 엄마한테 잘했다고 멋대로 합리화를 하다가 요즘은 왕복 다섯 시간은 걸리는 엄마가 있는 절에 일주일에 한 번씩 찾아가 속죄한다.

자기 마음 편하자고 하는 속죄겠거니 싶다가도 그런 행동이라도 하는 게 어딘가 싶어 기특하기도 하다.

마음껏 하고 싶은 대로 하고 마음이 편해지면 좋겠다.


아빠는 고등학생일 때 할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시고 집안의 가장역할을 했다. 엄마랑 연애할 때는 월급날이 되면 할머니가 한복을 곱게 입고 회사 앞에 서계시다가 담뱃값만 빼고 월급을 모두 가져가셨다고 한다. 하고 다니는 꼴이 상그지가 따로 없었다고 엄마는 회상했다.


"그래도 얼굴은 잘생겼었지. 그거 말고는 볼 게 하나도 없었어."

"그럼 엄마 팔자 엄마가 꼰 거네. 남자 집안도 안 보고 모아둔 돈도 안 보고 술주정도 안 보고 얼굴만 본 거니까 엄마 잘못 아냐?"

"그래. 너네는 꼭 자상하고 능력 있는 남자랑 결혼해. 엄마처럼 아무 하고나 하지 말고."

하지만 인간이란 얼마나 한결같은지 엄마는 죽기 전까지 나훈아, 송대관은 할아버지 같아서 싫다고 하고 박보검, 이제훈, 김수현을 좋아했다.


엄마와 아빠 사이에 미움만 있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자식 낳고 사는 부부의 감정은 그렇게 단순할 수가 없다. 기대했다가 실망하고, 미웠다가도 고맙고, 열이 뻗쳤다가도 불쌍하고, 다른 사람이 흉보면 편을 들어주고 싶고 그랬을 것이다.

아빠가 더 성실하거나 더 다정하거나, 아니 그저 평범하기만 했어도 사랑 많은 엄마는 훨씬 더 아빠를 사랑해 주었을 텐데. 어쩔 수 없다. 아빠도 사랑받아 본 적이 없으니 줄 수 없었을 것이다. 젊은 나이에 가장 노릇을 하며 치열하게만 살았으니 악만 남았을 테지.


"예전에 말이야. 아빠 인형이랑 이불 장사했을 때. 나 다섯 살 땐가? 그때 하루는 무슨 일인지 엄마가 없어서 아빠 일하는 데 가서 둘이 짜장면 먹었었잖아. 그리고 나 3학년 때. 아빠 마을버스 기사였잖아. 친구들하고 버스 탔는데 아빠가 운전해서 진짜 신기했는데. 그때 버스비가 백 원이었나?"


하루는 우리 집에 모여 술을 마시다 내가 아무 생각 없이 던진 말에 아빠가 술이 확 깬 듯 놀라며 말했다.


"너 그거 기억나? 이야. 너 정말 그때가 다 기억이 난단 말이야?"


아빠는 본인이 고생하며 살아온 걸 내가 기억해 준다는 것만으로 자식에게 인정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엄청나게 기뻐하는 모습을 보니 측은하기도 했다.

인정받고 싶었구나. 멋진 가장이고 싶었구나. 잘 되지 않아서 그간 마음 고생했겠다.

이제야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아빠와 관계가 최악일 때 제일 듣기 싫었던 말은 "그래도 아빠인데. 너 나중에 아빠 돌아가시면 후회해."였다.

'아 어쩌라고. 네가 뭘 알아.' 속마음을 감추고 웃음을 띠며 "그러게. 나중에 후회한대도 지금 당장 갑자기 친해질 수가 없네." 답해주었다.

우리 관계는 아마 죽을 때까지 회복될 수 없을 거라 생각했다.


엄마 때문에 최악으로 치닿던 관계는 아이러니하게도 엄마가 떠나고 나니 약간은 회복되었다. 내가 아빠를 그리도 싫어했던 이유는 사랑하는 나의 엄마를 힘들게 했기 때문이기에 엄마가 죽고 갑자기 아빠를 싫어할 이유가 사라져 버려서 약간 벙쪘다. 오랜 세월에 걸쳐 쌓인 나의 분노와 실망이 오래 갈거라 생각했지만 나도 단순한 인간인지 그런 감정은 시간이 흐를수록 옅어져만 갔다.


내가 계속 아빠와 나쁜 사이를 유지하는 게 엄마를 위한 복수일까? 절대 그렇지 않다. 우리 엄마가 눈 감기 전 제일 걱정했던 것은 이것일 거다.

"애들이 아빠 안 챙길 것 같은데 저 인간 어쩌지."


우리는 중환자실 임종면회에서, 엄마 사망선고를 내리고 난 직후에, 장례식에서 입관을 하던 때에 모두 이렇게 말해주었다.

"엄마. 아빠 걱정하지 마. 우리가 챙길 거야."


약속을 지키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저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대로 내버려 두었더니 어떤 불순한 찌꺼기 같은 감정들은 스스로 사라졌고 어떤 것들은 아직 남아있으나 고요하게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아빠는 지금도 종종 만취해서 전화를 걸어 술주정을 한다. 위에서 말했듯이 아빠는 취하면 말을 해야 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린 엄마가 아니다.

"술 마신 사람하고는 대화 안 해. 술 좀 적당히 먹어. 술 깨면 영상통화 걸어. 애들 보여줄게. 끊는다~"


그다음부터 울리는 전화는 받지 않는다. 그리고 며칠 뒤에 전화해서 또 평범한 대화를 이어나가면 된다.

아빠에 대한 애절한 효심 같은 것이 갑자기 생기지는 않는다. 겨우 이제야 불편한 감정을 걷어내기 시작했으니까. 아빠도 하루아침에 완벽한 인간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앞으로도 계속 술을 마시고 취하면 말을 멈추지 못하고 때로는 우리 속을 긁어놓기도 할 것이다.

앞으로도 그저 적당히 맞추어주고 적당히 무시하며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살 예정이다.


나는 아빠에게 바라는 게 딱 한 가지밖에 없다. 건강만 했으면 좋겠다. 나 힘들게 병수발 안 시켰으면 좋겠다. 아빠도 나에게 아무것도 바라지 않았으면 좋겠다. 기대도 실망도 하지 않도록 나에게 아무것도 바라지 않았으면.

나는 아빠에게 순수한 내 의지로 잘해주고 싶다. 책임감은 지금 두 아이를 키우면서 느끼는 것으로 충분하다. 책임감 때문에 억지로 뭔가를 하고 싶진 않다.

우리 가족이 서로 각자의 삶을 잘 살아가면서 마음속으로 늘 응원하고 만나면 언제나 행복한 그런 사이로 영원히 남을 수 있기를 바란다.




내가 아빠와 최악의 상황을 지나 이렇게 평범한 관계가 된 것은 애초에 이렇게 풀릴 정도의 문제였기 때문이다. 가족에게 더 큰 상처를 받은 사람들은 이렇게 대충 풀릴 일이 아닐 것이다. 공개적인 플랫폼에 글을 쓰는 만큼 누군가는 "정말 화해하기 싫은데 나도 가족과 화해해야 하나? 말도 섞기 싫은데 죄책감을 가져야 하나?" 하는 생각을 가질까 봐 지레 걱정이 되어 사족을 붙인다.


시간이 흘러도 용서가 되지 않는다면 애초에 용서를 하지 못할 정도의 문제인 것이다. 내 마음에 여유가 생기고 안정이 깃들고 상대방에게 개선의 의지가 보이고 이 나쁜 관계가 이젠 지겹기도 하고 이런 것들이 순차적으로 일어나며 자연스럽게 내 마음이 동할 때. 아니면 또 어떤 극적인 계기가 생길 때 관계 회복이 되기도 한다. 나이를 먹으며 같이 늙어가면서 이해하게 될 수도 있다. 그게 언제고 어떤 형태일지는 아무도 모른다. 다른 사람들이 어쩌니 저쩌니 해도 내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으면 억지로 화해를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자세한 사정을 모르고 하는 사람들의 조언에 일일이 상처받지 않았으면 좋겠다.

결국 화해가 안 되어도 어쩔 수 없다. 어떤 관계는 아무리 가족이어도 그저 서로의 삶에 들어가지 않는 것만이 최선의 방법일수도 있는 거니까.


이 글의 제목처럼 화해의 모양은 모두 제각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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