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화식 서평
상상을 기반으로 하는 대화식 서평입니다.
등장인물
김상운 작가, 시원시원
꿈이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더 생생하게 느껴진다. 방안의 모든 사물들이 새롭다. 누가 언제 사물들을 갖다 놓았을까? 물론 나와 아내가 놓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 이전에 사물들은 어떻게 해서 만들어졌으며 그것이 여기에 놓여있기까지 알 수 없는 힘이 작용한 것은 아닐까?
아무튼 지금 순간만큼은 평소에 내 방이 아닌 다른 공간에 서 있는 내가 보였다.
"이것이 자신을 관찰하는 느낌이려나?"
바람에 흩날리는 낙엽을 잡으려 하는 것처럼 관찰자의 내 모습을 익숙한 공간 속에서 찾으려 애쓰고 있다.
몇 번을 방 주위를 둘러보았다. 점점 익숙한 환경으로 돌아온다. 이윽고 매일매일 생활하던 방으로 돌아왔다.
"어, 이게 아닌데.."
내가 원하는 것을 집착할수록 익숙한 것들이 그것들을 몰아내었다. 더 이상 내 공간에서 관찰자는 없었다.
하지만 아직도 꿈에서 느낀 감정은 사라지지 않았다.
"관찰자로서 자신을 돌아보라"
그 의미가 어떤 것인지 명확히는 알 수 없다.
분명한 것은 익숙한 공간이 다르게 느껴졌다는 것만은 확실히 알았다. 어렴풋이 관찰자가 된다는 것이 이런 것 일 거라 생각했다.
방문을 열고 욕실로 들어갔다. 세면대에 찬물이 얼굴이 닿자 머릿속이 맑아졌다. 고개를 들어 거울을 보자 얼굴의 굴곡에 흐르는 물이 턱에서 떨어졌다. 오른쪽 눈을 찡긋거렸다. 그러자 거울 속 나는 왼쪽 눈을 찡긋거린다. 이번엔 왼쪽 눈을 찡긋거렸다. 역시 거울 속 나는 오른쪽 눈을 찡긋거린다.
서로 마주 보면서" 난 네가 아니야"라는 듯이 거울 속 나는 말하는 것 같았다. 평소 같으면 별생각 없이 거울을 보았을 텐데... 갑자기 웃음이 터졌다. 내가 웃는 소리에 아내가 욕실 문을 열었다.
"무슨 일 있어?"
"아니 없어. 큭큭"
아내는 고개를 흔들더니 욕실 문을 닫았다. 웃음이 끝날 무렵 현실의 감정이 온다. "지금 뭐 하는 거야?"라는 생각에 부끄럽다. 거울 속 나에게 말했다.
"야 넌 나야"
"아무리 애써봐라 넌 나에게서 벗어날 수 없어"
욕실에 나와 아내의 눈치를 보며 소파에 앉았다.
정말 자신을 관찰한다면 어떤 느낌일까?
알고 싶었다. 도대체 관찰자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아침에 만난 감각을 다시 경험하고 싶었다.
관찰자에 대해 누군가는 알고 있을 것이다.
그를 찾아가야 한다. 관찰자가 되어 자신을 봐야 한다며 끊임없이 머릿속을 헤집어 놓았다.
이런 나의 결심은 보이지 않는 힘이 일어난다. 동일한 관념은 서로를 향해 끊임없이 신호를 보낸다. 우리는 그것을 인연이라 부른다.
김상운을 만나다.
관찰자의 뜻을 알기 위해 서점에 들렀다. 책은 수많은 경험을 글로 만든다. 책에는 인간의 모든 것이
저장되어 있다. 그래서 그것을 통해 우리가 살지 않았던 시대를 간접으로 경험할 수도 있다.
서점에 배치된 컴퓨터에 관찰자란 키워드를 검색해 보았다.
관찰의 힘, 관찰자, 3인칭 관찰, 관찰의 기술.... 등등 다양한 책들이 나왔는데 그중에서 '왓칭'이라는 제목이 눈에 들어왔다.
출력 버튼을 눌렀다.
'다열, 자기 계발서 칸에서 두 번째 줄'이 쓰인 종이를 들고 '다열'이 쓰인 곳으로 향했다.
검지로 책들의 제목을 훑어 내려갔다.
'왓칭 신이 부리는 요술'이라는 제목이 눈에 들어왔다. 책을 빼내자 겉면에 노란색 표면에 수많은 검은 점들이 보였다. 그 밑에 하늘색 띠에 '왓칭'이라는 제목이 쓰여있었다.
"세계 최고의 과학자들이 증명해낸 관찰자 효과의 놀라운 비밀"
관찰자가 과학으로 설명이 가능하다니.... 정말로?
흔히 감정이라는 것은 과학으로 설명하기는 힘들다. 왜냐면 명확하지 않다. 확실한 사실이 아니기 때문이다. 관찰자는 더욱이 그러했다. 감정보다 더 상위의 개념이다. 내가 만들어낸 것이 아닌 다른 세계의 그 무엇이기 때문이다.
영혼, 알지만 경험이 없는 것,
그런데 과학으로 검증되었다니, 그것만으로도 흥분되었다.
이때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노란색 위에 있는 까만 점들이 신경이 쓰였다. 가만히 들여다보자 서서히 그 형제가 나타났다. 흠칫 놀랐다. 왜냐면 그 점들은 사람 눈이었기 때문이다.
우리 눈은 어떤 사물을 볼 때 가까이 가면 선명하게 일부분을 관찰할 수 있다. 하지만 사물의 전체의 모습을 볼 수 없다.
신서유기라는 예능이 있다. 지금도 시즌으로 방영되고 있는데 거기서 고깔모자를 거꾸로 해서 얼굴을 가리고 물건을 찾거나 축구를 한 적이 있다. 출연자들은 쌀 정도의 크기의 시야에 두려움에 손으로 허공을 집어가며 걸었다. 바로 앞에 원하는 것이 있지만 알지 못했다.
한곳에 집중을 하면 다른 곳은 보지 못한다. 우리의 시야도 한곳에 집중하면 다른 곳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볼 수 없다. 처음에 점들이 만든 눈의 그림을 보지 못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림이라도 할지라도 의식을 통하면 서로 관념이 통한다. 그래서일까? 내 눈은 다른 곳을 보고 있더라도 그 시선을 느낄 수 있었던 것을 아닐까?
나의 어깨를 두드린다. 고개를 돌려보니 베이지색 코트를 입은 남자가 서있었다. 어디서 본듯한 얼굴이었다. 그렇다. 그는 내가 청소년 때 tv에서 자주 보던 사람이었다. 예전에 그 모습 그대로였다.
'그런데 그가 왜 내 앞을 있지?'
그는 온화한 미소를 가지고 있다. 사람의 미소는 바라보는 이에게 편안함을 준다. 다른 사람이 자신에게 다가오는 걸 꺼린다면 자신의 얼굴을 봐라. 당신은 경계심이 가득한 자신의 얼굴을 볼 것이다.
강한 일직선의 빛이 내 왼쪽 머릿속에서 오른쪽 머릿속으로 빠르게 지나갔다. 난 책의 저자를 보았다. 거기에는 '김상운 지음'이라고 쓰여있었다. 얼굴로 '당신'이냐고 물었다. 그는 어깨를 들썩였다. 페이지를 넘기자 그가 보였다. 그가 고개를 끄덕인다.
우리는 관찰자라는 동일한 관념에 의해 서점에서 만났다. 그가 어떤 이유에서 서점에 왔는지 몰라도 그의 관념과 내 관념은 이어져 있었다. 눈에 보이는 것만이 사실은 아니다. 우리의 감정도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내 안의 감정이 얼굴과 몸짓 그리고 목소리로 나타난다.
얼마 전 꿈을 꾸었다. 내 안에 연결되어 있는 수많은 선들이 있었다. 선들은 각각 빛을 새기가 달랐다.
어떤 선은 강한 빛을, 어떤 선은 약한 빛이 나왔다. 하지만 대부분의 선들은 빛이 나지 않았다. 참 이상한 꿈이었다. 잠에서 일어나 한참을 그 꿈에 대해 생각을 했다.
내 안의 선들은 아마도 나를 둘러싸고 있는 인연들이라 생각한다. 강한 빛이 나는 선들은 지금 내가 만나는 사람들이다. 희미한 빛을 가진 선은 스쳐가는 사람들이다. 빛이 없는 선은 앞으로 만들어갈 인연이거나 살면서 한 번도 만나지 못할 인연 일수 있다. 우리가 버스를 탈 때 버스 안에는 이마 많은 사람들이 있다. 내가 버스를 타는 순간 그 안에 모든 사람들과 연결된 선은 희미한 빛이 난다. 혹여 같은 말이라도 오고 간다면 희미한 빛은 좀 더 밝아질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인연이라 부른다. 인연은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거나 나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을 만났을 때 말하는 것은 아니다. 버스 공간에서 있는 사람들조차 아주 커다란 인연이다. 그 속에 있는 누군가는 바로 앞 버스를 놓쳐 탔을 수도 있다. 또 다른 이는 늦게 일어나거나 일찍 일어나서 탔을 수도 있다. 택시가 안 잡혀서 탔을 수도 있고 버스 번호를 잘못 보고 탔을 수도 있다.
자신을 관찰자로 만드는 기술 - 왓칭
나는 고개를 들어 김상운을 바라보았다. 그가 물었다.
"어떤 느낌이 드셨나요?"
"아.... 그러니깐... 그게 말이죠"
명확히 설명하기가 난해했다. 좋다 싫다의 느낌이 아니었다. 잔잔한 물결 속에 물고기가 지나가면서 만든 물의 결 같은 거였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예상이라도 한듯한 끄덕임이었다.
이번엔 내가 물어보았다
"왓칭은 어떤 의미인가요?"
그는 어깨에 걸쳐있는 가방을 바닥에 내려놓고 말했다.
"세상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랍니다"
"안 보이는 부분이 더 많죠"
"하지만 우리는 보이는 부분만을 사실이라 여깁니다"
"왓칭은 관찰자입니다."
"나를 관찰하는 관찰자"
"바로 그것이 왓칭입니다"
관찰자가 왓칭이라는 그의 말에 다시 물어보았다.
"작가님이 말한 관찰자가 우리가 말하는 나를 바라보는 자를 말하는 건가요?"
"관찰자라 하니 조금 어렵게 느껴져서요"
그는 말했다.
"나를 바라보는 것이 왓칭에 전부 이긴 합니다"
"하지만 좀 더 명확한 것이 필요합니다"
"관찰자가 되면 모든 것을 바꿔놓을 수 있습니다"
"자신을 누구로 바라볼 것인가?"
"자신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에 따라 모든 것이 변화가 일어납니다."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다시 의문이 생겼다.
'명확한 것은 또 무엇인가?'
의문에 다시 그에게 물었다.
"명확한 것은 감정을 뜻하는 건가요?"
그는 고개를 흔들었다.
"감정은 일부분이죠"
"우리가 감지할 수 있는 건 고작 오감을 통해 보고, 듣고, 만지는 것 등에 국한됩니다"
"우리는 모르는 건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치부하고 무시해 버리죠"
"심지어 우리 몸뚱이가 두뇌보다 더 똑똑한 지능을 갖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죠"
우리의 행동의 대부분이 머리가 지시하는 대로 생각하는 대로 움직이지 않던가!
그런데 그는 몸이 머리보다 더 나은 지능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머리가 시키는 대로 몸이 움직이는 게 아니었나요?"
내 물음이 예상이라도 한 듯 그는 분명한 어조로 말한다.
"심장을 10초 정도 멈출 수 있나요?"
"아마도 심장은 당신이 멈춘다고 해도 계속 뛸 겁니다"
"멈추면 죽는다는 것을 아는 심장은 두뇌가 아무리 멈추려고 해도 더 높은 지능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두뇌가 시키는 대로 하는 행동이 전부라고 믿기 때문에 우리는 인간의 오감보다 더 섬세한 차원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알 수가 없답니다"
그의 말대로 심장을 아무리 멈추려 애써도 멈추지 않는다. 나의 의지보다 몸은 살아가기 위해 끊임없이 움직인다. 끊임없이 에너지를 생성해 삶을 이어가게 한다. 몸의 에너지 덕분에 두뇌도 살아간다. 행동을 지시하는 건 두뇌이지만 그것을 움직이게 하는 건 몸이 만든 에너지다.
그가 말을 이어갔다
"아인슈타인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우주에는 인간의 상상을 초월하는 거대한 마음이 있다"
"무엇을 뜻할까요?"
난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글쎄요"
그는 말했다.
"이 세상은 내가 원하는 대로, 생각하는 대로 수시로 바뀔 수 있다는 말을 들어 본 적이 있을 겁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그런 일이 흔하게 일어나지 않아요"
"이유는 우리는 대부분 그 무한한 가능성을 제대로 이해하지 않아요"
"누구에게나 가능성은 열려 있지만, 그 가능성을 진심으로 바라보지 못하고 있죠"
"가능성을 닫고 바라보니 가능성이 보이지 않는 것이죠"
모든 자기 계발서에는 가능성을 제시한다. 누구도 할 수 있다고 말하지만 '당신이라서 할 수 있다'라고 말한다.
'내가 어떻게 하겠어?', ' 내가 뭐라고' 라면서 자신의 가능성을 닫아 버린다.
하겠다는 마음보다 해도 되겠어?라는 마음이 우리에겐 익숙하다. 관찰자가 되면 그 익숙함을 벗어던지고 자신의 가능성을 열 수 있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
그의 이야기는 흥미롭다. 가능성을 열면 내가 원하는 일을 다 할 수 있다. 왓칭으로 관찰자가 되면 된다.
그게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안된다는 것도 아니다. 의심하는 순간 가능성은 사라진다.
"어떻게 하면 가능성을 열 수 있나요?"
그는 자신의 손을 심장에 갖다 댄다.
"마음 속입니다"
"마음속은 끓임 없는 수다로 가능성을 열려는 당신을 방해합니다"
"그것은 당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어요"
"아무리 애써도 우리는 생각을 멈출 수가 없죠"
"그래서 생각의 바다에 빠져 살아가다 보니 우리는 ' 생각은 곧 나'라고 착각을 합니다"
"우리의 생각은 주로 얕은 언어로 하는 생각이죠"
"고요한 물에 갑자기 내린 빗방울 때문에 파동이 생기는 것과 같아요"
"물면은 빗방울 때문에 어지럽게 흩어집니다"
"하지만 물속은 고요합니다"
"우리의 마음도 그러합니다"
"마음속 깊은 곳까지 들어가면 얕은 언어가 만든 생각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가 하는 말이 어떤 뜻인지 짐작이 갔다.
마음속 깊은 곳은 고요함이 존재한다. 거기까지 가본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으나, 깨달음에 도달한 사람들은 한결같이 말한다. '고요한 마음을 가져라'
고요한 마음은 지금 마음이라고 믿는 것보다 더 깊은 곳에 존재한다. 지금 가지고 있는 마음으로는 생각의 수다를 물리치기 어렵다. 잡념은 끊임없이 생성된다. 내가 어떤 곳에 있든 무슨 일을 하든지 간에 뜬금없는 생각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점심을 정말 맛없었어', '내일은 뭐 먹을까?'.....
이럴 때 깨달음에 도달한 사람들은 말한다.
"조용히 일어나는 잡념을 바라보면 저절로 사라집니다"
나는 말했다.
"고요한 마음을 가지고 싶어도 잡념이 끊임없이 방해를 합니다."
"명상이 도움이 되지만 이때도 끊임없이 생각들이 일어나요"
"끊임없이 고요한 마음을 얻기 위해 가능성을 열어두어야 하는 것도 알아요"
"언제 한 번은 고요한 마음까지 도달한 것 같았어요"
"잡념이 사라지고 마음의 평온이 오는 것 같았죠"
"'이것이 고요한 마음이구나!'라고 생각하는 순간 잡념이 물밀듯이 들어왔죠"
"그것마저도 잡념이 만든 생각일 뿐이었어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가 말한다.
"의지보다 강한 이미지를 이용하세요"
"이미지요?"
"그렇습니다. "
"롤러코스터를 탄 적이 있나요?"
"네, 젊었을 때는 많이 탔어요"
"처음 탔을 때는 어땠나요?"
"추락할까 봐 겁났었죠"
"실제 그 일이 일어났나요?"
"에이 무슨 말을 하세요, 그랬다면 제가 지금 이 자리에 없었겠죠"
"맞습니다"
"떨어진다는 이미지 때문에 당신은 그때 떨어지지 않으려 손잡이를 강하게 부여잡고 있었을 겁니다"
"눈을 감고 이 순간이 지나길 기도했을 거예요"
"당신이 의지를 강하게 가져갈수록 추락하는 이미지는 더 선명히 다가옵니다"
"그래서 더 심장을 빨리 뛰고 두려움에 빠지죠"
"이미지는 말로 하는 생각보다 강하기 때문입니다"
"이미지가 의지를 완전히 압도하게 되는 것이죠"
"의지는 말로 하는 생각이기 때문에 두되 속에서 맴돌고 있습니다"
"반면 이미지는 어디든 갈 수 있습니다"
"두뇌의 한계에 벗어나 당신이 상상한 그곳으로 자신을 데려다 놓습니다"
"이렇듯 이미지로 고요한 마음을 만들어 보세요"
"당신의 고요한 마음은 어떤 형태인지 이미지로 만들어 보는 겁니다"
"이미지를 통한 당신의 고요한 마음은 가능성을 열어 관찰자의 길로 인도해 줄 겁니다"
관찰자란 누구인가?
관찰자라는 말은 다른 책에서도 들어본 적이 있다. 자신의 마음을 관찰하면 감정의 동요에서 벗어난다.
내가 화가 났을 때 화를 감지하면 처음보다 많이 사그라든다. 감정이 일어나는 것을 막지 못하면 그 감정은 걷잡을 수 없이 커진다. 별것 아닌 일에 큰 싸움이 된 경우를 우리는 대부분 경험을 해본 적이 있다. 감정이 일어난 후에 ' 내가 왜 그랬을까'하는 자책을 한다. 감정을 통제 못해서, 생각이 만들어낸 잡념이다.
관찰자는 제삼자의 눈으로 자신을 바라본다. 나와 다른 나를 통해 바라본다. 나와 다른 나? , 그것이 가능할까? 믿지 못한다면 그의 말에 좀 더 귀를 기울여 보자
나는 그에게 묻는다.
"작가님 관찰자는 누구입니까?"
"혹시 마음속의 나입니까?"
"나를 남처럼 바라볼 수 있는 관찰자는 대체 누구입니까?"
그를 말한다.
"마음속의 나라고 생각하시는군요"
"그러면 마음속의 나는 누구라고 생각하나요?"
그의 물음에 어렴풋이 떠오르는 존재가 있었다.
확신이 들지 않아 작게 말했다.
"영... 혼..."
그가 자신의 무릎은 친다.
"맞습니다. 바로 영혼이죠"
"그럼 영혼은 어디에 있을까요?"
"당연히 마음속이죠"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시나요?"
"사람이 죽으면 영혼이 나온다는 사실은 누구나 알잖아요"
"그게 사실인지 어떻게 알죠?"
"직접 보셨나요?"
"본 건 아니지만 길가는 사람을 붙잡고 물어봐도 영혼은 자기 안에 있다고 말할걸요"
나의 생각은 틀림이 없다고 확신했다.
점점 목소리가 커져갔다.
"그럼 작가님은 영혼이 외부에 있다고 생각하시는 건가요?"
그는 당연하다는듯한 얼굴로 말했다.
"영혼은 두뇌의 밖에 있습니다"
"관찰자가 나를 남처럼 바라볼 수 있는 것도, 넓게 바라볼수록 지능이 높아지는 것도, 지능이 우주에서 흘러나오는 것도 모두 완벽한 지능을 가진 영혼이 두뇌 밖의 우주에 퍼져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제 말에 당신은 황당한 소리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육신 속에 갇혀 살아왔기에 이렇게 반응할지도 모르죠"
" 하지만 영혼이 두뇌 밖의 우주에 퍼져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깨닫는 순간 우리는 비좁은 육신의 한계에서 벗어나 더욱 폭넓은 변화를 겪게 될 겁니다"
나는 그의 말을 믿을 수 없었다. 영혼이 내 안이 아니라 밖에 있다니....
도대체 무슨 근거로 그는 이런 말을 하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작가님의 말이 사실이라면 과학적으로 증명된 사실이 있나요?"
"물론이죠"
"예전에 미국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아마 뉴스에서나 라디오에서 들었던 적이 있을 겁니다"
"한 청년이 깊은 계곡을 등반하다가 손이 바위에 짓눌린 사건이 있었습니다"
"들어본 적이 있는 것 같네요"
"닷새 동안 아무리 손을 빼내려 해 보았지만 허사였습니다"
"청년은 손을 빼내지 못하면 죽는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처음에는 죽음에 공포를 느꼈지만 죽음을 받아들인 순간 마음에 평화를 느꼈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바라보는 또 다른 자신을 만났습니다"
"청년이 말하길 ' 제 육신을 바라보는 또 다른 나, 그게 바로 제 영혼이었어요'"
"한쪽 팔이 사라진다 해도 영혼은 줄어들지 않아요"
"'진정한 나'는 육신 속에 들어 있는 게 아닙니다"
"청년은 자신이 팔 이상의 존재라고 자신을 바라보자 손을 잘라낼 용기가 생겼다고 합니다"
"청년은 말했습니다"
"저는 제 손목을 잘라내는 게 너무나 행복했습니다. 미래에 일어날 모든 기쁨과 행복의 순간들이 걷잡을 수없이 밀려들어왔어요, 모든 걸 누릴 수 있다는 생각 때문에 통증을 느낄 겨를도 없었어요"
"몸속의 나가 아닌 몸밖의 나를 깨닫는 순간이었죠"
어렴풋이 기억이 난다. 그 당시에 '자신을 손목을 자르면서 그 고통을 어떻게 참았을까? 나는 절대 못할 거야'
그런 궁금증을 가졌었다. 그에 말을 듣고 보니 이해가 되었다.
"완전히 작가님의 말을 다 받아들일 순 없어요"
"하지만 작가님이 말한 영혼이 그런 것이라면 정말로 제가 원하는 일은 다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내 안의 존재보다 외부의 내가 존재한다면 제가 원하는 방향으로 이끌어 줄 것 같아요"
그는 말한다.
"능력의 크기는 단지 '나'를 어떻게 정의하느냐가 결정해요"
"내 모든 능력은 내 육신 속에 들어 있다고 믿는 사람은 그 한계를 벗어날 수 없어요"
"반면 ' 나는 우주만큼 무한한 존재'라고 바라보면 능력도 무한하게 쏟아져 나온답니다"
"단순한 시각의 차이로 인생이 갈리는 거죠"
"육신과 영혼은 늘 숨바꼭질을 합니다"
"육신이 눈을 뜨면 영혼이 잠들고, 영혼이 눈을 뜨면 육신이 잠들죠"
"동시에 두 가지를 바라볼 수는 없습니다"
"바로 상보성의 원리 때문입니다"
"아인슈타인은 말하죠"
"영혼에 눈뜨고 살면 기적 같은 나날이 꼬리를 문다"
"나를 타인처럼 바라보며 살아보세요"
"영혼에 눈뜨는 가장 쉬운 방법은 나를 남의 눈으로 깊이 바라보는 겁니다"
"하지만 육신의 눈은 자신을 남처럼 바라볼 수 없어요"
"평소에 자신의 얼굴조차 바라볼 수 없는 육신의 눈은 거울을 통해 나를 남으로 바라볼 수 있습니다"
"오늘 거울에 보이는 자신을 바라보세요"
"평소보다 다른 내가 보일 겁니다"
"그것을 통해 자신의 마음을 비춰주는 거울을 꺼내 보세요"
"내 마음속의 관찰자가 바로 그 거울입니다"
그 말을 남기고 그는 다른 곳을 향해 걸어갔다.
나는 그가 남긴 말을 곱씹으며 자신을 찾기 위한 나만의 거울을 꺼내리라 다짐했다.
왓칭- 신이 부리는 요술의 책을 접하고 많은 생각들이 스쳐갔다. 영혼 그리고 나와 연결된 사람들과 미래에 연결될 사람들까지.....
의지보단 의식이 중요하고 자신이 원하면 외부의 자신이 그 길을 이끌어준다는 사실
몸 안의 나는 한계가 있지만 몸밖의 나는 우주와 연결되어 있어 한계가 없다는 사실
지금까지 본 여러 권의 마음을 다스리는 책들은 공통적으로 말한다.
"자신을 바라보라"
"관찰자가 되어라"
"제삼자의 눈으로.."
나는 영적 깨달음을 얻으려 하지 않는다. 내 물음에 실마리를 찾고 싶을 뿐이다. 마음이 요동칠 때 좀 더 나를 평안하게 하고 싶을 뿐이다. 틀에 박힌 대로 사회가 만들어 놓은 매뉴얼대로 사는 삶에 지쳐 있는 자신에게 평안을 찾길 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