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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불꽃바람 Oct 09. 2021

유해진의 칼에 가리워진
봉오동의 진실

06. 봉오동 전투, 승리의 기억을 해부하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 평생을 헌신하신
홍범도 장군님의 귀환을 모시게 되어 영광입니다.
지금부터 대한민국 공군이 안전하게 호위하겠습니다.
필승!     


장군이 돌아왔습니다. 포수 출신 의병으로 시작해 봉오동-청산리 전투를 이끌었던 독립영웅이 긴 유랑을 끝내고 조국의 하늘로 돌아왔습니다. 유해를 모신 비행기가 대한민국 영공으로 들어서는 순간, 호위를 맡은 공군 전투기에서 흘러나오는 안내 음성. 여전히 갈 길이 멀지만 역사가 또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고 있음을 확인하는 감격스러운 장면입니다.     

봉오동 전승 100주년을 1년 앞두고 개봉했던 영화 <봉오동 전투>. 영화에서 홍범도 장군은 강렬한 카리스마를 뿜어내지만 주인공은 아니었습니다. 장군을 연기한 최민식 배우가 특별출연 했듯이, 영화 속 홍범도도 우정출연에 가까운 비중으로 비춰지죠. 영화의 스토리는 봉오동 골짜기로 일본군을 유인해오는 과정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주인공 이장하는 자신을 버려 임무를 수행하는 인물이죠. 총알이 빗발치고 옆에서 폭탄이 터져도 끄떡없습니다. 부상을 입어도 뛰고 쏘는데 지장이 없습니다. 이장하가 일찍 죽으면 스토리가 끝나버리니까 그러려니 하고 넘어갈 수도 있겠습니다.     


그런데 또 다른 주인공 황해철이 등장하는 장면에서는 입이 쩍 벌어지죠. 그는 명색이 지휘관인데 총알 장전을 잘 못합니다. 총보다 칼이 더 편합니다. 삼국지에나 나올 법한 큰 칼을 빼어들고 총을 든 일본군들을 헤치며 쉴 새 없이 베어나갑니다. 그리고 일본군 대장들과는 꼭 일합을 겨룹니다. 임진왜란에서나 등장할 만한 장면이 1920년 전쟁에서 그려지죠.     

영화 <봉오동 전투>의 두 주인공

아무리 재미를 위한 설정이었다 하더라도 몰입도가 떨어지니 사실에 대한 의구심까지 남깁니다. 6월이면 만주라고 해도 늦봄은 되는 날씨일 텐데 겨울코트를 입고 나오는 사람들도 고개를 갸웃거리게 만듭니다.  

     

‘모두의 싸움, 모두의 승리’

영화의 캐치프레이즈입니다. 제대로 된 군복도 갖춰 입지 못한 어제의 농사꾼들이 오늘은 독립군이 되어 일본의 정규군에 맞서 싸웠다, 봉오동 전투는 평범한 민초들이 목숨을 걸고 만들어낸 위대한 승리다, 이것이 영화가 관객에게 주고 싶었던 메시지겠지요. 


흔히 봉오동-청산리 전투하면 홍범도 김좌진 장군만 떠올리기 쉬운데, 그런 영웅들 말고도 기억해야 할 많은 이들이 있다는 주제의식에는 공감합니다. 그러나 영화의 투박한 서사와 무리한 묘사는 오히려 봉오동 전투에 대한 역사적 사실과 의미마저 희석시켜 놓는 건 아닌지 우려스럽습니다.            


불사조 이장하와 칼을 든 황해철, 그들을 옆으로 밀어 놓아야 독립전쟁 제1회전을 제대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1920년 1월 17일 자 독립신문 38호.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20년을 독립전쟁의 원년으로 선언했습니다.

# 왜 1920년인가


1920년 하면 당연히 1년 전의 큰 사건이 떠오르죠. 국내는 물론이요 해외에서까지 한인들이 사는 곳 어디서든 울려 퍼졌던 독립만세의 함성. 만세 소리가 잦아든 후에도 3.1 운동의 열기는 국내에서는 실력양성운동으로, 해외에서는 무장투쟁으로 옮겨 붙습니다. 수많은 인재들이 만주로 몰려듭니다. 1920년 전후로 만주에만 70여개의 독립군 부대가 존재할 수 있었던 원동력입니다.     

  

국제정세에도 묘한 기류가 흐릅니다. 1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바다를 장악하는 국가가 세계를 지배한다는 인식이 퍼지고, 열강들은 강력한 군함을 갖기 위한 경쟁에 들어갑니다. 미국과 일본은 동아시아 해상권을 놓고 날선 신경전을 벌이게 되죠. 조만간 미일전쟁이 터질질 수 있고, 그렇다면 우리에게도 기회가 생길 수 있다는 희망이 싹트게 됩니다.   

  

1차 세계대전 후 전후 질서를 논의했던 파리강화회의에서 식민지 조선은 철저히 외면 받았습니다. 강대국들에 호소해서 독립을 이루겠다는 방책이 얼마나 허약한 것인지 민족지도자들은 실감하게 되죠. 독립은 싸워야 쟁취할 수 있다는 무장투쟁론이 힘을 얻습니다. 임시정부의 산파 역할을 했던 안창호 선생이 1920년 1월 신년사에서 그해를 ‘독립전쟁 원년’으로 선포했던 이유입니다.     

 

이러한 흐름들이 형성되던 1920년, 독립군 부대들은 당장 전면전을 벌일 수는 없으니 국경을 넘어 일본군 초소를 습격하거나 친일파를 처단하는 방식의 소규모 게릴라전을 펼치죠. 가만 두어서는 안 되겠다 싶은 일본군은 월강추격대를 꾸려 독립군을 쫓습니다. 봉오동 전투의 서막은 그렇게 열립니다.      

봉오동-청산리 전투가 벌어진 지역

# 왜 봉오동이었을까


만주가 워낙 넓은 지역이기에 조금 세분해서 볼 필요가 있습니다. 백두산을 중심으로 왼편 즉 압록강이 흐르는 위쪽을 서간도, 반대로 두만강이 흐르는 위쪽을 북간도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당시 우리 동포들은 주로 북간도에 모여 살았습니다. 그 수가 35만 명에 이르렀다고 하죠. 사람을 모으기 쉽고 동포들의 지원을 받기도 용이한 북간도에 많은 독립군 부대가 자리를 잡는 건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봉오동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만주 부호 최운산 장군입니다. 봉오동이 황무지였을 때 헐값에 사들인 그는 대규모 축산업과 농업을 벌이고 그 생산물로 러시아와 무역을 통해 부를 축적합니다. 그리고 다양한 생필품을 생산하는 공장까지 운영하며 만주 최고의 갑부로 자리매김 하지요.   

  

당시 중국에는 마적 떼가 기승을 부렸습니다. 최운산은 재산을 지키고 지역의 동포들을 보호하기 위해 1912년 사병부대를 조직합니다. 1919년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그는 이 부대를 대한군무도독부로 재창설합니다. 그리고 무장투쟁을 위해 찾아오는 사람들을 받아들여 이들을 체계적으로 훈련시킵니다. 연병장과 막사를 만들고 군복을 지어 입혔습니다. 당시 일제 밀정의 보고에 따르면 ‘봉오동에서는 재봉틀 8대를 돌려 군복을 지어 입히고 있다’는 기록이 있으니, 봉오동이 얼마나 체계적인 군사 요새로 준비되어 있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무기와 식량을 지원받을 수 있는 봉오동으로 홍범도 부대를 비롯해 여러 독립군 부대가 모여듭니다. 봉오동 전투가 일어나기 한 달 전인 1920년 5월, 북간도의 6개 무장단체는 통합군단 ‘대한북로독군부’로 단일대오를 꾸립니다. 그리고 봉오동 일대에 살고 있던 주민들을 대피시키고 참호를 파서 결전을 준비합니다. 두만강을 건너면 지척에 있는 봉오동은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적이 골짜기로 들어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 첨단무기로 화룡점정


1894년에 동학농민군은 압도적인 숫자에도 불구하고 한줌의 일본군이 쏘아대는 기관총에 쓸려나갔습니다. 아무리 정신력이 강하다고 해도 현대전에서 무기의 성능을 뛰어넘을 수는 없습니다. 구한말 의병과 1910년대 초반 독립군이 사용했던 목총으로는 동아시아 최강의 일본군을 상대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1918년 즈음부터 양상이 달라지죠. 체코군으로부터 사들인 무기가 독립군의 손에 쥐어지면서부터.    

  

갑자기 유럽에 있는 체코가 등장하니 의아하죠? 사연이 있습니다. 1차 세계대전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의 식민지였던 체코의 젊은이들은 징집되어 러시아 전선으로 끌려가게 됩니다. 그러나 그들은 러시아에 맞서는 대신에 포로가 되는 길을 선택합니다. 그리고 러시아로부터 지원을 받아 체코군단을 만들고 조국의 독립을 위해 싸울 준비를 합니다.     

 

하지만 1917년 러시아에서 볼셰비키 혁명이 일어나고, 새로 들어선 혁명정부는 전쟁에서 발을 빼려 합니다. 적국이었던 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 오스만제국과 휴전협정을 맺죠. 졸지에 쓸모가 없어진 체코군단은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됩니다. 러시아에서는 체코군단이 문제를 일으킬 것을 염려하여 가까운 서쪽 길을 놔두고 시베리아 횡단열차에 그들을 태워 멀리 동쪽으로 보내죠. 긴 여정 끝에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은 했으나, 이미 1차 세계대전은 끝났고 고향으로 돌아갈 그들에게 이제 무기는 짐이 되었습니다.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독립운동 지도자들이 체코군단에 접근합니다. 같은 약소민족으로서 동질감을 느꼈던 체코군단의 가이다 장군은 일제의 방해와 협박에도 불구하고 무기를 독립군에게 넘깁니다. 1918년에서 1920년 사이에 대략 소총 2만정, 탄환 50만발, 최신식 맥심기관총까지 인수하게 됩니다.   

  

체코군으로부터 들여온 모신나강 소총은 20세기 초 전설적인 스나이퍼들이 사용할 정도로 성능이 뛰어났습니다. 당시 일본군이 쓰던 아리사카 소총의 유효 사거리가 550미터였는데, 모신나강 소총은 750미터였다죠. 그동안 변변치 못한 무기로 고생하던 독립군은 이제 일본군에 맞서 1대1 싸움이 가능해졌습니다.      

영화 <봉오동 전투>에서 매복에 걸려든 일본군을 향해 발사하는 독립군들

# 결코 질 수 없는 싸움


소총 한 정의 가격은 당시 돈으로 30~35원, 일반 노동자의 1년치 연봉에 해당되는 금액이었다고 합니다. 무기를 구입하는데 들어갔을 어마어마한 돈은 누가 감당했을까요? 당연히 만주와 연해주에서 막대한 독립자금을 후원하던 최운산, 최재형 같은 지도자들이 큰 역할을 했습니다. 항구에서 하역 일을 하며 어렵게 번 돈을 내놓는 노동자, 머리에 꽂고 있던 비녀를 내놓는 여인 등 연해주와 만주의 동포들이 모은 피눈물 같은 정성 또한 큰 힘이 되었습니다.     


무기를 구입하고 나서도 해결해야 할 문제는 또 있었죠.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만주에 있는 독립군 부대까지 무기를 나르는 일이습니다. 국경을 넘어야 했고 일본군의 감시도 피해야했습니다. 서울에서 대전까지 해당되는 거리를, 눈에 띄지 않게 밤에만, 그것도 산을 타고 가야하는 험난한 임무. 동포들이 지게에 총과 탄약을 짊어지고 독립군들이 그들을 호위는 방식으로 산을 넘고 강을 건넜습니다. 무기운반 자체가 하나의 전투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독립군은 모신나강 소총에 총탄, 수류탄, 비상식량으로 무장을 했습니다. 여전히 일본군에 비하면 부족하고 열악했지만, 충분히 싸울만한 상태가 되었던 것이죠. 어깨에 둘러매고 있는 총과 총알에 담긴 동포들의 염원을 알기에 절대로 물러설 수 없었습니다.      


이런 과정들을 통해 봉오동 전투가 이루어졌고, 독립신문의 표현대로 독립전쟁 제1회전에서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봉오동 전투는 유인과 매복 전술을 썼지만 단순한 게릴라전이 아니었습니다. 정규군 대 정규군으로 맞붙은 현대전이었죠. 임기응변에 의한 기적 같은 승리는 더더욱 아니었습니다. 이겨 마땅한 승리, 진정한 의미에서 ‘함께 싸운 모두의 승리’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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