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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불꽃바람 Oct 07. 2021

기생 향화는 출옥 후 어디로 갔을까

05. 향화와 계옥, 우리를 기생과 여인에 가두지 말라.

영화 <항거>에서 유관순을 향해 원망을 쏟아내는 아낙을 저지하는 김향화

“내 저 년 알어. 경성서 공부하라고 보냈더니 잘난 물만 잔뜩 들었지... 니가 고향까지 와서 설쳐대는 바람에 몇 고을 쑥대밭 되고... 내 아들놈도 칼 맞아 죽고. 아이고~ 아이고~ 그깟 독립이 뭣이 중하다고 거길 따라나서서... 아이고~ 아이고~”

“그만 좀 하시죠! 만세, 누가 시켜서 했습니까?”  

   

감방 철문이 열리고, 퀭한 눈으로 서있는 사람들, 그 스산한 풍경에 충격을 받은 관순. 감방 안으로 떠밀려 들어간 관순을 향해 만세 시위 중에 아들을 잃은 만석어멈은 원망과 한탄을 쏟아냅니다. 그때, 누군가 그만하라며 한마디 툭 쏘아 붙이죠.     


3평 남짓한 감방 안에 스무 명 넘게 수감되었다던 서대문형무소. 누울 수도 앉을 수도 없는 열악한 환경은 서로를 증오하게 만드는 또 하나의 형벌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안에서 그녀들은 발이 붓지 않도록 뱅글뱅글 돌아 걸으며 아리랑을 부르고, 서로의 온기로 추위를 녹여 아기까지 키워냅니다.    

   

동지애로 똘똘 뭉친 여옥사 8번방. 영화에 등장하는 수감자 중 상당수가 실존인물입니다. 관순의 대학선배 권애라, 만삭의 몸으로 옥에 들어온 임명애, 시각장애인이었던 심영식, 등등. 모두가 만세운동에 참가하여 형을 살았고 출옥한 이후에도 독립을 위해 헌신한 지사(志士)들입니다. 인상적인 대사를 던지며 등장했던, 영화에서 계속 비중 있는 역할을 맡았던 김향화 또한 그러했습니다.


       



3.1 운동이 성별과 연령, 신분과 계층을 초월한 전국적이고 전민족적인 항쟁이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가 기생들의 만세운동입니다. ‘조선독립만세! 대한독립만세!’로 뜨거웠던 그해 봄, 진주에서 통영에서 해주에서 안성에서 의로운 기생들이 태극기를 들고 일어났습니다. 수원의 기생들도 열렬히 동참했는데, 그 시위의 주도자가 바로 김향화입니다. 

    

1897년 서울에서 태어난 그녀의 본명은 순이. 향화(香花)는 기생이 되고 난 후 얻은 이름이죠. 15세 무렵 수원으로 시집을 갔으나 얼마 되지 않아 이혼을 하게 되고, 그해 부친마저 사망하자 그녀는 졸지에 가장이 되었습니다.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 기생이 되기로 결심하죠. 늦은 나이인 18세에 본격적인 기생의 길로 들어섭니다. 하지만 피나는 노력으로 소리와 춤을 인정받고 타고난 미모까지 더해져 얼마 지나지 않아 ‘수원 제일의 기생’으로 이름을 날리게 됩니다.     

김향화의 실제 모습

일제 통치가 시작되면서 기생들은 권번(기생조합)에 소속되어 위생검사부터 개인 신상까지 통제를 받아야 했습니다. 한 달에 한 번 성병검사를 받았는데, 수원에서는 그 검사를 자혜병원에서 실시했다죠. 일제는 자혜병원을 정조의 어진과 위패를 모셨던 화령전에 만들었다가, 이후에는 화성 행궁의 봉수당 자리에 설치했습니다. 더군다나 성병검사는 진료실도 아니고 마당에 간이 칸막이를 쳐서 그곳에서 옷을 벗겨 진행했다고 하니, 나라 잃은 기생들의 서러움과 분노는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때마침 3.1 만세운동이 시작되자 향화는 선배 기생 서도홍을 찾아가 만세 시위를 결의하고 30여명의 동료들을 모았습니다. 몰래 태극기를 만들어 거사를 준비했습니다. 그리고 성병검사를 받으러 가는 날인 3월 29일을 거사일로 정했습니다.     


자혜병원 앞에 도착한 기생들은 치마 속에 감춰진 태극기를 꺼내들고 힘차게 독립만세를 외쳤습니다. 당시 병원이 있던 곳은 경찰서와 군청 등 식민통치기구가 모여 있던 수원의 중심가. 곧바로 경찰들이 몰려와 총칼로 위협했지만 굴하지 않고 계속 만세를 불렀고, 이 광경을 지켜보던 사람들까지 동참하면서 수원은 다시 한 번 만세의 함성으로 뜨겁게 출렁거렸습니다.

      

주모자 향화는 체포되어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6개월을 선고받습니다. 그리고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어 유관순 열사와 함께 옥고를 치렀습니다.      

영화 <항거>에서 만주로 가겠다는 인사말을 남기고 전차에 오르는 김향화

다시 영화로 돌아볼까요? 먼저 출소했던 향화와 관순의 오빠는 미처 석방되지 못한 관순을 면회하러 갑니다. 모진 고문으로 몸이 망가질 대로 망가진 관순을 뒤로 하고, 무거운 마음으로 발길을 돌려 나오는 두 사람. 전차 앞에서 고개를 숙여 인사를 나눕니다.    

 

“죄송합니다. 제가 바보 같은 모습 보여서.”

“아닙니다. 준비했던 말들이 많은데 아무것도 할 수가 없네요.”

“저기, 앞으로 뭘 하실 건지 물어봐도 될까요?”

“만주로 갈까 합니다. 저도 지지 않을 거예요.”     


향화는 만주로 갔을까요? 글쎄요. 출옥한 이후 그녀에 대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습니다. 원래 이름이었던 순이로 돌아갔을지, 향화로 남았을지, 아니면 정말 만주로 떠났을지 알 수 없습니다.      


3.1 운동을 경험했던 많은 젊은이들이 출옥 후 만주와 연해주, 상하이로 떠나 해외 독립운동에 투신했으니, 향화가 만주로 갔다고 상상하는 일이 무리는 아닐 겁니다. 더군다나 강단 있고 대범했던 향화를 닮은 또 한 명의 동갑내기 여인을 떠올리면 그 개연성은 충분합니다.      


기생출신으로 만주에 건너가 최초의 여성 의열단원이 되었던 현계옥. 그럼, 향화의 이야기를 이어 계옥의 삶을 들여다볼까요.     



1918년 3월 5일 자 매일신보 기사에 실린 현계옥(맨 오른쪽)의 사진

1897년 대구의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난 현계옥은 어려서 부모를 잃고 17세에 기생이 됩니다. 계옥은 풍류가무가 뛰어났고 한문에도 조예가 깊었다고 합니다. 특히 춤과 가야금에 있어서는 대적할 사람이 없어 풍류객들의 인기를 독차지했다죠. 경성으로 올라와 한남권번에 있을 때에는 서양식 승마를 배워 말을 타고 성 내외를 내달릴 정도로 호방한 기질도 갖고 있었습니다. 당시에도 화제가 되었는지 신문에 기사가 실리기도 했죠.     


이런 그녀에게 운명적인 한 남자가 나타납니다. 소설 <운수 좋은 날>을 썼던 현진건의 사촌형이기도 한 현정건은 일본과 중국에서 유학한 인텔리였습니다. 현정건은 대구에서 고향 친구들과 어울려 계옥이 있던 기생집을 찾게 되었는데, 이때 두 사람은 사랑에 빠져 연인으로 발전합니다.      


계옥은 정건을 따라 경성으로 올라갑니다. 그러나 정건은 곧바로 독립운동을 위해 상하이로 떠나고 말죠. 1년 후 독립운동 자금 마련을 위해 경성으로 잠입한 정건을 향해 계옥은 이야기합니다. 

“나를 애인이나 혹은 한 여자로만 보지 말고 같은 동지로 생각해 달라.”       


1919년 3월, 두 사람은 만주로 떠납니다. 길림에는 일제에 대항하여 더 강력하고 직접적인 투쟁을 꿈꾸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의로운 일을 맹렬히 실행코자 했던 의열단입니다. 계옥은 성심껏 그들의 일을 도왔지만 그녀를 바라보는 시선이 곱지는 않았습니다. 근거 없는 소문이 돌아 그녀의 마음을 아프게 하기도 했죠. 하지만 변함없는 계옥의 태도에 의열단장 김원봉은 마음을 열어 그녀를 정식 단원으로 받아들입니다.

     

김원봉으로부터 폭탄제조와 육혈포(권총) 조작법을 배웁니다. 영어와 중국어, 일어 등 외국어에 능통했고, 변장술 또한 뛰어나 그녀는 최고의 비밀공작원으로 거듭나게 됩니다. 이쯤 되니 어디에서 봤던 사람 같지 않나요? 영화 <밀정>에서 한지민 배우가 열연했던 ‘연계순’. 바로 연계순이 현계옥을 모티브로 만든 캐릭터입니다.     

실제의 현계옥 (상) / 영화 <밀정>에서 의열단원으로 나오는 연계순 (하) 

계옥은 실제로 영화 같은 활약을 펼칩니다. 중국 텐진에서 상하이로 폭탄을 운반하는 임무를 맡은 적이 있는데, 관헌의 취조가 있을 때마다 알지 못하는 서양인에게 접근하여 마치 부부인 것마냥 대화를 나누며 위기를 넘겼다고 하죠. 상하이에서 헝가리 출신 폭탄제조가 마자르가 의열단을 위해 대량의 폭탄을 만들 때에는 그와 연인 것처럼 위장하여 일제의 감시를 속이기도 했고요.     


그러나 1928년, 그녀에게 시련이 찾아옵니다. 연인 정건이 붙잡혀 옥고를 치르고 나왔는데 고문의 후유증으로 세상을 떠나고 말죠. 이후 계옥은 시베리아를 거쳐 모스크바로 유학을 떠납니다. 그곳에서 대학을 졸업했다는 것이 지금까지 알려진 그녀의 마지막 행적입니다.     


향화와 계옥은 일제의 탄압에 맞서 싸웠고, 사회의 낡은 가치관과 싸워야했고, 기생이라는 편견과도 싸워야했습니다. 그녀들에게 독립과 자유는 어떤 의미였을까요? 두 사람의 삶을 의로운 기녀, 혹은 사랑을 쫓아 독립운동에 투신한 로맨티스트에만 가두어 둘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2008년에 수원시의 건의로 김향화는 독립유공자로 선정되었습니다. 건국훈장보다는 격이 낮은 대통령 표창이었습니다. 현계옥의 연인 현정건에게는 199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습니다. 구체적인 독립운동 활동을 입증할 수 없다는 이유로 현계옥은 아직까지 독립유공자로 서훈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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