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수많은 불발탄과 오발탄을 위하여
“표적은 하나”
“저격수는 둘”
“동지인가?”
고급 요정에서 게이샤들을 끼고 두 남자가 술판을 벌입니다. 대한제국의 외교고문 로건 테일러와 친일파 외무대신 이세훈입니다. 술상에서 올라오는 연기에 로건은 기침을 하고, 옆에 있던 게이샤는 환기를 시키겠다며 창문을 엽니다. 로건이 ‘미개한 조선의 근대화를 위하여’를 외치며 이세훈과 건배를 하는 그 순간, 탕! 이마에 총탄이 박힙니다.
갑작스런 총소리에 요정 건너편 지붕에서 로건을 조준하던 스나이퍼의 손가락이 움찔합니다. 다른 지붕에 있던 저격수의 총알이 빨랐습니다. 요정을 경호하던 일본 낭인들은 그들을 쫓습니다. 검은 두 그림자는 지붕을 날아다니며 총격전을 벌이고 추격을 물리칩니다.
휘영청 둥근 달, 구름이 흐르는 밤하늘, 기와지붕 위에 선 두 사람은 마침내 서로를 향해 총을 겨눕니다. 표적은 하나인데, 저격수는 둘이라... 순간 그들의 머릿속은 상대가 동지인지, 적인지 혼란스럽습니다. 다시 낭인들의 발자국 소리가 들리고, 두 사람은 총을 거두어 반대 방향으로 자취를 감춥니다.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에서 유진초이와 고애신의 운명적인 첫 만남은 그렇게 그려집니다.
드라마에서 총을 맞고 쓰러진 로건은 미국의 고급 정보를 일본에 팔아먹는 인물로 묘사됩니다. 미국정부에서 미군 대위 유진초이를 조선으로 보낸 이유는 그를 암살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애신 또한 친일관료와 작당을 꾸미는 외교고문을 처단하라는 지시를 의병조직으로부터 받았겠지요.
<미스터 션샤인>의 설정과 일치하는 것은 아니지만, 드라마 속 로건은 조선을 비하하고 일본의 식민 지배를 정당화하던 대한제국의 실제 외교고문 스티븐스를 연상케 합니다. 그리고 서로의 존재를 몰랐던 두 스나이퍼의 저격 장면은 사전에 아무런 교감 없이 민족의 적(敵) 스티븐스를 향해 총을 겨누었던 전명운, 장인환 두 의사(義士)를 떠오르게 합니다.
1904년 제1차 한일협약으로 일본은 대한제국에 1명의 서양인 외교고문과 1명의 일본인 재정고문을 둘 것을 강제합니다. 이때 일본에 의해 외교고문에 임명된 자가 바로 스티븐스입니다. 1884년부터 일본 외무성에서 일을 했으니 스티븐스는 애초부터 일제의 하수인이었죠.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된 후에 스티븐스는 미국 외교가와 정가에서 일본을 지지하고 찬양합니다. 1908년 3월, 미국으로 돌아온 그는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일본이 대한제국을 지배하는 것은 당연한 결과이고, 헐벗고 굶주린 대한제국을 발전시키기 위해 일본은 최선의 노력을 다하고 있다는 요지의 망언을 합니다.
미국에 있던 한인동포들은 격분합니다. 4명의 대표단을 꾸려 스티븐스를 찾아가 기사 내용을 정정해줄 것을 정중히 요청합니다. 그러나 스티븐스는 이 요구를 비웃음으로 묵살했습니다.
1908년 3월 23일, 워싱턴D.C.로 가기 위해 샌프란시스코 페리 부두 정거장에 나타난 스티븐스에게 한 청년이 달려듭니다. 권총의 방아쇠를 당겼지만 불발되었고, 스티븐스와 엉켜 격투를 벌입니다. 그때 뒤에서 울린 세 발의 총성! 한 발은 전명운의 어깨를 스쳤고, 다른 두 발은 스티븐스의 허벅지와 가슴에 명중했습니다.
먼저 스티븐스에게 달려든 사내는 스물다섯의 전명운, 뒤늦게 세 발의 총을 쏜 남자는 서른셋의 장인환이었습니다. 두 사람 모두 태평양을 건너와 어장과 철도 현장에서 고되게 일하던 노동자였지만, 거사 직전에 계획을 공유하기는커녕 일면식도 없던 사이였습니다. 같은 날, 같은 장소, 같은 인물을 향해 민족의 울분을 토해낸 두 사람의 의거는 한 편의 각본 없는 드라마였습니다.
동포들은 두 사람을 구명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움직였습니다. 변호사도 변호사지만 우선 급한 것은 유창하게 영어를 할 줄 아는 통역을 구하는 일이었습니다. 당시 미국에는 하버드대학을 나온 유능한 조선청년이 있었습니다. 동포들은 청년을 찾아가 통역을 맡아줄 것을 부탁했지만 그는 3,000달러라는 거액을 불렀습니다. 다시 동포들이 3,000달러를 마련해 찾아가니 이번에는 ‘기독교인이 살인자를 도울 수는 없다’며 거절했다지요. 그 청년의 이름은 이승만입니다.
재판은 한일 대리전 양상으로 흘렀습니다. 장인환의 변호를 맡은 네이선 코플런 변호사는 ‘애국적 광란으로 인한 무지각적 행위’라는 논리를 폈습니다. 자기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이 극도로 지나쳐 정신이 혼미한 상태에서 한 행위이므로 행사책임을 물을 수 없다는 것이었죠. 장인환은 2급 살인으로 규정되어 다행히 사형을 면해 25년형을 받았고, 전명운은 증거불충분으로 곧 풀려났습니다.
석방된 전명운은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토크로 갔습니다. 이때 안중근과 만났다고 하죠. 안중근 의사의 의거에 어떤 형태로든 영향을 주지 않았을까 추측해봅니다. 미국으로 다시 돌아온 전명운은 세탁소를 운영하며 가정을 꾸립니다. 그러나 아내는 일찍 세상을 떠나고 대공황의 여파로 형편이 어려워져 자식들을 고아원에 맡긴 채 어렵게 살아야했습니다.
장인환은 10여 년을 복역한 후 모범수로 출옥합니다. 민족지도자들의 환영을 받으며 조선으로 돌아온 그는 늦장가도 들고, 평소 소신이었던 고아원을 설립하여 사회사업에 투신합니다. 그러나 일제가 그를 그냥 놓아둘 리 없었겠죠. 요시찰 인물로 지목하여 사사건건 발목을 잡으니 장인환은 견디지 못하고 다시 미국으로 돌아갑니다. 금방 부르겠노라 약속했던 처자식과의 재회도 까다로운 미국 이민법에 가로막혀 지킬 수 없었습니다. 얼마 후 어린 딸이 죽었다는 비보가 날아옵니다. 생활고와 속병을 앓던 그는 1930년 치료를 받던 병원에서 스스로 몸을 던지고 맙니다.
전명운과 장인환 두 의사는 1962년에 독립유공자로 서훈되었습니다. 지금은 동작동 국립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잠들어 계십니다. 두 의사의 묘소는 몇 걸음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자리하고 있으니 그것도 인연이라면 인연이겠습니다.
같은 날, 같은 장소, 같은 목표, 그러나 함께 모의하지 않았던 의거가 또 있습니다.
항일투쟁 35년사에서 빛나는 장면을 꼽으라고 한다면 1932년 윤봉길 의사의 홍커우공원 폭탄투척 의거가 빠지지 않을 겁니다. 거사의 성공이라는 측면에서도 그렇고, 의거가 끼친 이후 영향력이라는 관점에서 봐도 그러합니다.
그런데 바로 그날, 윤봉길 의사보다 1시간 앞서 폭탄을 던지려고 했던 사람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계시나요?
1930년, 상하이에서는 아나키스트 계열의 독립운동단체 남화한인청년연맹이 결성됩니다. 남화연맹은 의열투쟁에도 적극적이었습니다. 1932년 4월 29일 일왕의 생일을 기념하는 천장절 행사가 홍커우공원에서 열리고, 일본 군부와 관계의 주요 인사들이 참석한다는 정보가 남화연맹에도 입수됩니다.
거사를 맡은 인물은 하얀 얼굴의 꽃미남 백정기. 백정기 의사는 사전에 홍커우공원 답사를 마쳤고, 남화연맹에서는 의거 후 배포할 격문까지 대량으로 인쇄해놓은 상태였습니다. 행사장 입장 절차가 까다로울 것을 예상하여 중국인 단원 왕야챠오가 일본총영사관에 선을 대어 출입증을 얻어오기로 했던 상황이었죠.
남화연맹에서 준비했던 거사 시간은 오전 10시. 그런데 오기로 한 출입증이 도착하지 않습니다. 속이 타들어가던 백정기는 그냥 가서 폭탄을 던지겠노라 하고, 조직의 책임자였던 정화암은 조금만 더 기다려보자며 만류합니다. 가겠다, 조금만 기다려라, 실랑이가 벌어지던 차에 그들과 평소 친분이 있던 종군기자 한 명이 헐레벌떡 뛰어오며 외칩니다.
“축하해! 너희들 성공했어!”
상하이의 하늘을 가른 물통폭탄의 주인이 남화연맹이라고 생각했던 것이죠. 며칠 후 백범 김구 선생의 공식발표가 있기 전까지 상하이에 있던 독립운동가들은 물론이고 백범의 아들까지도 의거의 주체를 남화연맹으로 생각했다고 하죠.
훗날 정화암은 이날을 회고하며 백범 선생은 단순하게 행동했던 반면, 자신은 너무 완벽을 추구하다가 기회를 놓쳤다고 증언합니다. 윤봉길 의사는 출입허가증을 준비하지도 않았습니다. 윤의사가 일본말을 잘 하니 일본사람처럼 행세하고 들어가면 되지 않겠냐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역사에 가정은 없지만 윤봉길보다 1시간 앞서 백정기가 홍커우공원으로 갔다면, 지금 우리는 김구 선생과 윤의사의 감동적인 시계 일화 대신에 정화암 선생과 백정기 의사에 얽힌 이야기를 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홍커우의거가 있고 1년 후, 남화연맹은 다시 중요한 정보를 입수합니다. 1933년 3월 17일 저녁, 상하이에 있는 고급 음식점 육삼정(六三亭)에서 주중 일본대사 아리요시 아키라가 일본과 중국의 고위 관료들을 초정해 연회를 연다는 소식이었죠. 괴뢰국가 만주국을 세운 일제는 장제스를 비롯한 중국 국민당의 고위 인사들을 매수하여 만주를 포기하게 하려는 계략을 꾸미고 있었습니다.
남화연맹의 단원들은 죽음이 뻔히 보이는 길을 서로 가겠다고 다투었습니다. 결국 제비를 뽑아 백정기와 이강훈이 거사를 행하고, 일본어가 유창한 원심창이 길안내를 맡기로 결정되었습니다. 세 사람은 상하이 교외에서 폭탄투척 연습을 하고 현장도 답사하며 모든 준비를 마쳤습니다. 그리고 거사 당일 동지들과 굳은 악수를 나누고 길을 나섰습니다.
하지만 육삼정에 도착한 그들은 잠복해있던 일본경찰에 급습을 당해 모두 체포당하고 맙니다. 밀정 때문이었습니다. 갖은 고문을 당하며 수사를 받았지만, 법정에서 세 사람은 모두 당당하게 사자후를 토했습니다. 백정기와 원심창은 무기징역, 이강훈은 15년형을 받았습니다.
의거는 실패했지만 이 사건은 중국 언론을 통해 대대적으로 보도되었습니다. 일제와 장제스의 수상한 움직임이 세상에 드러나고, 중국 민중의 거센 저항이 일어나면서 일본의 계략은 수포로 돌아갑니다. 또한 조선인들의 항일투쟁 의지가 꺾이지 않았음을 국내외에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폐병을 앓던 백정기 의사는 이듬해 이사하야 형무소에서 순국합니다. 해방 후 백범은 일본에 있던 그의 유해를 이봉창, 윤봉길 의사의 유해와 함께 모셔와 효창원에 안장했습니다. 1932년 4월 29일, 서로 몰랐던 담대한 거사. 두 주인공 백정기와 윤봉길도 삼의사 묘역에 나란히 잠들어 계시니 그것도 운명이라면 기막힌 운명이겠습니다.
장인환과 전명운, 윤봉길과 백정기. 어디 이들 뿐이겠습니까? 1926년 경성에서 사이토 마코토 총독을 암살하려고 준비하던 남자현 일행은 칼을 품고 먼저 달려든 송학선이라는 젊은이가 있어 발걸음을 돌렸죠.
함께 계획하지 않았으나 같은 목표를 향했던 총구는 둘이 아니라 여럿이었을 겁니다. 알려지지 않은 수많은 이야기가 있을 것입니다.
독립운동의 역사를 조금만 들여다보면 성공한 거사가 하나라면, 실패한(실패한 것으로 보이는) 거사는 열이 넘습니다.
구한말 의병에서부터 일제 강점기 35년간의 투쟁에 이르기까지 비껴나간 총탄이 얼마이고, 제대로 터지지 않은 폭탄은 또 얼마일까요. 그것들이 쌓이고 쌓인 힘은 1945년 일본땅에 떨어진 원자폭탄의 위력에 못지않다고 믿습니다.
1945년 8월 15일의 해방은 거저 주어지지 않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