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랫동안 안썼는데 좀 써봅시다.
아마 내 경험은 한국에서 '여성'으로서의 성장과정을 겪어왔다면 어느정도 공감을 가질 수 있는 글이 될 것이다.
이 글을 시작하기 전에 덧붙이고 싶은 구절이 있어 가져와 보았다.
"옷에 달린 레이스 장식을 떼듯이 생활과 마음에서 불필요한 것을 떼어버려야겠다."(전혜린)
얼마 전 알게 된 이 구절이 내가 실천하고자 하는 극도의 실용주의자 되기를 가장 잘 설명해주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2차성징이 좀 빠른 편이었다. 초등학교 4학년때까지는 학교에서 달리기시합 하는 것도 꽤 즐거웠고, 체육시간에 가장 적극적으로 임하는 아이 중 하나였다. 온몸에 기운이 펄펄 넘쳐 학교가 끝나고도 친구들과 한참을 운동장에서 뛰어다니다 피아노 학원으로 가곤 했다. 수도권과 꽤 먼 곳에서 살았기에, 인터넷이 많이 보급되지 않았던 시기여서 가능했던 일이기도 하다.
그러나 2학기가 되자, 뭔가 뛰는 일이 점점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나의 변화를 눈치챈 엄마는 어느날 속옷가게에서 어린이용 브래지어를 사서 '이제부턴 이걸 입어야 한다'고 나에게 주었다. 생전 처음 입어보는 이상한 속옷에 갑갑함을 느꼈고, 예전처럼 체육시간이 즐겁지도, 하교 시간이 훌쩍 지나고도 운동장에 남아 뛰어다닐 마음도 들지 않았다. 나 말고도 몇몇 여자애들이 브래지어를 차기 시작했고, 남자애들이 뒤에서 끈을 잡아당기거나 끈을 보고 놀리는 일이 잦아졌다. 뭐라 표현하기 어려운 수치심과 분노가 치밀어올랐지만, 어른들은 '한창 그럴 나이다', '남자애들은 원래 그렇다' 라고만 말하며 아무런 제지를 하지 않았다.
5학년이 되자 정혈이 시작되었다. 5월의 어느날 아침, 눈을 떴는데 속옷에 붉은 피가 묻어있었다. 어디선가 들어왔던 '생리'라는 게 나에게도 찾아왔음을 직감적으로 깨닫고, 엄마에게 슬쩍 속옷을 보여주었다. 삼남매였던 우리집은 아침이 꽤 떠들썩한 편이었다. 막내를 차에 태워 유치원에 보내고, 초등학교를 다니는 나와 둘째를 밥을 먹여 학교를 보내야하는 우리집의 아침은 절대 평화로울 수 없었다. 그러나 그날만큼은 엄마가 나에게 진지하게 각을 잡고, '이제 너는 아이를 가질 수 있는 소중한 몸이 되었다, 생리를 시작하면 생리대를 써야 한다'고 조곤조곤 이야기를 해 주었다. 삼남매를 기르느라 억척스럽다는 표현이 더 잘 어울렸을 평소 엄마의 모습이 아니었기에, 뭔가 중요한 일이라는 걸 직감했다. 가슴이 아파오면서 자꾸만 커져갔고 엄마는 그런 나를 보며 나에게 '가슴이 그만 컸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6학년이 되었다. 그 전까지 나는 음악시간을 제일 좋아했다. 노래부르는 걸 정말 좋아했기 때문이다. 교회나 학교, 음악학원에서 노래를 부를 기회가 있으면 선생님들은 꼭 나를 시켰다. 어디 앞에 나가서 노래부르는 일이 정말 많았고 대회도 몇번 나갔던 것 같다. 듣기로는 우리 엄마가 딸 음악시키라는 말을 꽤 많이 들었다고 했지만, '내 딸은 재능이 없다'는 말 한마디로 모든 제안을 거절했다. 그런데 6학년이 되자 뭔가 변화가 느껴졌다. 예전처럼 고음이 잘 올라가지도, 예쁜 목소리가 나지도 않았다. 선생님들은 지금이 중요한 시기니까 가요같은건 부르지 말고 동요만 부르고, 웬만하면 목을 아끼라고 했다.
이런 변화가 기분좋기만 한 일은 아니었다. 물론 선생님이나 엄마는 소중하고 신비한 경험이고 이제 몸을 더욱 아껴야 한다고 말해주었지만, 이런 변화와 그로 인해 내가 처음으로 접하게 된 물건들은 나에게 좋은 감정만을 불러일으키진 않았다. 브래지어와 정혈대는 몸을 옥죄고 조여왔고, 활동 영역을 제한했다. 부르고 싶었던 노래도 맘껏 부르지 못했다. 운동장에서 숨이 터져라 뛰어놀던 아이는 없어진 것만 같았다. 그렇게 중학교를 가고 고등학교를 갔고, 고등학교 2학년 때 갑자기 살이 찌면서 하복단추가 터질 것 같아서 한사이즈 더 큰 옷을 샀어야 했다. 3학년 때는 수능과 입시를 앞두고 극심한 스트레스 탓인지 정혈이 멈췄다.
대학을 왔다. 대학에 오자 소위 이성에게 매력적일 것 같은 스타일이 어떤 것인지 알게 되고, 그러한 시선에 나를 맞추기 시작했다. 엄마가 사준 브래지어가 아니라 용돈으로 소위 말하는 '예쁜 속옷'을 사기 시작했다. 그런 걸 입으면 자신감이 올라가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물론 그런 걸 입으면 저녁 쯤 숨이 막혀오고 갑갑하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그때는 어쩔수 없는 거라고 생각해서 묵묵히 참아왔다. 여대여서 가능한 일이었겠지만 저녁이 되면 아예 브래지어 끈을 풀고 다닌 적도 꽤 많았다.
'너는 체구에 비해 가슴이 크니까 부럽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언제 내 신체를 그렇게 보고 평가하고 무슨 생각을 했기에 내앞에서 그런 말을 하냐고 화를 내겠지만, 그 당시에는 그게 칭찬인 줄로만 알았다.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알량한 자신감이 피어오르고 더욱 매력적으로 보이고 싶다는 생각이 더 심해졌다.
겨울철이 되면 꼭 한번 이상은 체했다. 아무데도 못나가고 죽만 먹으면서 약먹고 버텨야 하는 날이 이어졌다. 심할때는 이틀내내 드러누운 적도 있었다. 그런 나를 보고 엄마는 '니가 나 닮아서 위가 약한가보다. 음식 조심하고 따뜻하게 입고다녀라'라는 말을 했다.
여름방학때 핫팬츠를 가지고 고향에 내려가면 엄마는 기겁을 했지만 난 핫팬츠를 좋아했다. 시원하기도 하고, 다리를 훤히 드러내니 오히려 다리가 짧아보인다는 컴플렉스를 극복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가끔은 기분나쁜 시선이나 중년여성들이 쯧쯔대는 소리를 지나쳐야 하기도 했지만, 아무렇지 않은척 했다. 그런 옷을 입으려 하니 일반 팬티는 입을 수 없었고, 봉제선이 드러나지 않으며 신체를 완전히 감싸지 못하는 짧은 기장의 속옷을 따로 사서 입었어야 했다. 레이스가 달려 있거나 팬티라인을 잡아주는 힘이 없어 무척 간지럽고 불편했지만 그냥 그런 줄 알고 참고 입었다.
정혈을 할 때에는 팬티에 패드를 붙여야 하기 때문에 정혈이 끝날 때 쯤에는 짓물리고 아픈 느낌이 들었고 쓸리고 따끔거리는 느낌으로 걷다가 혹은 그냥 앉아있다가도 깜짝 놀란적이 한두번이 아니다. 그리고 피가 적셔진 눅눅한 패드와 항상 살이 맞붙어있다는 건 불쾌감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그러다 탐폰을 쓰게 되었고 전보다는 나았지만 혹시 샐까봐 팬티라이너를 항상 붙였다.
그렇게 몇년이 지나자 내 몸이 더이상 사람몸뚱아리로 안보이고, 여기는 어떻고 저기는 어떻고, 가만히 내몸을 보다가 내가 나 스스로에 대해 품평질을 해대는 경지에 이르렀다. 내 몸에 맞고 나에게 편한 속옷을 사는게 아니라, 속옷의 사이즈에 맞추어 나를 재단하는 삶을 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우연한 계기로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 친해졌다. 그 중 한명이었던 언니와 동문이라는 걸 알게 되어 따로 연락도 하고 밥도 먹는 사이가 되었다. 우연히 만난 사이였지만 시시콜콜한 이야기까지 나누는 꽤 친한 사이가 되었다. 그러다 속옷 이야기가 나왔는데, 언니는 아예 브래지어를 안입은지 십여년이 된다고 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 묻자, 겨울에는 어차피 옷 두껍게 입어서 티안나고 여름에는 브라렛을 입거나 니플패치를 붙이면 된다고 했다. 어차피 갑갑한 김에 그 말을 듣고 나도 브래지어를 버리고 브라렛을 샀다. (그런데 이제 브라렛도 비싸서 안 사고 그냥 무인양품 같은데 가서 남성용 나시 삼;저렴한데 심지어 질도 좋다. 여성용 끈나시와는 비교 절대 불가)
그맘때 즈음, 트위터에서 남성 트렁크를 입어보라는 조언이 여기저기서 올라왔다. 너무 궁금해서 집 가는 길에 마트를 들러 남성용 트렁크 가장 작은 사이즈를 사보았다. 그리고 집에와서 입어봤는데 세상에, 정말 아예 속옷을 안 입은 듯한 느낌에 탄성이 절로 나왔다. 어디 앉을 때 꼭 느껴졌던 팬티라인 부분의 피부가 짓눌리는 일도 전혀 없었다. 어떻게 이렇게까지 편할수 있지??그리고 왜 이걸 여태몰랐지? 조금 화도 났다. 불편한 팬티때문에 고생했던 기억이 한둘이 아닌데 왜 아무도 나에게 남성용 트렁크가 편하다는 말을 안해줬지. 그날 부로 모든 여성용 팬티를 버리고 전부 남성용으로 갈아치웠다. (사실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그 시기에 정혈컵 사용을 시작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정혈컵을 쓰면 패드를 팬티에 붙여서 사용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그 어떠한 상황에서도 여성용 팬티가 전혀 필요하지 않았다.)
그 해를 기점으로 정말 많은 것들이 변하기 시작했다. 예쁘게 꾸미는 것 남들 눈에 더 매력적으로 보이는 것 그 너머에 극도의 편안함이 있다는 것을. 그리고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앞서 말했던 것들이 중요하지 않다는 걸. 결심이 서자 그 다음은 일사천리였다. 왜냐하면 버리는 것 외에는 할 일이 없기 때문이다.
브래지어는 형태를 유지하기 위해 서랍에 넣을 때도 신경써야 하고 빨래 한번 잘못하면 뒤틀리고 하여튼 실용성이라고는 아무짝에도 없는 물건이라는 걸 십수년이 넘는 시간동안 착용해오면서 어렴풋이 깨달았기 때문이다.
팬티도 마찬가지다. 속옷으로의 기능을 제대로 하는건 면팬티 몇개밖에 없었고 장식성이 들어가면 무조건 불쾌감이 들었다. 아무리 편한 면팬티라도 살이 조금만 찌면 갑갑한 느낌이 들어 한사이즈 큰 걸로 세트를 다시 사야 했다. 이런 불편함이 필수가 아니었고 다른 선택지를 선택한 사람들이 있다는 걸 알자마자 서랍장을 더욱 편하고 실용적인 제품들로 채우게 되었다. 브래지어 대신 땀 흡수가 잘되는 작은사이즈 남성용 면 나시를 세트로 샀고, 트렁크 3개를 만원도 안되는 가격에 살 수 있으니, 여성용 속옷보다 훨씬 저렴하게 많은 수량을 장만할 수 있었다. 나는 이때까지 더 비싼돈을 들여, 내 돈으로 불편함을 사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사계절 다 좋지만 여름에는 정말 엄청난 해방감이 느껴졌다. 여름이 되면 속옷에 땀이 차게 마련인데 몸을 조이던 속옷들이 사라지니 불쾌감이 상당부분 사라졌다. 트렁크는 살이 좀 붙거나 빠져도 몸을 넉넉하게 감싸주는 품이 있기 때문에 전혀 불편함이 없다. 살이 빠지고 찌는 것에 따라 새로 사거나 버릴 필요도 없었다. 자연스레 돈이 굉장히 많이 아껴졌다. 겨울에는 꼭 한두번씩 체하는 일이 사라졌다. 나는 내가 소화기관이 안 좋은 것으로만 알고 있었고 또 겨울이 오면 으레 체하겠거니, 하고 생각했다. 그러다보니 아침에 탈이 나서 갑자기 휴가를 쓰는 일이 거의 없어졌다. 덕분에 휴가 일정도 훨씬 계획있게 쓸 수 있게 되었다.
정말 내밀한 이야기까지 포함되어 있지만 이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혹시 당신도 다른 선택지가 있었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면, 그리고 혹시 다른 선택지가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고민하고 있다면, 이젠 값비싼 불편함을 버려도 좋다는 용기를 주고 싶었다. 속옷은 남들이 볼 일이 거의 없지만, 고향에 내려가 속옷을 빨래하고 널때 처음에는 엄마도 기겁을 했다. 그렇지만, 내가 편하다는데 무슨 상관이야?의 투로 나가자 엄마도 곧 수긍하고, 나를 위해 편한 트렁크를 챙겨주기까지 이르랐다.
엄마는 평생을 불편함에 돈을 지불하며 살아왔을 것이다. 평생 브래지어와 여성용팬티, 정혈패드를 소비해가며 살았을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이걸 바꾸고 싶다. 여성도 얼마든지 저렴하고 편한 속옷을 입을 권리가 있다는 것을. 그리고 이게 정말 작은 것처럼 보이지만 삶을 바꾸고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는 것을 여러분들에게 알려주고 싶다. 우리에겐 값비싼 불편함이 아닌 다른 선택지를 선택할 권리가 분명히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