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 인트로 장면만으로는 아까운 일기당천 김상옥
어두운 밤, 군자금을 받으러 온 사내. 누군가의 밀고로 이미 무장경찰에 포위되었고, 골목골목 지붕마다 총을 겨눈 저격수들. 확성기를 들고 투항을 권유하는 형사. 그러는 사이 문틈으로 탕! 총성이 울리며 경관 하나가 쓰러지고, 용수철처럼 튀어나가는 사내. 한 명을 잡기 위해 수십 명이 쫓는 총격전. 지붕 위로 한 발, 몸을 돌려 한 발, 거꾸러뜨린 적을 방패삼아 또 한 발, 백발백중. 하지만 이내 수적 열세를 이기지 못하고 사내의 몸에도 하나 둘 들어차는 총탄. 마지막 은신처, 권총에 남아있는 마지막 한 발, 머리에 가져다 대고, 대한독립만세!
압도적인 인트로 시퀀스를 선보였던 영화 <밀정>. 그 강렬한 시작을 이끈 사내는 김장옥.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조선 제일의 총잡이 김상옥 의사를 모티브로 잡은 설정입니다. 김상옥의 총격전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영화 장면이 왜곡되었다는 걸 눈치 챌 수 있죠. ‘한 명을 잡으려고 수십 명의 무장경관이 동원되어 쩔쩔맨다고... 에이, 너무 오버 하네.’ 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런데 영화에서 묘사된 경관의 숫자가 너무 적다는 게 함정이죠. 김상옥을 잡기 위해 실제로 배치된 병력은 1천명이었다고 하니까요.
1923년 1월 12일 밤, 종로경찰서에 폭탄이 날아와 터졌습니다. 종로경찰서가 어떤 곳인가요.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을 잡아들여 취조하고 고문하는 장소이자, 무고한 조선사람들을 벌벌 떨게 만들었던 일제 무단통치의 상징이었죠. 거기에 폭탄이 터졌다! 피해가 크지는 않았지만 그런 일이 발생했다는 자체만으로도 일제는 긴장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폭탄을 던진 이는 상하이에서 돌아온 김상옥. 사실 종로경찰서 폭탄 투척은 예행연습이었죠. 이번에 가지고 들어온 폭탄이 제대로 터지는지, 그 위력은 어떠한지 확인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김상옥의 진짜 목표는 사이토 마코토 총독이었죠. 닷새 뒤에 제국의회 참석을 위해 일본으로 떠나는 총독은 경성역에 나타날 것이고, 그때를 노리고자 했습니다.
검문검색을 피해 김상옥은 삼판통(지금의 후암동) 매부의 집으로 숨어듭니다. 마침내 거사일인 17일 새벽이 밝았지만 밀고를 받은 형사와 순사 열다섯 명이 들이닥칩니다. 유도로 단련된 형사들은 김상옥의 방을 덮쳤습니다. 하지만 김상옥은 번개처럼 날아서 형사의 가슴팍을 발로 차고 총을 쏘아 그대로 즉사시켜버립니다. 이윽고 양손에 들린 권총이 불을 뿜어 형사 둘을 더 쓰러뜨립니다. 충격적인 광경에 나머지 순사들은 장독대 뒤로 숨기 바빴죠. 이때를 틈타 김상옥은 담벼락을 뛰어넘습니다.
갑작스러운 기습에 신발은 물론 양말도 신지 못한 그는 맨발로 눈 덮인 산을 올랐습니다. 절에 들어가 밥을 얻어먹고 승복과 신발을 빌려 내려옵니다. 신발을 거꾸로 신고 내려와 추격을 따돌렸죠. 예전에 함께 활동했던 동지 이혜수의 효제동 집으로 찾아갔습니다.
그러나 닷새 만에 경찰은 은신처를 알아냈습니다. 두 번의 실패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4개 경찰서에서 병력을 총동원하죠. 1선에는 권총으로 무장한 형사들이 서고, 2선과 3선에는 장총을 든 무장경관과 기마대가, 4선에는 헌병대와 경찰차를 배치했습니다. 김상옥 한 명을 잡기 위해 1천 명이 4중의 포위망을 구축했습니다.
1923년 1월 22일, 진눈깨비가 날리던 새벽에 벌어진 3시간 반의 총격전은 영화 <밀정>의 인트로 시퀀스와 거의 흡사했습니다. 십 수 명의 경관이 김상옥의 총에 죽거나 다쳤습니다. 김상옥 역시 여러 발의 총을 맞았습니다. 추격을 피해 어느 집 변소에 숨어든 그는 단 한 발의 총알이 남았음을 확인합니다. 상하이를 떠나며 동지들에게 남겼던 말, “나의 생사가 이번 거사에 달렸소. 만약 실패하면 내세에서 만납시다. 나는 자결하여 뜻을 지킬지언정 적의 포로가 되지는 않겠소.”는 이 순간을 예언했던 것일까요. 대한독립만세! 외침과 함께 마지막 총성이 울렸습니다.
혹시나 김상옥의 총탄이 날아오지 않을까 겁을 먹은 경찰들은 그의 어머니를 불러 죽음을 확인한 후에야 시신에 접근했습니다. 김상옥의 몸에는 자결했던 한 발을 포함하여 모두 열 한 개의 총알이 박혀 있었습니다.
말 그대로 일기당천(一騎當千). 쌍권총 움켜쥐고 식민지 경성의 한복판에서 벌인 열흘간의 혈투. 너무 영화 같은 스토리가 오히려 문제였을까요? 아직까지 김상옥 의사의 삶이 영화로 만들어지지 않았다는 게 참으로 의아합니다.
총격전도 대단했지만 그의 34년 삶 전체가 한 편의 영화로 손색이 없습니다. 불굴의 투혼 김상옥을 만들어낸 인생 포인트를 일곱 장면으로 뽑아 구성해봅니다.
# 1. 가난 보다 배움이 더 고팠던 소년공
김상옥은 1889년 서울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구식 군대의 포수였고 집안은 가난했습니다. 상옥은 여덟 살 때부터 쳇불 공장에서 일해야 했습니다. 열네 살 때부터는 대장간에서 일을 했죠. 김상옥의 완력은 쇠망치로 철을 두드리며 다져진 것이었습니다.
생계를 위해 힘들게 일하는 와중에도 배움에 대한 욕구는 간절했습니다. 주위 사람들한테 한문을 배우고 교회 야학을 다니며 학문을 익혔습니다. 공부 욕심이 많았던 상옥은 어머니한테 3년만 공부시켜달라고 졸랐다죠. 아들의 부탁을 들어주지 못한 어머니는 훗날 눈물로 이때를 회고합니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그 원을 못 들어줬지요. 상옥이는 제대로 입지도 먹지도 못하고 컸죠. 낮에는 대장간에 가서 일하고 밤에는 야학을 가는데, 시간이 급해 방에도 못 들어앉고 마루에서 주는 것을 받아 퍼먹고 갈 때는, 그저 체할라... 체할라... 하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 2. 성공한 사업가, 그러나 허한 가슴
스무 살 무렵에 그는 전국을 떠돌며 약품 행상으로 돈을 꽤 법니다. 스물 셋이 되던 1912년에는 형제들과 함께 동대문에 ‘영덕 철물점’을 열었습니다. 종업원만 50명을 둘 정도로 사업은 번창하지요.
김상옥은 일제의 경제수탈에 맞서 조선물산장려운동에 적극 나섰습니다. 직접 말총모자(말의 갈기나 꼬리 털로 만든 모자)와 양말, 장갑 등 국산 생필품을 생산해 저렴한 가격에 보급했습니다. 단발령 이후 남자들에게 모자의 수요가 컸는데, 당시에는 일본제품이 장악하고 있던 실정이었죠. 김상옥이 개발하고, 직접 쓰고 다니면서 홍보했던 국산 말총모자는 큰 인기를 누렸다고 합니다.
젊은 나이에 사업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지만, 쇠망치를 두드릴 때에도 양말 기계를 돌릴 때에도 그는 답답한 마음을 해소할 수 없었습니다. 술을 마셔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가슴 한 구석에서 이런 말이 새어나왔습니다.
“丈夫此世 安事區區 (장부차세 안사구구) 남아로 세상에 태어나 구차하게 살지 않겠다.”
# 3. 말 탄 순사의 칼을 빼앗다
3.1 운동이 일어나자 김상옥은 철물점 직원들과 적극적으로 만세시위에 동참했습니다. 고무판에 태극기를 인쇄하여 사람들에게 나눠주기도 하고, 남산과 인왕산에 몰래 올라가 태극기를 꽂아 놓기도 했지요.
만세운동이 한창이던 어느 날, 말을 탄 일본순사가 시위를 해산시키려 여학생을 향해 칼을 내려치려 했습니다. 이를 목격한 김상옥은 그대로 달려들어 순사를 말에서 끌어내리고 칼을 빼앗습니다. 웬만한 의협심과 용기로는 할 수 없는 대범한 행동이었죠. 야사로 생각하기 쉽지만 실제 있었던 일입니다. 그때 빼앗은 칼을 동료에게 주었고, 그 칼은 해방 후 김상옥의 아들에게 전달되어 지금은 독립기념관에 전시되어 있습니다.
# 4. 광주리 안에 신문을 숨겨서
3.1 운동에 크게 감명 받은 김상옥은 생업을 제쳐놓고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에 투신합니다. 1919년 4월, 일제가 제암리 학살사건을 저지르자 뜻이 맞는 동지들과 혁신단이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합니다. 혁신단은 ‘혁신공보’라는 지하신문을 발행하여 국내외 독립투쟁 소식과 민족의식을 높이는 내용을 실었습니다.
그는 신문의 배포 책임자였습니다. 채소장수로 위장하여 광주리 안에 신문을 숨겨 다니며 사람들에게 전했습니다. 그러나 6개월이 지나지 않아 일제에게 체포당하고 맙니다. 40일간 취조와 모진 고문을 당했지만 혁신단에 대해 단 한마디도 발설하지 않았습니다.
# 5. 암살단 조직과 망명
조선물산장려운동도 해보고 신문을 만들어 애국계몽운동도 해보았지만, 평화적인 방법으로는 도저히 독립을 이룰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른 김상옥은 무력투쟁의 길을 선택합니다. 1919년 12월에 ‘암살단’을 조직합니다. 말 그대로 조선총독을 비롯하여 식민통치기관, 민족반역자 처단을 목적으로 했습니다.
이 시기에 김좌진 장군이 이끌던 북로군정서와도 연결이 되어 교관으로부터 본격적으로 사격을 배웁니다. 북한산에서 유격훈련을 하며 그의 사격술은 빠르게 발전했고, 얼마지 않아 암살단 내 최고의 요원이 되었습니다.
1920년 8월에 기다리던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미국 의원단이 동북아시아를 시찰하면서 조선도 들른다는 소식이었죠. 의원단이 경성을 방문하는 날짜는 8월 24일, 그들을 환영하는 대대적인 행사를 열릴 것이었습니다. 그때를 노려 총독과 고위관료, 친일파들을 제거하고 전세계에 조선의 독립의지를 알린다는 것이 암살단의 계획이었습니다.
사실 김상옥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학생들을 중심으로 제2의 만세운동이 준비되고 있었고, 상인들도 가게 문을 닫아 시위에 호응하고자 했죠. 하지만 3.1 운동을 경험했던 일제는 이런 기류를 읽고 먼저 움직입니다. 시위를 주도할 것으로 예상되는 사람들을 사전에 검거하는 예비검속을 실시합니다. 그 대상자가 1000명이 넘었습니다.
혁신공보 사건으로 한 차례 체포되었던 김상옥도 명단에 있었습니다. 예비검속으로 암살단의 존재도 이내 드러납니다. 23일 집으로 들이닥친 경찰을 김상옥은 재빠르게 피했지만, 집안을 수색하는 가운데서 거사와 관련된 증거가 압수되었습니다.
그의 가족과 동지들은 경찰에 끌려가 고초를 겪었습니다. 김상옥 또한 궐석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죠. 더 이상 국내에 머물 수 없게 된 그는 중국으로 망명합니다.
# 6. 연인의 관 대신에 구입한 권총
상하이에 도착한 김상옥은 임시정부 요인들과 교류하며 의열단에도 가입했습니다. 상하이와 국내를 몰래 오가며 군자금을 모으는 임무도 수행했습니다.
1921년에 잠시 국내에 잠입했을 때, 동지이자 연인이었던 장규동을 만납니다. 1년 전 암살단 거사가 탄로 났을 때, 그녀 또한 경찰에 끌려가 극심한 고문을 당했습니다. 일제는 그녀의 옷을 벗겨 질질 끌고 다니고, 천장에 거꾸로 매달아 놓는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건강이 악화되어 있던 장규동은 김상옥에게 자신을 상하이로 데려가 달라고 부탁합니다.
두 사람은 상하이로 들어와 잠시 행복한 시간을 보내지만, 그녀는 후유증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숨을 거두었습니다. 연인의 차가운 시신을 앞에 두고 김상옥은 눈물로 밤을 지새웠습니다. 다음날 소식을 듣고 임시정부 동지들이 찾아옵니다. 김구 선생은 100원을 주며 관을 사다가 장사를 지내라고 위로하죠. 관을 사오겠다며 나간 김상옥은 얼마 뒤 빈손으로 돌아왔습니다. 의아하게 생각한 사람들이 관은 어디 있냐고 묻죠. 그가 대답했습니다.
“관은 사지 않았습니다. 관 대신에 총을 샀습니다. 사랑하는 내 동지 장규동을 죽인 것은 병마도 아니요 귀신도 아닙니다. 동지를 죽인 것은 일제 경관들입니다. 그녀의 관과 맞바꾼 이 총으로 나는 끝까지 싸울 것입니다.”
# 7. 제비여, 넋이라도 오소서!
1922년 12월, 의열단은 임시정부와 협력하여 경성에서 대규모 폭탄암살 투쟁을 계획하고 그 적임자로 김상옥을 선정했습니다. 경성으로 다시 돌아온 김상옥은 앞에 서술한 것처럼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지고, 총독 암살을 준비하다가 경찰의 기습을 받아 한판싸움을 벌였습니다. 마지막까지 그의 손위 쥐어져 있던 모제르 7연발 권총은 연인의 관 대신에 사왔던 바로 그것이었죠.
총격전이 끝난 아침, 경찰은 현장을 수습하느라 분주했습니다. 새벽에 울린 총소리를 듣고 사람들이 몰려들었습니다. 순사들 눈치를 보느라 어느 누구도 한마디 꺼낼 수 없었지만, 이름 모를 독립투사의 처절한 죽음을 깊이 애도하고 있었습니다.
구경 인파 속에는 등이 굽은 열일곱 살 중학생도 한 명 끼어있었습니다. 훗날 한국 서양화단의 거목이 되는 구본웅입니다. 현장을 생생히 목격했던 그는 해방된 뒤 그날의 기억을 끄집어내어 펜화로 되살렸습니다. 그림에 자작시를 덧붙여 김상옥 의사를 추모했습니다.
아침7시. 찬바람.
섣달이 다 가도 볼 수 없던 눈이
정월 들자 나리니 눈바람 차갑던
중학시절 생각이 난다.
아침7시. 참바람. 눈 쌓인 들판.
새로 진 외딴집 세 채를 에워싸고
두 겹 세 겹 늘어선 왜적의 경관들
우리의 의열 金相玉 義士를 노리네.
슬프다 우리의 金義士는 양손에
육혈포를 꽉 잡은 채. 그만 _
아침 7시. 제비(김상옥의 별명을 제비라고 불렀었음) 길을 떠났더이다.
새봄 되오니 제비시여 넋이라도 오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