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질랜드에서 다치면 겪는 일

#18 운전기사로 동네 의원에 다녀온 이야기

by 뉴학생

다행히 아직 뉴질랜드에 와서 어디가 아파 병원에 갈 일이 없었다.


어제 오전 아래층 카페 주방에서 일하던 친구가 칼에 손을 베어 피가 멈추지 않아 운전기사로 가까운 의원을 찾았다. 여기는 흔히 GP라고 불리는 가정의학과는 미리 등록을 하고 필요할 때 예약을 잡고 찾아가는 시스템이고, 그 외에 다치거나 갑자기 아플 때에는 병원 응급실이나 예약 없이 갈 수 있는 의원에 가서 한참을 기다려야 한다. 어제는 차로 5분 거리에 있는 White Cross라는 의원에 갔다. 개인정보를 불러주고 어떻게 다쳤는지, 사업장은 어디인지 정보를 적어서 접수를 했다. ACC라는 상해보험 기준에 부합한 경우 외국인에게도 혜택이 적용되어 개인 부담이 적다고 한다.


접수를 하고 30분 정도 기다려 진료실에 들어갔다. 그때까지만 해도 상처를 살펴보는 사람이 의사인 줄 알았더니, 개인 병력과 상처를 확인한 후 그대로 반창고로 돌돌 말아 의사가 순서대로 불러줄 거라고 했다. 일하다 칼에 베었다고 하니 안전수칙이나 응급처치도 모르냐며 좀 배우고 와야 한다며 갑자기 잔소리를 쏟아내는 통에 기분만 잔뜩 상했다.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진다고, 매일 칼을 잘 쓰다가 삐끗하는 바람에 다쳐 응급처치를 하고도 피가 안 멈춰서 찾아온 건데. 접수창구 직원은 응급처치를 해둔 타월을 떼고 먼지가 날리는 티슈로 상처를 감싸게 하더니, 진료실에 있던 직원은 상처를 보기도 전에 신경질적인 잔소리다. 한국에 가있던 사장님한테 상황 알릴 겸 연락을 했더니 ‘환자를 대하는 자세를 배우고 앉아있으라’ 응징해야 한다고 했다. 손을 다친 친구에게는 난 싸워줄 수 없는 언니라 미안할 뿐.


대기실에 자리가 없으니 차에서 대기하다 오라는 접수창구 직원 말을 듣고 차에 가서 기다렸다. 30분이면 되겠지 싶었는데도 연락이 없어 다시 올라왔더니 앞에 다섯 명 있다던 대기자는 겨우 두 명이 줄어 있었다. 직원한테 잔소리를 듣고 두 시간을 기다려 만난 의사. 다행히 손톱만 잘려 바로 아래 피부가 노출된 정도이고 실제 상처가 크거나 신경을 건드리진 않았다고 했다.


의료용 접착제로 손톱을 붙이고 다음 날 하루는 손에 물이 닿으면 안 된다며, 일을 할 수 없는 컨디션이라는 진단서를 적어주었다. 이 친구가 일하는 곳은 가족 사업이라 진단서 없이 일정 조정을 할 수 있는데, 만약 다른 고용주 밑에서 일을 한다면 다쳐도 쉬는 게 맘대로 되지 않겠다. 그래서인지 의사는 진단서에 처방전을 쥐어 주며 다음날은 꼭 쉬어 가야 그다음부터 손가락 쓰는 게 자유로울 거라 여러 차례 강조했다.


손톱에 의료용 접착제를 붙이고 약을 받는 데까지 세 시간이 넘게 걸렸다. 이 친구가 작년 연말에 충수염으로 병원 응급실 갔을 때 12시간도 넘게 기다렸다고 했는데, 이 정도면 다행이라고 해야 하는 거겠지. 당시 충수염 수술 일정도 두 달 이후로 잡혀 모두가 기겁했었다. 상해보험 ACC에 해당되거나 영주권자 이상의 사람들에게 의료비용이 거의 들지 않는 건 좋은 일이지만 무한정 길어지는 대기로 인해 병을 키울 수 있는 무서운 시스템인 것 같기도 하다.


우리가 의원에 머무르는 동안 그 의원에서 진료를 받은 노숙인이 문 앞에서 담배를 피우고 소란을 일으켜 경찰이 출동했다. 다른 곳으로 이동하라는 경찰 말을 듣지 않고 한참을 난동을 부리다 결국 수갑에 채워져 연행되었다. 출동한 경찰들도 병원 직원들도 지쳐 보였다.


한국에서 치과 진료 한 시간만 기다려도 몸이 뒤틀리는 나였는데, 느림의 나라에서 살게 되었다. 일단 여기서는 병/의원에 갈 일을 안 만드는 게 최고구나 싶은 생각. 소문으로 듣던 걸 간접적으로나마 경험했다. 농담처럼 남편이 “우린 여기서 아프면 안 돼, 얼른 운동하러 가자“고 말할 때면 삐죽거리며 운동 안 갈 핑계를 떠올렸는데 정말 아프거나 다치면 안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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