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불꽃바람 Oct 13. 2021

"여기 다들 밀정 아니라는 증거 있어?"

08. 독립유공자가 된 밀정과 혀를 깨문 독립투사 김시현

“그 친구 어떻습니까, 이정출. 친구할 만 합니까?”

“그 자나 저나 낚시꾼이 던진 미끼인데, 친구가 가당키나 하겠습니까?”

“죽은 김장옥 열사한테 그 자의 이야기를 들었소. 가까운 친구였다고.”

“옛날 얘기일 뿐입니다.”

“지금 우리한테는 시간도 사람도 없소. 그 미끼 우리가 먼저 뭅시다. 반간(反間). 적의 첩자를 역으로 우리 첩자로 만든다. 첩자 중에서도 가장 위험하지만 또 그만큼 쓸모 있는 게 반간이요.”     


대규모 의혈투쟁을 위해 경성으로 폭탄을 가져가야 하는 의열단. 의열단에 접근하여 단장 정채산을 잡고 조직을 일망타진하려는 일제 경찰. 의열단원 김우진과 고등계 형사 이정출은 속내를 숨기고 서로에게 접근합니다. 이정출이 의열단의 근거지인 상하이로 온다는 연락이 전해지고... 정채산은 김우진에게 그를 이용하자고 제안합니다.     


스파이는 역사적으로나 영화적으로 흥미로운 소재입니다. 특히 이중스파이는 이야깃거리가 풍부하죠. 아직까지도 밀정이었는지 독립투사였는지 미스터리로 남아있는 황옥 경부(일제 경찰의 간부계급)는 영화에서 이정출로 묘사됩니다. 그가 깊숙이 관여했던 의열단의 폭탄암살 거사를 모티브로 영화 <밀정>이 제작되었습니다.  

영화 <밀정>에서 송강호가 연기했던 이정출. 실존인물 황옥을 모티브로 했습니다.




의열단은 보다 직접적이고 강력한 항일투쟁을 위해 1919년 11월에 결성되었습니다. 이듬해 밀양폭탄의거를 필두로 부산경찰서 폭탄의거(1920년 9월), 밀양경찰서 폭탄의거(1920년 11월), 조선총독부 폭탄의거(1921년 9월), 상하이 황포탄 의거(1922년 3월)를 연거푸 실행하며 일제의 간담을 서늘케 했습니다.      


그러나 목숨을 건 단원들의 활약에도 불구하고 폭탄의 성능이 떨어져서 기대만큼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는 게 문제였습니다. 의열단장 약산 김원봉은 헝가리인 폭탄전문가 마자르를 섭외하여 폭탄의 성능을 개선시키는데 심혈을 기울입니다. 아울러 단재 신채호 선생을 찾아가 의혈투쟁의 의의를 세상에 알리고 단원들에게 자부심을 줄 수 있는 선언서를 부탁합니다. ‘의열단 선언’이라고도 불리는 ‘조선혁명선언’이 그렇게 나왔습니다.  


간절히 원했던 고성능 폭탄과 사상적 무기인 조선혁명선언문. 이제 준비는 다 되었으니 이것들을 안전하게 국내로 옮겨 거사를 실행하는 일만 남았습니다. 약산은 그 임무를 <밀정>에서는 김우진으로 그려지는, 의열단원 김시현에게 맡깁니다.     


김시현과 황옥은 이전부터 친분을 쌓아온 사이였습니다. 영화의 설정과는 반대로 김시현이 먼저 김원봉에게 황옥을 추천합니다. 황옥이 고등계 경부이기는 하나 은밀히 독립운동을 지원하고 있는 믿을 만한 사람이라고 얘기하죠. 때마침 1923년 1월에 김상옥 의사가 종로경찰서 폭탄을 투척하는 사건이 발생했고, 이 사건의 배후를 추적하라는 상부의 명을 받아 황옥이 상하이로 출장을 오게 됩니다. 다른 단원들은 황옥을 믿을 수 없다며 만류하지만 김원봉은 직접 그를 만나보기로 합니다.       

김원봉과 황옥, 김시현의 만남을 담은 영화 <밀정>의 한 장면

약산은 황옥과 몇 마디를 나눠보고 그에 대한 의심을 풀었습니다. 의거 계획을 설명하며 폭탄 반입에 대한 도움을 청했습니다. 황옥 또한 자신이 지금은 일제의 주구로 일하고 있지만 독립을 위해 함께 싸우겠다며 의열단에 가입했습니다.       


다량의 폭탄을 운반하는 과정은 결코 쉽지 않았습니다. 황옥이 경찰 간부라는 신분을 이용했기에 위기를 넘길 수 있었습니다. 폭탄을 국내로 무사히 들여왔고, 이제 거사만 남겨 놓았습니다.       


경성으로 돌아온 황옥은 상하이 출장 경과를 보고했습니다. 의열단의 동태를 감시했지만 구체적인 성과는 없었다고 말하죠. 그런데 믿을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집니다. 그의 상관은 황옥의 눈앞에 중국에서 들여온 폭탄 하나를 가져다 놓습니다.       




대규모 폭탄암살로 경성을 뒤흔들려고 했던 의열단의 계획은 실행도 못해보고 탄로 나고 말았습니다. 밀정 때문이었죠. 거사의 스케일이 컸던 만큼 여러 사람들이 관여할 수밖에 없었고, 그 사이에 밀정이 끼어들었던 것입니다.      


의열단의 거사를 보면 혼자서 실행했던 의거는 상대적으로 성공 확률이 높았던 반면, 둘 이상이 공모했던 경우는 실패 확률이 높았습니다. 그만큼 조직 곳곳에 밀정이 많이 침투해있었다는 걸 의미하죠.       


영화의 초반부에 의열단 막내 단원 주동성이 체포되었다가 너무 빨리 풀려나오자 다른 단원들은 그를 밀정으로 의심합니다. 취조를 받던 주동성이 내뱉는 한 마디에 단원들의 얼굴에 긴장의 빛이 흘러가죠.


여기 다들 밀정 아니라는 증거 있어!     

밀정에 의해 정보가 새어나가 거사가 실패하고 조직원이 체포되는 것도 치명적이지만, 더 큰 고통은 동지가 동지를 끊임없이 의심하고 믿지 못하는 상황이었을 겁니다.      

일제의 감시대상 인물카드에 남아있는 의열단원들의 모습

인터넷에서 ‘의열단’을 검색하면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의열단원들 사진입니다. 이 사진 역시 일제의 감시대상 카드에 남아있던 자료입니다. 밀정이 남긴 독립운동의 사료인 셈이죠. 밀정이 열심히 암약하며 남긴 자료를 통해 우리는 독립운동가들의 얼굴과 이름, 신상과 활동을 확인하고 있습니다. 기가 막히는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밀정은 실핏줄 같은 존재였습니다. 식민지배 피라미드의 가장 아래 단계에서 구석구석으로 뻗어나가 독립운동을 감시하고 이간질시키고 파괴했습니다. 어쩌면 드러내놓고 일제에 부역했던 인간들보다 더 악질적인 민족반역자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영화는 통쾌하게 결말을 맺습니다. 이정출과 김우진 모두 재판을 받고 수감되지만 이정출은 곧 풀려나죠. 그리고 붙잡혀 들어가기 전에 김우진에게 부탁받은 일을 수행합니다. 자신의 옛 상관 히가시 부장이 주최한 연회장에 폭탄을 설치해 시원하게 날려버리죠.      


실제로는 어땠을까요?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습니다. 폭탄은 압수되었고 관련자들은 모두 재판에 넘겨져 옥살이를 했습니다.      


영화처럼 황옥은 경시로 승진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의열단에 접근했던 것이라고 혐의를 부인합니다. 재판부는 그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김시현과 동일하게 10년 형을 선고받고 수감됩니다. 물론 형을 다 살지 않고 금방 출옥합니다. 이를 두고 역시 황옥은 밀정이 맞다고 얘기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후 행적이나 김원봉과 김시현의 증언에 따르면 의열단을 보호하기 위해 ‘일제의 앞잡이’라는 비난을 감수했던 것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재판정에 선 황옥(왼쪽)과 김시현(가운데)

영화에서 김우진은 고문을 받다가 스스로 혀를 깨물죠. 실제로 김시현 지사도 그랬습니다. 그만큼 독한 사람이었습니다. 일제강점기 35년 동안 6번 투옥되었고 복역한 기간만 16년입니다. 폭탄반입 사건으로 6년을 살고 나왔을 때 이제 그만 몸을 돌보라는 가족들에게 “나의 섭생은 오직 독립운동뿐이다.”는 말을 남기고 다시 중국으로 떠나죠.      


이런 꼿꼿한 기질은 해방이 되고도 변하지 않습니다. 김시현은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고향 안동에 출마하여 당선됩니다. 1949년 김구 선생이 안두희의 흉탄에 서거합니다. 김시현은 암살의 배후에 대통령 이승만이 있다고 확신했습니다. 이미 일흔 백발노인이었지만 의열단 동지였던 유시태와 공모하여 1952년에 이승만 암살을 시도합니다. 유시태가 겨눈 권총은 불발탄이었습니다. 체포되어 사형을 받았다가 무기징역으로 감형됩니다. 4.19 혁명이 일어나자 특별사면으로 석방되었습니다.      


그의 아내는 영화 <항거>에서 유관순의 이화학당 선배로 나오는 권애라 지사입니다. 밖으로 나도느라 제대로 돌봐주지 못했던 아들도 성년이 되자 독립운동에 뛰어들었습니다. 두 모자(母子)가 일제에 체포되어 함께 옥살이를 하기도 했습니다. 온 가족이 조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했지만 노년의 삶은 경제적으로 어려웠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1966년 눈을 감으며 아내에게 이런 유언을 남겼습니다.

“미안하오, 권동지. 조국 독립을 위해 몸 바쳐 투쟁했는데도 반쪽 독립밖에 이룩하지 못했소. 남은 여생을 조국 통일 사업에 이바지해 주시오.”     


영화에 등장했을 법한 밀정들의 이후 삶은 어떠했을까요? 잘 알려진 민족반역자들 조차 단 한 명도 처벌하지 못했는데, 드러나지 않은 밀정에 대한 조사와 처벌이 되었을 리 만무하죠. 해방 후 밀정은 모두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최근에 KBS에서 밀정에 대한 탐사 다큐멘터리가 방영되었습니다. 의열단과 관련된 밀정 이야기도 있습니다. 김재영이라는 인물이 등장합니다. 그는 경남 하동 출신으로 1924년에 상하이로 이주하여 청년동맹회에 가입해 한인 청년들과 어울렸습니다. 그 즈음 일본총영사관 순사부장 나카가와, 조선총독부 통역관 오다 미쓰루를 만나면서 밀정으로 활동하기 시작하죠. 1925년에는 의열단에도 가입했고, 내부에서 빼낸 정보를 일제에 넘겼습니다. 밀정비를 받으며 방탕한 생활을 이어가다가 이용가치가 떨어지자 버림받습니다. 국내로 돌아와서는 몇 차례 범법 기록만 남기고 역사에서 사라졌습니다.     


그런데 김재영은 1995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습니다. 의열단과 청년동맹회에 참여한 공적을 인정받은 거죠. 더욱 황당한 것은 유족이 신청을 한 것도 아니고 보훈처에서 발굴하여 서훈을 주었다는 것입니다. 이승만 저격 혐의 때문에 김시현 지사는 아직까지 서훈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4.19 때 특별사면을 받은 후로 60년이 흘렀어도 변함이 없습니다. 밀정 출신도 서훈되고, 일본군 장교출신도 국립묘지에 묻히는데, 보훈처의 상훈법은 혀를 깨물어가며 평생 독립만을 위해 싸운 독립투사에게만 유독 가혹한 건 아닌지 씁쓸할 뿐입니다. 

이전 07화 영웅본색 김상옥의 일곱 장면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