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아저씨> 철길 포토 에세이

지안. 편안함에 이르렀나.

by 송승원 기자

<나의 아저씨>를 꽤 좋아한다.


<나의 아저씨>를 볼 때면 삶은 숨이 턱 막히기도, 진절머리가 나기도, 슬픔에 하릴없이 미어지기도 하지만 누군가에게 "괜찮아"라고 말하며 또, 들으며 하루를 살아가는 것이라는 위로를 받는다.

나도 동훈 같은 아저씨가, 좋은 어른이 될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한다. 시시포스처럼 매일 주어지는 무거운 삶을 묵묵히 견디어 내면서도 마모되지 않고 타인에 대한 애정을 잃지 않는 사람이 되고 싶다.


<나의 아저씨>에서 많은 소동과 대화가 이뤄지는 철길이 있다. 서울 용산의 백빈건널목이다. 거리가 참 예뻐서 언젠가는 가봐야겠다고 다짐만 하고 이런저런 이유로 시도하지는 못했다.


2025년 가을, 퇴근길에 <나의 아저씨>에 수록된 노래를 듣다 백빈건널목이 떠올랐고 주말에 시간을 내 찾아가 보기로 했다. 그렇게 카메라를 챙겨 낮부터 저녁까지 몇 시간 동안 주변을 배회하며 풍경을 담았다.

삼색 고양이가 햇볕을 쬐며 휴식을 취하고 있다.


가장 먼저 카메라에 담은 건 길에서 만난 삼색 고양이다. 다가가자 슬쩍 곁눈질을 하더니 관심 없다는 듯 이내 골골 소리를 내며 광합성을 즐긴다. 유동인구가 많은 곳이라 그런지 사람에 익숙한 듯했다.


백빈건널목에는 카메라를 든 사람이 즐비했다. <나의 아저씨>가 방영된 지, 거의 10년이 지났는데도 촬영지를 찾는 행렬을 보며 그 인기를 실감했다.


철길을 한 번 건너 찍은 사진. 고즈넉한 분위기가 마음에 든다.

몇십 분을 가만히 서서 기다리다 보면, 신기하게도 사람들이 한 번에 빠질 때가 있다. 그때를 놓치지 않고 위치를 바꿔가며 수십 번 셔터를 누른 끝에 마음에 드는 사진을 건졌다.


초등학생 때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느낌이 든다. 실내화 가방을 쥐불놀이 하듯 돌려가며 저녁에 방영될 파워레인저 매직포스를 기대하던 어린 시절의 내가 생각난다.


그때 느꼈던 골목의 고요와 편안함 그리고 약간의 권태로움과 미지의 설렘이 잔향처럼 떠오른다. 잊고 살았던 유년시절을 생각하니 더위를 먹은 것처럼 정신이 살짝 아득해진다.


노을이 지기 전 파스텔 톤으로 물들어가는 백빈건널목.


해가 지기 시작하니 사람들이 더 많아진다. 아무래도 <나의 아저씨>에서 백빈 건널목은 주로 밤에 등장했기 때문이리라. 그 시공간을 카메라 렌즈 안에 재현하고 싶었던 것일까.


오래오래 마음에 남는 대사가 있다. 지안이 동훈의 부하가 술자리에서 동훈을 험담하자, 지안이 뺨을 때린다. 이 사실을 전해 들은 동훈이 지안에게 그 이유를 묻자 "아저씨 욕해서요"라고 말한다.


그런 지안에게 동훈은 술을 한잔 사주며 "내가 상처받은 걸 아는 사람 불편해. 보기 싫어. 아무도 모르면 돼. 그러면 아무 일도 아니야. 아무도 모르면 아무 일도 아니야."라고 말한다.


아무리 노력해도 지금의 어려운 상황이 좀처럼 나아지지 않을 때가 있다. 그런 나의 고난이 우연히 드러나지 않기를, 혹여 누군가가 알게 되더라도 모르는 척해주기를 바랄 때가 있었다.


철길 위, 그라데이션으로 색이 달라지는 하늘이 아름답다.


어둑해지니 낮과는 다른 모습이 펼쳐진다. 바로 앞에서 동훈과 지안이 어깨를 한껏 웅크린 채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터덜터덜 걸어갈 것만 같다.


<나의 아저씨>에 수록된 곽진언이 부른 '내 마음에 비친 내 모습'을 듣는다. 가사가 시 같아서 좋다. 긴 세월을 때로는 치열하게 가끔은 방황하며 또, 어리석게 보냈던 이가 담담하게 삶을 읊조리는 듯하다.


원곡자인 유재하는 어떻게 20대에 이런 가사를 쓸 수 있었을까. 머지않은 미래에 아저씨가 됐을 때 이 가사를 듣는다면 지금과는 다른 느낌일까.


"이제와 뒤늦게 무엇을 또 보태려 하나. 귀 기울여 듣지 않고 달리 보면 그만인 것을. 못 그린 내 빈 곳 무엇으로 채워지려나. 차라리 내 마음에 비친 내 모습 그려 가리."


어둠이 완전히 내려앉은 뒤의 백빈건널목은 또 다른 모습이다.


한때 '내 마음에 비친 내 모습'과 함께 내 SNS 프로필을 꾸몄던 사진이다. 구도와 색감을 확인해 볼 요량으로 대충 찍은 사진이었는데 이날 내가 찍은 사진 중 가장 애정하게 됐다.


삼삼오오 산책을 하는 사람들과 가로등의 따듯한 불 빛, 전철의 잔상과 고층 건물과 낮은 주택의 대비가 산만하면서도 정겨운 느낌을 준다.


밤새 걷고 싶게 만드는 풍경이다.


직전 사진보다 카메라의 줌을 조금 당겨 촬영한 사진이다. 푸른색과 녹색 언저리에 속할 가로등 불빛과 황량한 모습에 전혀 다른 느낌을 받는다.


같은 공간이어도 구도와 색온도 등을 어떻게 조정하는지, 날씨와 피사체가 어떻게 개입하는지에 따라 분위기가 달라진다. 통제 가능 요소와 불가능 요소를 조합해 순간을 포착하는 게 사진의 매력이라고 생각한다.

우리의 일상도 그런 게 아닐까. 어떤 구도로, 온도로 바라보는지, 어떤 외부의 상황이 개입하는지에 따라 같은 일상이어도 느끼는 바가 매일 다르다.

변한 건 현상이 아니고 현상을 바라보는 나의 관점이니, 행복이든 불행이든 순간의 감정에 매몰되지 말자는 다짐을 한다.


지안. 편안함에 이르렀나.

<나의 아저씨>가 오래오래 마음에 남는 데는 잔잔한 미소를 머금게 하는 결말이 큰 몫을 차지한다. 동훈과 지안은 자신을 괴롭혀온 모든 상황을 정리하고, 각자 좋은 사람들과 함께한다.


동훈은 길거리에서 새 직장 동료들과 함께 있는 지안을 마주한다. 사람에 대한 경계와 세상에 대한 분노로 가득했던 처음의 모습과는 너무나도 다른 행복한 모습이다.


두 사람은 짧은 인사를 나누고 다음을 기약하며 헤어진다. 동훈은 지안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속으로 묻는다.


"지안. 편안함에 이르렀나."


"네. 네."


편안함을 갈구하며 모진 고난을 겪어온 이들의 이야기는 그렇게 끝이 난다. 지금 이 순간 고난을 겪는 모든 이들이 각자의 편안함에 이를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