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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익명의 고슴도치 Mar 14. 2020

서운함을 말하는 사이

어떤 말들은



마음의 모양은 사람마다 다르다. 나의 고유한 그것을 표현하지 않으면 타인에게 가 닿기 어렵다. 심지어 애써서 표현을 하여도 다른 이에게 내 마음의 모양이 고스란히 전해지는 건 요원한 일이다. 함께한 시간이 얼마 되지 않거나 서로 아주 다른 모양의 마음으로 살아왔을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이때 서운함은 서로 마음의 모양을 확인하기 좋은 도구다. 마음의 크기나 깊이보다는 모양이라는 단어가 알맞은 느낌이다.


좋아하는 이가 나에게 서운함을 표현했을 때 고마움을 느낀다. 그가 가진 마음의 모양을 내게 알리려는 시도라는 걸 이젠 알기 때문이다. 나와 함께하는 시간을 귀하게 여겨서 하는 말임을 알아서이기도 하다. 서운함 속에 담긴, 서툴지만 따뜻한 의미를 몰랐을 땐 부담스럽기만 했던 감정이 어느 순간부터인지 내 속에 부드럽게 녹아있다.


‘사실 그때 너에게 서운했어.’



이 한마디는 서로의 마음을 직면할 수 있는 용기다. 서로의 진짜 마음을 직면할 용기가 부족하거나 중요하지 않은 때이거나 아직 마음을 들여다 여유가 없다면 그냥 삼켜지고 외면당하기 쉬운 감정이다.

혹은 그 표현이 단지 나의 서운함을 채우려는 욕심일까 봐, 그 욕심 때문에 소중한 사람의 마음이 다칠까 봐 혼자 다스려보다가 시간이 지나서야 깊어진 서운함을 눈치챌 수도 있다. 그러고도 몇 번을 더 고민하다 꺼내놓은 말일 수도 있다. 그렇기에 왜 이제야 말하느냐고 다그치지 않고 지금이라도 말해줘서 고맙다며 안아주기로 한다.
나의 서운함이 타인에겐 욕심으로 비칠 수도 있다. 서운함과 욕심 사이의 간극을 확인하는 과정 또한 중요하다. 이를 표현하고 나면 좀 더 또렷하게 알게 된다. 타인을 통해 발견한 서운함은 결국 스스로 비어있다고 느끼는 마음의 공간이고, 그곳을 찬찬히 둘러보면 충분한 마음의 문을 열어줄 열쇠를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누군가 내게 서운함을 표현한다 해서 내가 나쁜 사람이 되는 게 아니다. 서운한 감정을 앞에 두고 누구의 탓인지 재고 따지는 건 서로를 지치게 할 뿐이다. 충분해지는 마음의 모양이 서로 달랐을 뿐이고 그것을 확인하고 존중하고 이해하는 과정이다.

그러니 서운하게 할 의도가 아니었다고 애써 해명하지 않아도 괜찮다. 예전에 서운했던 일들까지 끌어들여 누구의 잘못이 더 크다는 걸, 누구의 탓이란 걸 입증하지 않아도 된다. 그렇지 않아도 외로운 서운함을 아무도 없는 재판소에 던져두는 건 슬픈 일이다.
서운한 마음을 이해받아 본 적이 없을수록, 타인과의 갈등을 평화롭게 극복해본 적이 없을수록 타인의 서운함은 무서움으로 다가온다. 질책, 관계의 끝, 단절을 고하는 것으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사실 정말 무서운 건 침묵으로의 회피다.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조용히 서로의 마음에 없던 것처럼 잘려 나가는 순간이다.
용기 내어 나에게 서운함을 말하는 사람. 내가 느낀 서운함을 말할 수 있는 사람. 서운함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 안전한 마음의 사람들. 서운함을 말하는 사이에 고마움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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