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자영업자입니다.
나는 말을 짧게 한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좋게는 ‘주관이 뚜렷하다’는 평을 듣고, 나쁘게는 ‘단답형’ 혹은 ‘직설적’이라는 소리를 자주 듣는다.
특히 일할 때, 손님에게 제품 설치 후 설명할 때 그 버릇이 슬쩍 고개를 든다.
“이건 이렇게 하시면 되고, 저건 저렇게 하시면 됩니다.”
그리고 마지막 한마디.
“이해되시죠?”
나는 그 말이 친절이라고 생각했다.
혹시라도 이해를 못 했을까 봐, 한 번 더 확인해주는 내 방식의 배려라고 믿었다.
그런데 웃기게도, 손님들의 표정은 점점 굳어갔다.
무언의 찡그림. 말은 없지만 마음이 멀어지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생각해보니 이 말투는 과거 과외를 하던 시절의 유산이다.
“이해되지?”
몇 번이고 반복되는 설명이 짜증스럽던 나는, 이 한마디로 상황을 정리하려 했다.
처음엔 확인의 말이었지만, 나중엔 일종의 ‘경고’가 되어버렸다.
“이해해. 다시 설명 안 해.”
그 말은 결국 상대를 위한 것이 아니라, 나를 편하게 하려는 말이었다.
그 습관이, 이제는 삶의 말투가 되어 있었다.
“이해되죠?”는 내가 만든 말의 벽이었다.
그 벽 너머로 상대가 있는지조차 생각하지 않고, 나는 내 방식의 소통만 되뇌고 있었던 것이다.
얼마 전, 친한 형님과 대화를 하다 그 말이 사고를 쳤다.
형님은 자영업 관련해서 이것저것 물어봤고, 나는 익숙하게 답하며 중간중간 또 말했다.
“이해되시죠?”
그 말을 몇 번 반복하자, 형님의 얼굴이 변했다.
결국, 큰 소리로 말했다.
“그만해라! 안다고 유세 떠는 거야, 뭐야?”
당황한 나는 되물었다.
“제가요?”
“그래, 네가. 계속 이해되냐고 묻잖아.”
형님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그 말 들으니까 내가 무시당하는 기분이 들어.”
그제야 알았다.
내가 한 말의 끝이, 상대에게는 시작도 되기 전에 닫혀버린 문이었다는 걸 말이다.
나는 배려라고 했지만, 상대는 강요로 들었다.
나는 친절한 설명이라고 여겼지만, 상대는 몰아세움이라 느꼈다.
말이란 건 묘하다.
어디에 찍히느냐에 따라 느낌이 전혀 달라진다.
도장처럼 콱 박히면 명확하지만, 눌리지 않은 말은 오해를 낳는다.
그날 이후, 나는 말의 끝을 조금 더 열어두려 노력한다.
“이해되시죠?” 대신
“혹시 더 궁금한 점 있으실까요?”
“제가 너무 빨리 말했죠? 조금 더 천천히 설명드릴게요.”
그리고, 침묵이 오더라도 상대가 생각을 정리하고 말을 꺼낼 때까지 기다려본다.
말의 끝은 내 입이 멈추는 순간이 아니다.
상대의 마음이 시작되는 지점이다.
그걸 놓치면, 좋은 말도 벽이 된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다 하는 게 대화가 아니라,
상대가 듣고 싶은 말을 찾는 게 진짜 소통이다.
살면서 종종 생각한다.
‘내가 이해받고 싶었나, 이해를 강요했나.’
이제는 조금씩 구별할 수 있을 것 같다.
말의 끝에서 마음이 시작된다는 걸, 그제야 알았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