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두 번째라 조금 괜찮은 기록
꿈에 한국에 다녀왔다. 최근 이래저래 연락할 일들이 다양하게 있어서였을까, 꿈인지 현실인지 잠깐 고민해 보았다. 텀 방학에 잠깐 한국에 다녀올까 싶었으나 연초에 이미 한 달 푹 쉬고 오기도 했고 열흘에 비행기 삯만 150만 원이니 무리다. 다시 정신을 차리고 책상 앞에 앉았다.
이번주까지 8주 간의 수업은 마무리가 되었고, 다음 주에 발표 하나, 과제 하나면 이번 학기가 끝난다. MBA 두 번째 학기는 그래도 까마득하던 첫 번째 학기보다는 즐겁게 다녔다. 비슷한 처지의 외국인 학생 수가 늘어나기도 했고, 유난히 팀 과제가 많았는데 다행히 좋은 사람들과 한 팀으로 묶여 외롭지 않았다. 물론 내 영어는 아직 고군분투 중이다. 애써 여기 촌놈들 사투리를 못 알아듣는 건 내 문제가 아니라며 넘긴다.
외국인 학생들은 대부분 각자 위치에서 수년간 일을 하다 뉴질랜드로 이주를 꿈꾸며 온 사람들이다. 작년에는 외국인이라 내가 못할 수 있다는 걸 합리화했는데,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사람들도 다 잘하는 걸 보니 더 이상 핑계도 없어진 걸 느낀다.
이번학기에는 지난 학기와 마찬가지로 세 과목을 들었다. 리더십 수업은 수업 전달 도구로 몇 해 전 무한도전으로 알려진 조정을 활용했다. 일주일에 한 번 수업이 있는 날 한 시간씩 여덟 명의 팀원이 노를 저었다. 어릴 때 수술한 어깨로 늘 몸에 대해서 자신이 없는 나지만, 이런 기회가 아니면 평생 타볼 일이 없을 것 같아 신청을 했었다. 수업 첫날 얼떨결에 조장이 되어 팀원을 뽑고 7주 차에 두 팀이 경기를 했다. 외부적인 요인으로 우리 팀이 대차게 졌지만, 해질 무렵 잔잔한 호수에서 배를 탄 건 꽤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다.
필수과목인 마케팅 수업은, 일을 하며 주로 오퍼레이션 쪽에 있던 나에게 다소 어렵게 다가왔다. 회사생활에서 마케팅과 영업은 돈과 물품을 쓰는 팀과 나는 관리하는 팀에 속해 있어 가까워질 수 없었다. 운이 좋게도 전문 마케터와 열정이 가득한 사람들과 한 조가 되었다. 과목에 대한 이해도 언어적으로도 가장 열등생이었지만, 그래도 배울 수 있는 기회였다. 마지막으로 프로젝트 관리는 내가 너무 좋아하는 분야지만 첫 과제를 잘못 이해한 죄로 점수는 내 기대에서 완전히 벗어났다.
학기 중반에는 내 체력이 바닥을 찍었다. 스트레스를 받아 예민해진 위장에 밀가루를 계속 넣었더니 위염이 심하게 왔다. 한 십 년 만에 온 위염에 며칠 내내 죽만 먹었더니 기력이 없고 평소보다 더 까칠해졌다. 연초에 한국에서 찌워온 살이 며칠 만에 사라지는 걸 보았다. 역시 다이어트에는 스트레스와 위장병이 특효약이다. 몸을 회복하고도 밀가루는 가급적 먹지 않는다.
이 외에 구직 고민도 계속되고 있다. 위장병을 앓던 즈음 전 회사 상사로부터 연락이 왔었다. 뉴질랜드 지사에 내 직무가 공석이고 현재 인원을 충원할 계획이라며, 내가 일할 계획이 있는지에 대한 질문이었다. 나의 무쓸모에 대해 한참 고민하던 중이었는데 아침에 눈 뜨자 본 메일에 스프링처럼 몸이 일으켜졌다. 연락 줘서 너무 고맙다는 말을 덧붙이며, 지금 비자로는 일주일에 20시간만 일 할 수 있지만 일을 하고 싶다고 답장을 했다. 뉴질랜드 인사는 호주에서 담당을 하고 있어, 그 담당자에게 내 의견을 전달해 두겠다는 답장을 받았다.
인스타툰을 연재하는 한 작가님의 게시물이 생각났다. 지나온 다리에 불을 지르는 사람이 있는가 하는 반면 언제 돌아갈 수 있으니 마무리를 잘하는 사람이 있다고, 그 작가님이 코로나를 겪는 동안 전 직장에서 오퍼를 받아 눈물을 흘리는 장면이 있었는데 내 상황이 딱 그랬다. 물론 한 달 가까이 지난 지금까지 호주 담당자 연락은 없지만 바닥을 치던 나를 끌어올린 메일이었다. (나중에 담당자로부터 호주에서 사람을 뽑게 되었다는 메일을 받았다)
https://www.instagram.com/p/CjhzeeKrToq/?igshid=YzcxN2Q2NzY0OA==
출처: 인스타그램 외국의 시니
비슷한 시기에 학교 같은 수업을 듣는 사람에게서 제안을 받아 면접도 한 군데 보고 왔다. 제약회사인데 직무에 대한 설명 없이 회사에 찾아가 면접을 봤다. 두 가지 포지션이 있는데, 둘 다 하던 일이라 적당히 면접을 보니 20시간 근무조건이 맘에 들지 않았나 보다. 바로 연락 줄 것처럼 하더니 조용하다.
이제 대략 학교 생활의 1/3이 지나갔다. 남은 기간도 여전히 만만치 않겠지만 이대로 시간이 빨리 지나가버리는 것도 괜히 아쉬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