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자영업자입니다
나의 하루는 새벽 다섯 시에 시작된다. 어둠이 물러가는 그 시간에 눈을 뜨고, 운동을 하고, 짧은 독서를 한다. 그리고 나의 일을 시작한다. 저녁 일곱 시쯤 퇴근을 하고 나면, 밤 아홉 시에서 열 시 사이에 다시 하루를 내려놓는다. 요즘 내 삶은 이 같은 루틴 속에 담담하게 흘러간다.
하지만 나는 안다. 이 고요한 리듬조차 언제든 흔들릴 수 있다는 것을 말이다. 지금의 일상이 오기까지, 나는 많은 ‘제약 없는 것들’을 스스로 버려야만 했다. 그 자유롭던 것들이, 오히려 나를 가장 크게 얽매고 있었으니까.
예전의 나는 아침 7시에 일어났다. 밤늦도록 스마트폰을 보거나, TV에 몰입하며 하루를 마무리했다. 잠자리에 드는 시간은 지금과 비슷했지만, 깊은 잠은 멀기만 했다. 자주 새벽에 깨고, 자잘한 일에도 예민해졌다. 마음이 쉽게 지쳤고, 몸도 함께 무거워졌다. 그렇게 나는, 조금씩 무너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내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산책을 해보는 건 어때요?”
그 말 한마디가 참 오래 맴돌았다. 산책이라... 새벽을 깨우는 일이라니. 평소보다 더 이른 기상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마음이 선뜻 움직이지 않았다. 하지만 한 번쯤은 바꿔보고 싶었다. '작심삼일일지라도, 하루만이라도' 하는 마음으로 다섯 시 알람을 맞춰두고, 평소보다 조금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알람 소리가 울리던 순간, 결심의 힘으로 몸을 일으켰다. 현관문을 열고, 집 앞 산길을 천천히 올랐다. 4월의 새벽 공기는 아직 차가웠고, 숨을 들이쉴 때마다 서늘한 기운이 목을 타고 가슴 깊숙이 스며들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공기가 나를 깨웠다. 정신이 맑아졌고, 어둑한 산길을 걷는 내 모습에 왠지 모를 뿌듯함이 피어올랐다.
어둠은 아직 완전히 걷히지 않았고, 나는 조금 무서웠다. 산길 여기저기서 들리는 개 짖는 소리에 몇 번이고 걸음을 멈췄고, 결국 얼마 가지 않아 다시 돌아섰다. 그렇게 되돌아온 시간은 새벽 5시 40분. 고작 20분 남짓한 산책이었지만, 내 안엔 새로운 바람이 불고 있었다.
다시 이불속으로 숨지 않고, 바로 출근 준비를 했다. 그날은 평소보다 한 시간이나 빠르게 매장에 도착했다.
거리엔 아직 새벽의 빛이 남아 있었고, 주변 가게 사장님들의 무거운 걸음, 청소를 시작하는 손, 그 시간에 출근하는 사람들의 눈빛이 눈에 들어왔다. 그 새벽의 공기엔 이상하게도, ‘살아있음’이 담겨 있었다.
사소한 제약 하나가, 우리를 새롭게 만든다. 평소의 습관이 틀어질 때, 우리는 비로소 ‘변화’라는 문 앞에 선다. 그리고 그 문을 넘으면, 어쩌면 새로운 계절이 우리 안에 피기 시작한다.
“변화는 불편함 속에서 일어난다.”
미셸 오바마의 이 말처럼, 나는 그날 새벽 처음으로 내가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걸 느꼈다.
일상뿐만이 아니었다. 내 업에도 그런 제약이 찾아왔다. 10년 넘게 이어오던 열쇠 도매업이 흔들리기 시작한 것이다. 온라인 판매의 성장, 차량으로 직접 물건을 파는 도매업자들, 가격 경쟁은 치열해졌고, 매장을 유지하는 나에겐 점점 불리한 싸움이 되었다.
그 무렵 나는 결혼도 했고, 이제는 하나보다 둘의 삶을 책임져야 했다. 안정되던 운영 방식이 벽에 부딪혔다. 그제야 나는 주변 소매 사장님들이 내 운영에 실질적인 도움이 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그동안 ‘상도’라는 이름의 굴레 안에서, 나를 너무 많이 포기하고 있었다. 그래서 결심했다. 주변에 양해를 구하고, 기술을 배우기 시작했다. 처음엔 무서웠다. 10년 넘게 지켜온 것이 무너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하지만 그보다 더 두려운 건 지금 이대로 무너지는 나 자신이었다.
이제는 소매 일도 병행하고, 출장도 나간다. 물론 그 사이 걸려오는 손님의 전화에 가슴이 요동치는 날도 있다. 하지만 세상은 그런 것이다. 무언가를 얻기 위해선, 반드시 무언가는 잃게 된다. 그 잃는 것이 다름 아닌 ‘안주’였다면, 나는 기꺼이 그것을 놓는다.
그날 새벽, 나는 단지 산책을 한 것이 아니다. 스스로를 다시 살아가기로 결정한 것이다.
단 20분 남짓의 걸음이었지만, 그 짧은 시간이 내 안의 계절을 바꾸기 시작했다. 그리고 지금도 그 계절은 천천히, 그러나 분명하게 내 안에서 자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