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 이후
내 주위를 돌아볼 시간이 많아지면서
물건을 정리하고 비우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몇십 년 동안 굳어진 습관과 성향이
하루아침에 바뀌는 것은 아니기에
고백하자면,
잘 안 입고 안 쓰는
옷이나 잡화 위주로 비우는 정도지
여전히 나는 많은 것을 끌어안고 사는 사람이다.
그중 책은 특히 내가 비우지 못하는 것 중 하나라
생각한 김에 정리하자 마음을 먹었다.
오래 보지 않았던 책은
앞으로도 다시 볼 일이 거의 없을 테니까.
하지만 정작 정리하는 동안 난
‘아, 이 책은 정말 좋았는데. 나중에 또 보고 싶을지도 몰라.’
‘그래도 〇〇〇 작가 팬으로서 이 정도는 다 가지고 있어야 하지 않겠어?’
비울 책을 골라내기보단
비울 수 없는 갖가지 이유만 잔뜩 만들어내고 있었다.
그러다 책장 한구석에 꽂혀 있는
‘아무것도 못 버리는 사람’이라는 책이 눈에 들어왔다.
발행일을 보니 2001년.
그때도 정리를 잘하지 못했었을 난
그 책을 무척 인상 깊게 읽었을 테고
두고 또 봐야지 하며 책장에 잘 꽂아 두었을 것이다.
그리고 20년이 흐르는 동안 그 책을 다시 펴본 적이 있던가?
인생의 잡동사니를 쌓아 두지 말라고 역설하는 책조차
그 긴 세월 동안 잡동사니로 쌓아 두고 살았던 거다.
내가 비우고 버리지 못하는 것이
어디 물건뿐인가.
이루지 못한 일들에 대한 미련,
지난날 하지 않은 일에 대한 후회,
바꿀 수 없는 사람에 대한 집착까지.
또 오래 전 다퉈 이젠 연락하지 않는 친구를 비롯해
몇 년간 연락 한번 하지 않았던 사람들,
아니 앞으로도 연락할 일 없는 사람들의 연락처조차
지우지 않고 핸드폰에 가득 저장해 놓고 있으니 말이다.
물론 게을러 정리하지 못한 탓도 있지만
뭐든 가지고 있어야만 든든하다 생각했던 건 아닌지.
그것이 미련과 후회와 집착이 될 수 있음에도.
물건이든 사람이든 마음의 감정이든 정리가 필요하다.
그래야만 내가 가진 물건과 주위 사람들과 내 감정에
더 충실해질 수 있다.
움켜쥔 것을 놓고 비울 때
역설적이게도 마음은 더 넉넉해진다.
이제 겨우 물건 비우기를 시작했을 뿐이지만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고 기분 좋아지는 것을 봐도 그렇다.
사람과의 관계, 감정의 정리는
훨씬 어려운 일이겠지만
마음은 그만큼 더 충만해지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