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자영업자입니다
도덕감정론의 저자 애덤 스미스는 이렇게 말했다.
“선행을 실천할 때는 모호한 원칙이라도 문제 될 것 없다.”
“그 원칙들이 보편적이지 않고 나 자신에게만 해당되는 독특한 원칙이어도 상관없다.”
나는 이 문장을 오래 곱씹었다. 그리고 문득 이런 생각에 닿았다. 선행이란, 누구를 위한 것이 아니라 결국 나를 위한 감정일지도 모른다.
선행이란 단어는 명쾌하게 정의 내릴 수 없는 영역이다. 때론 감정의 물결에 따라 흐르기도 하고, 때론 그 순간의 기분에 따라 멈춰 서기도 한다. 그래서 선행을 실천할 때는, 무엇보다 ‘자기만의 원칙’이 필요하다. 그 원칙이 세상에 맞지 않아도, 나의 마음이 납득하고 만족한다면 그걸로 족한 법이다.
내 마음이 흐트러지는 선행이라면 차라리 하지 않는 게 낫다. 도움을 주면서도 머뭇거리게 되고, '정말 필요한 사람일까?'라는 의심이 들기 시작하면, 그 순간부터 선행은 의무가 되어버린다. 선행의 긍정이 마음속에서 부정으로 바뀌는 찰나다.
나는 자영업을 20년 넘게 하고 있다. 세상에는 참 다양한 얼굴의 사람들이 찾아온다. 연말이 가까워지면 유난히 많은 사람들이 ‘도움’을 요청하러 매장에 방문한다. 볼펜을 팔며 불우이웃을 돕는다 하고, 휴지를 사달라며 결식아동을 이야기하는 이들도 있다. 스님이 와서 자비를 구하는 경우도 있었다.
나는 대부분의 경우, 개인이 아닌 단체에 도움을 준다. 단체의 이름으로 오는 이들에게서 더 신뢰가 느껴지기 때문이다. 도움은 마음이 움직여야 가능하고, 신뢰는 그 마음을 열게 해주는 열쇠라 생각한다.
몇 달 전, 퇴근 무렵의 일이다. 한 남자가 매장 문을 열고 들어왔다. 몹시 다급한 표정이었고, 말투엔 절박함이 묻어났다.
“제 아들이 화상을 입었는데 병원비가 없습니다. 실례인 줄 알면서도… 혹시 3만 원만 도와주실 수 있을까요? 내일 꼭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그의 말을 들으며, 나는 왠지 모르게 마음이 흔들렸다. 그에게는 내가 키우는 아이와 비슷한 또래의 아들이 있다는 말이 동화처럼 다가왔다. 나는 지갑에서 조용히 3만 원을 꺼내 그에게 건넸다. 그는 연신 고개를 숙이며 “꼭 갚겠다”라고 말했고, 급하게 매장을 나섰다.
문을 열고 나가려던 그를 불러 세웠다. “잠시만요. 연락처 하나만 남겨주세요.” 그는 잠시 멈칫했고, 작게 떨리는 눈빛을 나에게 보였다. 그리고 말했다.
“010-0000-0000입니다.”
그의 떨림이 마음 한구석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나는 곧 마음을 다잡았다. ‘설마, 그런 거짓을 말할 리 없어.’ 스스로의 행동에 ‘잘했다’는 의미를 부여하며 그를 떠나보냈다.
하지만 그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가 말한 번호 역시 엉뚱한 사람의 것이었다. 그가 남기고 간 건, 3만 원이 아니라 '작은 씁쓸함'이었다.
며칠 뒤, 길에서 그를 우연히 마주쳤다. 멀리서 그가 걸어오는 것을 보고 손을 흔들며 불렀다.
“이봐요!”
그는 나를 보자마자 고개를 돌리고, 반사적으로 달아났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이상하게도 화가 나지 않았다. 오히려 마음이 짠해졌다. 그는 이제, 한동안 나를 의식하며 거리를 걸어야 할 것이다. 자신의 거짓과 마주칠까 봐 두려워하면서 말이다.
돌이켜보면 나도 사람을 쉽게 믿는 성격은 아니다. 배신도 당해봤고, 사기당한 적도 있다. 그래서 요즘은 사람의 말을 들으면 먼저 의심부터 하고 본다. 그런 내가 그날, 왜 그렇게 선뜻 돈을 내어주었을까?
그건, 내 감정이 그의 이야기 속 '아픔'에 동화되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꾸며낸 이야기일지라도, 그 순간 내 마음은 ‘진짜’였다. 그리고 그 진심이 나를 움직였다.
내가 그에게 화를 내지 않았던 이유는, 그의 거짓보다 내 선함을 더 오래 기억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결과가 어찌 되었든, 내가 선택한 그 마음은 선행이었다.
그 마음이 부정당하더라도, 나는 나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는다. 선행이란 누군가를 위한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은 내가 나를 잃지 않기 위한 마음의 결심이다. 나의 선함은, 그 사람의 거짓보다 더 길게 내 안에 남아 있다. 그리고 그걸로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