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평생영어학습자다

by 이은

올해는 새로 시작한 일들로 약간 정신이 없다. 출산과 양육을 담당하면서 집에만 있다가 어느 정도 아이들이 크자 전업맘도 경제활동을 해야한다는 사회적 압박감에 자의보다는 타의가 큰 선택을 했다. 전업맘은 경제적 보상도, 사회적 지위도 없지만 시간적으로 자유로워서 좋았다. 물론 응급 시에는 그 시간 역시 제일 먼저 내놓아야 하고, 상황을 수습하는데 최선을 다해야만 한다. 세상에 전업맘이라는 직업은 없다. 전업맘은 그저 직함이 없는 무직 기혼 유자녀 여성에게 붙는 호칭일 뿐이다.

여튼 무직 기혼 유자녀 여성인 내게는 시간이 많았고 남들은 은퇴 후에나 탐색하기 시작한다는 여러 취미 생활을 일찍부터 해 오고 있다. 10년 넘게 참여 중인 책모임, 5년 가량 함께 하는 글쓰기 모임, 2년 전에 시작한 달리기와 근력 운동, 가끔씩 찾아 걷는 둘렛길 탐방... 그중 가장 오래된 취미는 영어공부다. 자기소개에 당당히 내세울 직함이나 경력은 없지만 그래도 내게 자랑스러운 이름 하나가 있다면 평생영어학습자가 그것이다. 물론 영어공부를 평생 해왔다는 건 아니고, 남은 평생 계속 하겠다는 의미다.

할 일에 비해 늘 시간이 많았던 내가 올해는 조금 바빴다. 이미 말한 돈 버는 일 때문이다. 일은 내 시간보다는 내 신경을 요구했다. 비가 오면 부채가, 날이 좋으면 우산이 안 팔려서 우울했다. 그래서 올해는 모든 (취미) 생활이 거의 멈춰 있었다. 읽지 않았고, 쓰지 않았고, 공부도 거의 하지 않았다. 그래도 운동은 했다. 운동은 이제 내게 포기할 수 없는 마지막 보루가 되었다.

지난 달 올 한 해 떨어져 버린 교양의 평균값을 부양하기 위해 영어 원서 한 권을 읽기로 결심한다. 일명 물타기 작전이었다. 작년 이 맘 때 사두고 펴보지도 않은 유발 하라리의 책 <넥서스>를 선택, 함께 읽을 친구도 모셔왔다. 500여 페이지의 책을 8회에 나눠 읽고 주 1회 만나 토론하자는 야심찬 계획을 세웠다. 만나서는 총평을 나누고 각자가 정한 2~3페이지를 읽고 해석했다. 이렇게 6회 줌 스터디를 했고, 이제 마무리 스터디만 남아있다. 영어원서를, 그것도 좋아하는 인문사회과학 원서를 번역서까지 들춰가며 자세하게 공부한 건 오래 남을 보람 같다. 하지만 서로 다른 기준과 기대를 가지고 스터디에 참여했기에 나눔으로 가져가는 소득은 상이할 수밖에 없었다. 분명 전에 없는 공부모임이었음에도 더 제대로 하고 싶다는 생각이 커졌다.

어제 난 난생 처음으로 당근에 영어원서 읽기 모임을 만들어 보았다. 첫 책으로 유발 하라리의 <호모 데우스>를 읽으면 좋겠다는 포부도 밝혀두었다. 몇 명이나 모일지 모르겠지만, 만일 모임이 성사된다면 독서 모임이나 글쓰기 모임처럼 오래 가면 좋겠다.

사실 원서읽기 모임에도 몇 번 참여한 적이 있다. 하지만 너무 간절하면 헛발질 하게 된다고 맞지않는 책 선정, 참여율 저조 등으로 오래 이어진 모임이 없었다. 이후 영어공부는 혼자 하는 거라는 기조를 유지해 왔는데, 다시 함께 해 보니 같이 하는 공부의 미덕이 크게 다가왔다. 일단 덜 지루하고, 미루지 않게 된다.

물론 회원 모집이 안 되면 조용히 모임을 삭제하고 평생영어학습자 1인으로 돌아가면 된다. 여튼 남은 12월엔 당근을 들락거리느라 바빠질 예정이다.


#첫시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