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 드라마 속 유진초이의 페르소나를 찾아서
“굿 뉴스야? 베드 뉴스야? 아, 조선이 굿 뉴스인가? 이 민감한 시기에 미공사관에 자네가 있는 것만으로도 조선은 든든할 테니까. 조선은 자네의 조국이기도 하잖아.”
“그렇지 않을 거야. 조선에서 태어난 건 맞지만 내 조국은 미국이야. 조선은 단 한 번도 날 가져 본 적이 없거든.”
드라마 <미스터션샤인>의 첫 장면. 미군 해병대 유진초이 대위와 카일무어 소령은 조선 파견을 명받습니다. 카일은 유진에게 묻죠. 고향으로 돌아가는 기분이 어떠하냐고? 위태로운 조선에 너의 부임은 행운이 아니냐고? 하지만 유진은 단호하게 선을 긋습니다. 자신의 조국은 조선이 아니라 미국이라고 말이죠.
드라마가 인기를 끌며 주인공 유진초이의 모티브가 된 인물이 누구냐에 관심이 쏠렸었죠. 워낙 독특한 이력을 지녔기에 실제로 그에 꼭 맞는 실존인물을 찾을 수는 없을 겁니다. 하지만 캐릭터 구성에 영감을 주었을만한 몇 사람은 유추해 볼 수 있습니다.
극 초반부 유진의 심리상태는 서재필의 그것과 유사합니다. 서재필이라고요? 우리가 알고 있는 구한말에 독립신문을 발행하고 독립협회를 결성했던 그 서재필 박사냐고요? 네, 맞습니다. 적어도 극 초반부의 유진에 대입해보면 그러합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서재필의 이미지는 독립협회와 독립신문을 만들어 활동했던 계몽지식인의 모습입니다. 하지만 그의 삶을 돌아보면 굉장히 파란만장합니다.
1864년 전남 보성에서 태어난 그는 아버지의 6촌 형제에게 양자로 들어가게 되죠. 양어머니의 오빠인 예조참판 김성근을 통해 김옥균을 알게 되었고 급진 개화파 지식인들과 교류합니다. 1882년 과거에 급제한 그는 김옥균의 추천으로 일본 토야마 소년 사관학교에 유학합니다. 조선으로 돌아와서는 신식 군대 훈련소에서 생도들을 양성하는 임무를 맡았죠. 1884년 급진 개화파가 갑신정변을 일으켰을 때 서재필은 무사(武士)로 활약했습니다. 칼을 찬 서재필의 모습이 상상되시나요?
그러나 갑신정변은 3일천하로 끝나고 맙니다. 역적이 된 서재필의 집안은 말 그대로 멸문지화(滅門之禍)를 당합니다. 아내와 친부모는 자결하고 2살 된 아들은 굶어죽습니다. 양아버지와 형제, 일가친척 대부분이 처형당하거나 노비로 전락합니다. 서재필 자신은 천신만고 끝에 일본으로 도피했다가 다시 미국으로 망명합니다. 조선에서 보낸 자객들로 인해 미국에서도 그는 신변에 불안을 느끼며 지내야했습니다.
낯선 땅에 던져진 서재필은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교회에서 영어를 배우며 버팁니다. 인종차별은 기본이었겠죠. 하지만 운이 좋게도 미국인 독지가의 후원을 받게 되어 공부를 할 수 있었습니다. 콜롬비아 의과대학을 졸업한 서재필은 의사가 되었고, 조선을 떠나온 지 10년 만에 필립 제이슨(Philip Jaisohn)이라는 이름으로 미국 시민권도 얻습니다.
1894년 갑오개혁 과정에서 갑신정변의 주동자들은 사면됩니다. 내각의 실력자로 등장한 옛 동지들은 서재필에게 귀국을 권합니다. 의사 면허를 따고 결혼까지 앞둔 그는 돌아갈 마음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박영효가 미국까지 찾아와 귀국을 요청하자 결국 1895년 겨울, 죽음을 피해 도망쳤던 조선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그때 서재필의 심경은 어떠했을까요? 드라마 속 유진과 비슷하지 않았을까요? 태어나고 자란 고향이자 청운의 꿈을 펼치고자 했던 곳, 동시에 가족을 몰살시키고 자신을 죽이려고 했던 쳐다보고 싶지도 않은 곳.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증오와 애정이 뒤섞인 복잡한 마음이었을 겁니다.
다시 돌아온 서재필은 과거의 서재필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필립 제이슨이라는 영어이름을 사용하며 철저히 미국인으로 처신했습니다. 혹자는 영어만 사용하는 그를 보고 조선말을 잊어버렸다며 혀를 끌끌 찼지만, 성인이 될 때까지 조선에서 살다가 관료까지 지낸 이가 고작 십년 미국생활에 모국어를 잊을 리 없었겠죠. 조선에 대한 강한 분노의 감정을 표출한 것이라고 봐야겠지요.
<미스터션샤인>에서 유진은 고종을 처음 알현하는 자리에서 일부러 영어로 대화를 하죠. 실제로 서재필도 그랬습니다. 고종을 만났을 때 영어로 말하고 심지어 안경을 낀 상태로(신하가 임금 앞에서 안경을 착용하는 것은 금기) 짝다리까지 짚었다고 합니다.
조선의 왕과 낡은 체제에 대한 적개심과는 별도로 가슴 한 구석에는 조선의 민중들이 깨어나 조국이 근대화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존재했을 겁니다. 그 마음이 없었다면 조선에 다시 돌아올 이유도 없었겠죠.
중추원 고문으로 임명된 그는 1896년 4월,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 신문인 독립신문을 창간합니다. 갑신정변의 실패는 소수 엘리트의 힘만으로는 결코 개혁을 이룰 수 없다는 교훈이었습니다. 그는 신문의 논설과 기사를 직접 챙겨 쓰며 근대 사상과 제도를 소개했습니다. 누구나 읽기 쉬운 한글로 인쇄된 신문은 나오자마자 대단한 인기를 누렸습니다. 사람들은 신문이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돌려보며 자주의식과 인권, 남녀평등 등 근대적 가치를 받아들입니다. 옆구리에 독립신문 정도는 끼고 다녀야 깨어있는 사람으로 인정받았다고 하죠.
이런 활동의 연장선상에서 1896년 7월, 독립협회를 설립합니다. 독립협회는 독립문을 세우고 수백 명이 참여하는 토론회를 개최하며 민권의식을 고취시킵니다. 외세의 이권침탈에 맞서 대규모 만민공동회를 주도하기도 하죠.
독립신문과 마찬가지로 독립협회의 활동도 처음에는 정부의 지원 속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커져가는 민중들의 근대의식은 강력한 군주제를 원했던 고종과 보수파 관료들과 충돌합니다. 독립협회는 탄압당합니다. 결국 한계를 느낀 서재필은 1898년 5월, 모든 활동을 접고 미국으로 돌아갑니다.
3.1운동이 일어나자 서재필도 미국에서 분주히 움직입니다. 1919년 4월, 필라델피아에서 한인들과 미국의 후원자들을 모아 한국의 독립을 촉구하는 대회를 열었습니다. 또한 일본의 왜곡된 선전을 바로잡고 한국문제를 제대로 알리는 것이 중요하다고 판단하여 <한국평론>이라는 영문 잡지를 자비로 발행하지요.
하지만 1920년대 중반에 이르러 서재필의 활약은 누그러듭니다. 미국정부에 한국의 독립을 기대하는 건 어렵다는 낙담과 경제적인 문제까지 더해지며 이후 독립을 위한 활동을 거의 접게 되지요. 조국이 자주적인 근대국가로 나아갈 수 있기를 바랐지만, 독립을 위해 마지막까지 모든 걸 던진 유진처럼 뜨거운 불꽃이 되지는 못했습니다.
사랑하는 여인을 지키고, 위험에 처한 동포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유진의 힘은 그가 미군이라는 이력에서 기인합니다. 이런 배경으로 <미스터션샤인>은 100년 전 멀리 유럽과 미국에서 조국의 독립과 동포의 안위를 위해 불꽃처럼 살았으나, 철저히 우리가 몰랐던 한 명의 독립운동가를 소환시켜 주었습니다.
바로 황기환 지사(志士)입니다. 어린 나이에 미국으로 건너가서 미군에 자원입대하여 전쟁에 참가하고, 이후 독립운동에 투신하는 유진의 스토리는 황기환 지사의 인생 궤적과 상당히 흡사합니다.
황기환은 평안남도 순천 출신으로 출생연도는 1886~1888년 사이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10대 후반인 1904년에 미국으로 건너갑니다. 특정학교에서 정식으로 공부했던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힘들게 고학을 했을 거라 짐작합니다.
1917년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황기환은 미군에 입대합니다. 유럽전선에 투입되어 부상병을 구호하는 임무를 수행했습니다. 이듬해 11월에 전쟁은 끝나지만 그는 미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그대로 유럽에 남습니다. 김규식 선생이 황기환에게 도움을 요청했기 때문이었죠.
종전 후 국제질서를 논의하는 열강들의 강화회의가 파리에서 열리게 되었는데, 이때 상하이에 있던 독립운동가들은 김규식을 대표로 파견하여 한국독립을 호소하려고 했죠. 유창한 영어실력에 미군 복무라는 독특한 경력, 서구식 문화에 익숙한 매너까지 황기환은 꼭 필요한 인재였습니다. 임시정부가 수립되고 파리위원부 서기장이 된 그는 프랑스와 영국, 미국을 오가며 한국의 독립의지를 알리려 열변을 토했습니다.
황기환은 일본에 의해 강제 송환당할 뻔 했던 한인 노동자들을 구하는 성과도 내었다. 일제의 핍박을 피하고 먹고 살기 위해 고향을 등졌던 한인 노동자들은 연해주를 거쳐 러시아 서북단의 무르만스크까지 흘러가게 되죠. 1차 세계대전 후 이곳을 점령했던 영국은 당시 동맹국이었던 일본의 요청을 받아들여 이들을 일제의 압제 속으로 돌려보내려 합니다. 소식을 들은 황기환은 펄쩍 뛰었습니다. 어떻게든 이들의 송환을 막기 위해 영국정부와 수차례 협상을 벌입니다. 모든 인원은 아니었지만 30여명을 프랑스의 작은 도시 쉬프로 구출해오는데 성공합니다.
<미스터션샤인>에서 영국인 기자가 유진의 도움으로 의병을 찾아가 취재하고 사진을 찍던 장면을 기억하시나요? 바로 실존인물 맥켄지 기자의 이야기죠. 황기환은 영국에서 그를 만나 한국의 독립을 계속 호소합니다. 의병활동을 취재하며 이미 한 권의 책을 내었던 맥켄지는 다시 의병투쟁과 3.1운동의 과정을 담은 <자유를 위한 한국인의 투쟁>(Korea’s fight for Freedom)을 1920년에 출간하게 됩니다.
유럽과 미국을 오가며 왕성한 외교홍보활동을 벌이던 황기환은 안타깝게도 1923년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나고 맙니다. 아직 해야 할 일이 많은 젊은 나이였습니다. 그는 결혼을 하지 않았기에 후손이 없었습니다. 1995년에 독립유공자로 서훈되지만, 2008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뉴욕의 공동묘지에 있던 그의 묘가 발견됩니다. 2019년에 그의 유해 송환이 결정되었지만 행정적인 문제와 코로나 19가 겹치면서 아직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고귀하고 위대한 자, 소풍 같은 조선에 잠들다”
한성의 외국인 묘지에 묻힌 드라마 속 유진의 묘비명입니다. 황기환 지사의 넋 또한 어서 조국으로 돌아와 해방된 하늘의 따스한 햇살을 맞으며 편히 쉴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