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영화와 드라마로 만나는 항일투쟁 이야기 시작합니다.
서울 동작동에 있는 국립현충원에 가 본적이 있으신가요? 장군 제2묘역은 한강을 내다보는 명당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곳에는 2009년 대통령 직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에서 선정한 국가공인 친일파 신태영과 이응준의 묘가 있습니다.
“조선인들은 한시바삐 제국의 신민이 되어 동아시아를 개척해야 한다. 내 첫 출진의 목표는 야스쿠니 신사다.”
신태영이 1943년 11월 17일 <경성일보>에 발표한 수기 중 한 대목입니다. 1914년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그는 30여 년 동안 한결같은 마음으로 일제의 침략전쟁에 복무했습니다. 해방이 되고는 대한민국 군대에 입대하여 별 세 개를 달았고 국방장관까지 역임하지요. 자랑스러운 황군으로 죽어 야스쿠니 신사에 가고 싶다던 그는 서울의 파란 하늘 아래 편히 잠들어 있습니다. 신태영의 묘비에는 ‘개화의 선구자로 호국의 간성(干城, 나라를 지키는 군인)이셨다’는 문구가 새겨져 있습니다.
이응준 또한 1914년 일본 육사를 졸업하고 일제 패망까지 변함없는 충의로 복무했던 인물입니다. 그는 일본정부로부터 두 차례나 훈장을 받았고 대좌(대령) 계급까지 올랐습니다.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여러 차례 언론과 강연을 통해 조신의 청년들을 총알받이로 내몰았죠. 해방 이후 이응준 역시 국군에서 승승장구하며 육군참모총장을 지냈습니다. 그의 묘비에는 큼지막한 글씨로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님은 힘을 믿으셨기에 겨레를 위해 힘을 창조하셨다.
님은 힘의 노예가 되지 않으시고 관용과 사랑을 택하였다 .....
영원한 아침이 내리는 아름다운 화환을 받으소서. 군의 아버지시여!”
제가 이들을 뚜렷이 기억하는 이유는 임시정부 한국광복군 총사령관 지청천 장군과 얽힌 일화 때문입니다.
3.1 운동 100주년을 기념하여 MBC에서는 다큐드라마 <마지막 무관생도들>을 방영했습니다. 이원규 작가의 동명 소설이 원작이죠. 드라마는 대한제국 마지막 무관생도들의 삶을 따라 갑니다.
1907년에 대한제국의 군대가 해산되었지만 장교를 양성하는 대한제국 무관학교는 아직 남아있었습니다. 1909년 여름에 무관학교마저 문을 닫으면서 남아있던 생도들은 순종의 명에 따라 일본 육군사관학교의 전 단계인 육군중앙유년학교에 편입됩니다. 40명 남짓한 마지막 무관생도들은 현해탄을 건너는 배에 오릅니다.
1년 뒤, 그들은 대한제국이 일본에 병합되었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학교의 눈을 피해 도쿄 아오야마 공동묘지에 모여 통곡했습니다. 몇몇은 일본 왕궁 앞에서 자결하자고 했고, 몇몇은 당장 무기고를 털어 싸우다 죽자고 했습니다. 그러나 치욕을 참고 멀리 보자는 의견이 힘을 얻죠. 일단 일본군의 장교가 되자, 지휘관이 되어 적당한 시기가 오면 그때 일본에 맞서 싸우자고 결의합니다.
일본 육사에는 그들보다 3년 선배인 김경천이 있었습니다. 그는 후배들에게 정신적인 지주였죠. 김경천은 일본 육사 26기 동기생이 되는 지청천, 이응준, 홍사익을 요코하마의 술집으로 부릅니다. "훗날 조선이 떨쳐 일어나는 때가 반드시 있을 것이다, 그때 내가 <요코하마>라고 전보를 치면 일본군을 탈출해서 모여라." 그들은 서로의 피가 섞인 술을 나눠 마시며 굳게 맹세했습니다.
세월이 흘러 1919년 3.1 만세운동이 일어나자 김경천은 드디어 전보를 보냅니다. 지청천은 일본군을 탈출하여 김경천과 함께 만주로 떠났습니다. 이응준과 홍사익은 오지 않았습니다.
김경천과 지청천은 신흥무관학교에서 교관으로 독립군을 양성했습니다. 이후 김경천은 연해주를 무대로 활약했는데 ‘백마 탄 조선의 나폴레옹’으로 유명했죠. 안타깝게도 소련에서 스탈린이 집권하자 간첩으로 몰려 1942년에 수용소에서 눈을 감았습니다. 지청천은 해방이 될 때까지 만주에서 항일투쟁을 벌이며 한국광복군의 총사령관이 되었습니다. 해방 후에는 국회의원을 지내기도 했습니다.
홍사익은 일본군에서 가장 잘 나가는 조선인이었습니다. 만주사변에서 공을 세운 그는 관동군 사령부에서 근무합니다. 그때 지청천은 인편으로 ‘친구여 요코하마를 기억하는가. 조국의 품으로 돌아오라’는 편지를 보내죠. 하지만 홍사익은 ‘친구여 요코하마를 기억하는 이는 더는 내가 아니네’라고 답합니다. 이후 홍사익은 중장까지 진급했다가, 일제가 패망하자 B급 전범으로 처형되었습니다. 요코하마의 맹세 이후 이응준의 인생은 앞에 서술한 바와 같습니다.
지청천 장군은 임시정부요인 묘역에 잠들어 계십니다. 하필이면 임정요인 묘역이 장군 제2묘역 아래에 자리하고 있죠. 임시정부요인들을 향해 참배하면 그 위에 있는 친일파들에게 머리를 조아리는 것 같아 뒷골이 묵직해집니다.
피로 맺은 맹세, 그러나 전혀 다른 길을 갔던 두 사람 지청천과 이응준. 양지 바른 이응준의 묘에 서서 지청천 장군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역사의 무심함 앞에 가슴이 서늘해집니다.
“소위 친일파들은 열심히 산 사람들이고, 독립운동가들은 대충 산 사람들 아니었을까.”
어느 웹툰작가의 망언은 그냥 튀어나온 게 아닐 겁니다. 얼마 전, 강제징용 피해자들의 소송을 일본 극우의 논리로 뒤집은 한국 법원의 판사는 어떻습니까. 해방된 지가 언제인데 아직도 친일타령이나 하고 있냐며 국민들을 훈계하는 학자들은 또 어떠합니까.
역사에 객관이란 존재하지 않겠죠. 여러 해석과 관점을 존중하는 한, 안타깝지만 앞으로도 일제의 식민 지배를 정당화하고 독립운동을 폄훼하는 짓거리는 그치지 않을 것입니다.
결국 기억의 싸움입니다. 무엇을 기억하고 어떻게 기억할 것이냐에 따라 우리 공동체의 운명은 결정됩니다. 신태영의 개화와 이응준의 힘에 동의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김경천과 지청천의 선택에 박수를 보내는 사람들은 무엇을 해야 할까요?
언젠가부터 미술과 관련된 대중서적들이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여러 작가들이 다양한 관점과 방법으로 작품과 화가에 얽힌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죠. 굳이 미술 전공자가 아니더라도 오랫동안 자신이 즐기고 공부하며 쌓은 지식으로 글을 써서 호응을 얻는 경우도 많습니다. 하나의 분야가 대중화되어 관심을 받고, 그 관심들이 더 많은 대중을 끌어들이는 선순환 구조를 미술은 만들어낸 셈이죠.
독립운동은 그럴 수 없을까요? 다행히 근래에 독립운동을 소재로 한 영화와 드라마가 많이 나왔습니다. 작품이 인기를 끌며 알려지지 않은 인물과 사건이 조명을 받기도 했죠. 영화 <암살> 덕분에 해방 후 금기시되었던 ‘밀양사람 김원봉’이 되살아났고, ‘독립군의 어머니, 여자 안중근’ 남자현 의사의 존재가 알려졌습니다. 드라마 <미스터션샤인>에 나왔던 의병들은 교과서에 수록되어 있던 의병사진의 의미를 깊게 되돌아보게 만들었죠.
이야기는 기억에 날개를 달아줍니다. 드라마 <마지막 무관생도들>을 보고 나면, 지청천과 이응준이 함께 있는 현충원이 각별한 느낌으로 다가옵니다. 영상의 시대이니만큼 영화와 드라마에 나왔던 소재들로 독립운동을 떠올려보면 이야기가 조금 더 흥미롭고 풍성해지지 않을까 기대해봅니다.
최근 10년 내에 선보였던 작품들로 이야기를 해보고자 합니다. 많은 시간이 흐르지는 않았기에 기억에 남아있고, 또 어느 정도는 시간이 지났기에 스포일러에서 자유로울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작품 자체에 대한 비평을 목적으로 하지는 않습니다.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이나 사건, 배경을 징검다리 삼아 불꽃처럼 타올라 부끄럽지 않은 역사를 만들었던 이들을 조명해보고자 합니다. 독립운동을 함께 생각하고, 새롭고 단단하게 기억하는 계기가 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