넓은 의미에서는 활판 인쇄술, 글자꼴 디자인 등 모든 조형적 활동을 의미
영화, 드라마 등 문화콘텐츠 분야에서 복고풍 소재는 대중의 향수를 자극하며 독보적인 트렌드로 자리하게 되었다. 그중 드라마 ‘응답하라 1988’, 영화 ‘써니’는 그 시절을 완벽하게 재현하며 전 연령층을 사로잡아 흥행에 성공했다. 이 작품들은 포스터 타이틀부터 그 당시 유행하던 잡지나 포스터에서 볼 수 있던 서체를 사용해 시대적 감성이나 분위기를 섬세하게 나타내 스토리텔링을 강화했다. 이처럼 글자를 활용해 시각적인 아름다움이나 디자인의 기능적 완성도를 확보하는 그래픽 디자인 작업, 또는 결과물을 ‘타이포그래피(Typography)’라고 한다. 넓은 의미에서는 글자의 가독성을 높이는 활판 인쇄술, 글자꼴 디자인 등등 글자를 다루는 모든 조형적 활동을 말한다.
타이포그래피는 15세기 초반 인쇄술과 함께 등장하였다. 구텐베르크가 금속활자를 발명했던 르네상스 시대에는 값비싼 양피지를 사용했기에 인쇄비용이 무척 많이 들었다. 가능한 많은 글자를 양피지 한 장에 써넣을 방안에 대해 고민하던 그는, 글자를 세로로 길게 늘였다. 이렇게 탄생한 서체가 바로 ‘블랙레터체’이다. 두꺼우면서도 길쭉한 형태의 블랙레터체는 특유의 무게감으로 성경과 철학 책자 인쇄에 주로 사용되었다. 인쇄술이 배포된 이후 이탈리아에서 ‘로만체’가 탄생하였다. 풍부한 여백과 아름다운 비율로 고대 로마문화에 대한 찬양과 이탈리아만의 여유로움을 담아냈는데, 이는 서체의 기능만이 아닌 제작자의 철학과 심미성이 녹아든 최초의 타이포그래피 디자인이었다.
지금은 인쇄 기술의 혁신적인 발전과 함께 수천 가지 모양의 서체가 사용되고 있다. 수많은 폰트는 활자의 모양새나 기능에 따라 다양한 기준으로 분류되는데,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기준은 바로 ‘세리프(serif)’이다. 이 차이는 한글 프로그램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명조체와 고딕체를 통해 쉽게 구분할 수 있다. 명조체는 끝에 부리와 같은 꺾임이 있어, 획의 굵기가 다르고 변화감이 있다. 반면 고딕체는 끝이 직선으로 마무리돼 단단하고 깔끔한 느낌을 준다. 타이포그래피에서는 이 차이를 세리프(serif)와 산세리프(sanserif)라고 표현한다. 세리프(serif)체는 명조체와 같이 글자 획의 끝부분에 돌출선이 있는 반면, sans(불어로 ‘없다’는 뜻의 접두어)라는 말이 붙은 산세리프(sanserif)체는 돌출된 부분 없이 끊긴다. 각각의 특성이 뚜렷한 만큼 세리프체와 산세리프체에 따라 디자인 결과물의 분위기도 무척 좌우된다.
이처럼 필수적인 디자인 요소인 만큼, 서체에 대한 디자이너들의 고민은 무척 깊다. 그렇다면 디자이너들에게 가장 사랑 받는 서체는 무엇일까? 아마도 전 세계 디자이너 대다수가 ‘헬베티카(Helvetica)’라고 답할 것이다. 1957년 스위스에서 탄생한 이 서체는 디자이너들 사이에 ‘쓸 만한 폰트가 없다면 헬베티카로’라는 우스갯소리가 있을 정도이다. 깔끔함의 정석에 가까워 산세리프만의 특유의 현대적 느낌, 안정감, 정확함이 두드러진다는 특징이 있어, 뉴욕, 도쿄 등 대도시의 지하철 사인부터 각종 글로벌 기업의 브랜딩 디자인에서 두루 사용되고 있다. 대표적으로 독일의 자동차 브랜드 BMW, 이탈리아의 패션 브랜드 FENDI, 미국의 문구 브랜드 3M, 미국의 건전지 브랜드 에너자이저 등의 로고타입 모두 헬베티카이다.
이밖에도 국적과 산업, 제품 분야가 모두 다른 제각각의 브랜드에서 헬베티카를 이용한 CI를 사용하고 있다. 그럼에도 이들 브랜드가 추구하는 이미지와 느껴지는 분위기는 모두 다르다. 같은 타이포그래피를 이용하더라도 글자 간격, 색상, 굵기, 기울기 등에 따라 다르게 표현되기 때문이다. 하나의 글자체가 고급스러움을 추구하는 명품 브랜드와 편리하고 친근한 생활용품 브랜드의 넘나듦이 모두 가능하게끔 이끄는 것이 타이포그래피의 디테일이 가진 힘이다.
나이키, 폭스바겐 등 세계적 기업과 함께 작업해온 독일의 타이포그래피 디자이너 에릭 슈피커만(Erik Spiekermann)은 “타이포그래피는 우리 주변의 어디에나 존재하고 기본적이라서 마치 공기와도 같다.”라고 이야기한다. 일상 속 지나치는 많은 간판부터 전단지까지, 모두 타이포그래피로서 이야기한다. 글자 너머에서 전해지는 분위기를 들여다보며, 더 재미있게 세상을 바라보는 건 어떨까.
글 NEWLOOKS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