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고를 털고 마음을 채우다

나는 자영업자입니다

by 시원시원

‘구색.’

자영업자의 세계에서 이 말은 단순한 구성이나 진열이 아니라, 존재 이유 그 자체에 가까웠다.

도매업을 시작한 내게 구색이란,

“그 열쇠 있어요?”라는 질문에

“예, 있습니다.”라고 대답할 수 있는 자신감이자,

그 순간만큼은 진짜 장사꾼이 된 듯한 자부심이었다.

하지만 늘 그렇듯, 세상은 내 이상대로 흘러주지 않았다.

열쇠업이라는 일이 단순히 물건만 채워놓는 게 아니라는 것을

나는 조금 늦게 알았다.

아니, ‘비로소 체감했다’는 말이 더 정확하다.


수지에 매장을 처음 열었을 무렵,

주변은 논밭과 다세대, 주택이 섞인 풍경이었다.

‘구색’이란 단어는 그 시절엔 분명한 의미가 있었다.

정말 다양한 열쇠가 고르게 팔려나갔다.

그땐 구색을 갖춘다는 게 곧 신뢰였고,

신뢰는 천천히 손님으로 되돌아왔다.


하지만 도시가 자라고,

수지,죽전과 마북,동백에 아파트들이 빼곡히 들어서면서

그 풍경도 서서히 변했다.

열쇠 대신 사람들은 번호를 누르기 시작했고,

금속이었던 키는 점차 디지털 신호로 대체되었다.


그런데도 나는 여전히

과거의 구색을 매장 안에 쌓아두고 있었다.

‘언젠가 나가겠지’

‘누군가는 분명 필요하겠지’

그런 막연한 믿음으로 말이다


하지만 현실은 무정했다.

팔리지 않는 열쇠들엔 먼지가 켜켜이 쌓였고,

나는 그 먼지를 털며 스스로에게 말했다.

“그래도 갖고 있어야 장사꾼이지.”


결국 그 열쇠들은 고철로 넘겨졌다.

처음 샀던 가격의 5%.

손에 쥐는 건 작았지만,

그날만큼은 왠지 마음이 조금 가벼워졌다.

내려놓는 데에도 용기가 필요하다는 걸 처음 알았다.


사실 가장 버거운 건 그 구조 자체였다.

손님 하나가 특정 열쇠를 찾으면,

나는 그 하나를 맞추기 위해 100개 묶음을 주문해야 했다.

그리고 99개는 창고에서

“언젠가”라는 이름으로 눌러 앉는다.


손님 한 명을 위한 99개의 무게.

그게 ‘구색’이라는 이름의 진실이었다.


그래서 나는 선택했다.

더 많은 재고를 안고 버티느냐,

아니면 무언가를 덜어내고 새로움을 들이느냐.


결국 4년 전, 나는 구색을 일부 내려놓았다.

악성 재고를 정리하고,

그 자리에 내가 오래전부터 꿈꿨던 작은 카페 공간을 만들었다.


공간은 그대로였지만,

그 안의 공기는 완전히 달라졌다.

철로 만든 열쇠 대신 따뜻한 커피 향이 퍼졌고,

묵직한 재고 대신 사람들의 이야기가 쌓이기 시작했다.


나는 그때 비로소 알게 되었다.

살아남는다는 건 무작정 버티는 게 아니라,

때로는 비워내는 데서 시작된다는 것을 말이다.


이제 나는 ‘없는 게 없어야 한다’는 말을 더 이상 따르지 않는다.

대신 이렇게 되뇐다.

“지금 내게 꼭 필요한 것만 남기자.”


그건 단지 재고 정리가 아니라,

나를 위한 정리였다.


모든 걸 갖추려다 보면

정작 아무것도 제대로 누리지 못하는 순간이 찾아온다.

그래서 요즘 나는 구색보다 균형을 꿈꾼다.


내 매장 한쪽에는 여전히 열쇠가 걸려 있고,

다른 한쪽에서는 오늘도 커피가 내려지고 있다.

그 사이에서 나는 하루하루 균형을 잡는다.

금속과 향기 사이,

생활과 여유 사이,

장사와 삶 사이에서.


구색이 자존심이던 시절을 지나

이젠 내 삶에 어울리는 모양새를 고민하는 시기가 왔다.


그리고 나는 오늘도 자영업자라는 이름으로

한 걸음을 내딛는다.

그 발걸음은 여전히 무겁지만,

그 안에는 분명,

내 삶의 온기가 깃들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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