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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ynthia Mar 24. 2019

사실 나도 히어로물 좋아해

캡틴 마블, 어른한테도 참 좋은데 설명을 못하겠네

예전에 <헌터걸> 리뷰를 할때도 썼던 표현인데, '내가 만약 이런 작품을 좀 더 어릴 때 봤으면 내 인생이 어떻게 바뀌었을까?'라는 질문을 스스로 던져본 적이 있었다. 캡틴 마블을 보면서도 똑같이 이 질문을 스스로에게 계속 던질 수 밖에 없었다.

어릴 땐 내가 영화를 안 좋아하는 줄로만 알았었다. 지방에 살때는 영화관이 근처에 있긴 했지만 블록버스터 급의 영화만을 상영하던 프렌차이즈 영화관이었고, 지금처럼 정보를 얻기도 쉽지 않은데다 시간을 내기 쉽지 않은 수험생 처지였으니, 내가 좋아하는 취향의 영화를 찾거나 볼 생각 자체를 못했었다.

그리고 대학에 와서야 서울에는 '독립영화관'이라는 게 있다는 사실을 알고 그 때부터 그런 류의 영화들을 좀 찾아볼 기회가 생겼다. 그리고 대학도서관 영상자료실? 그런게 있어서 거기서 DVD나 블루레이 같은것들을 무료(라고 쓰고 등록금이라고 읽는다)로 볼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문턱이 닮도록 드나들었다.

특히 프랑스 영화나 독일 영화같이 유럽권 예술 영화에 큰 흥미를 느꼈었고, 한국 및 미국 영화 외에도 세상에는 영화를 찍고 만드는 또 다른 세계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물론 지금도 예술영화 좋아하고 기회가 닿으면 부지런히 보러 다닌다. 그러나 동시에 이는 굉장히 지치고 힘든 길이기도 하다. 간만에 훌륭한 감독을 만났다 하더라도 투자를 못받고 예산이 없어서 다음 영화가 나올 기약이 없다든가, 아니면 고단한 현실에 지쳐 아예 감독의 길을 포기하시는 분들도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내가 좋아하는 영화 내 마음에 쏙 드는 영화를 찾는 것은 너무나 힘든 일이었다. 메가박스 VIPP가 되고도 못 쓴 쿠폰이 허다할 정도였다. 블록버스터 영화는 거의 못보는 신세였다.


마블에서 새로운 시리즈가 나왔다길래, 음 이번에도 영화관 갈일은 없겠다, 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여성 히어로??

게다가 화장기 적은 얼굴??

('없는' 이었다면 가장 좋겠지만 눈화장이 그 정도로 보이려면 얼마나 진하게 해야 하는지, 화장을 해봤던 여성들은 거의 다 알 것이다)

성적대상화 없는 전신수트??

거기에다 이름이 '캡틴' 마블??

90년대 배경??

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이건 안 볼수가 없겠다는 생각을 했다.


마침 회사에서 단체로 보러갈 기회가 생겨 칼퇴를 하고 영화관으로 향했다. 히어로물 보러 가는데 이렇게 설레고 들뜨는 마음은 난생 처음이었다. 어릴 적부터 히어로물에 공감하고 나도 저 히어로처럼 되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한 대상은 단 한명도 없었다. 그 시절 티비에는 전부 치렁치렁한 드레스 혹은 속옷이 보일락말락한 초미니 스커트 착장을 한 요술공주들 뿐이었으니까.

그러나 영화가 시작되고 이거 뭔가 심상치 않다는 느낌이 들었다. 마블이 정말 작정하긴 했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영화관에 발길을 끊은 큰 이유 중 하나가, 어떠한 방식으로든 여성을 성적대상으로 소비한다는 사실때문이었다. 심지어 여성 원톱 영화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같은 여성으로서 이런 방식으로 여성이 소비되는 것을 도저히 못참겠어서 중도에 포기해버린 영화가 한둘이 아니었다. 예전에 '인생 영화'로 손꼽았던 영화들 중에서도 그런 것들이 없지 않았다. 이 지점이 한번 거슬리기 시작해 버리니 그 다음부터는 돌이킬 수가 없었다.

그러나 캡틴마블은 초대형 블록버스터 급이면서도, 그런 지점들이 느껴지지 않았다는 사실이 너무 신기했다. 어쨌든 대형 영화들의 감독을 비롯한 헤더급들은 거의 남성일테니까.


영화를 보는 내내 가슴이 두근거렸다. 서른 살이 넘었는데도 히어로물을 보고 가슴이 뛸 수 있다고? 그것이 충분히 가능한 사실이라는 것을 캡틴 마블을 보고 깨달았다. 또래 남성들이 히어로물에 그렇게까지 열광하던 심정도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


비어스가 자신의 원래 이름, 원래 직업, 과거에 살던 곳을 찾아가는 과정, 그리고 그 과정 중에서 점점 커지는 스케일, 자신의 잠재능력을 깨닫고 이를 거침없이 발휘할 수 있게 되는 장면까지, 서사 또한 너무나 완벽했다.

그리고 여성이라면 살면서 반드시 느껴보았을 것이고 공감할 수밖에 없는 장면이 하나 있다. 수없는 도전 중에 넘어지고 쓰러지면서 '너는 할 수 없어'라고 가스라이팅 당하던 시절. 그 시절 한번 쓰러지고 나서 다시 도전해 볼 생각도 못하고 눈물을 머금고 돌아서야 했던 기억들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갔다. 그러나 캐롤은 그 모든 것을 딛고 다시 일어섰다. 그 장면을 보자 가슴속에서 무언가가 울컥하고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그 후에는 거칠 것이 없었다. 그 모든 억압들을 다 부숴내고 자신이 가진 능력을 보여주는 씬, 그리고 '아무것도 증명할 필요가 없다'는 완벽한 대사까지.


무의식적으로 '이 험한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내가 이러한 역량을 갖고 있다는 것을 증명해야 한다'는 중압감을 무의식적으로 머릿 속에 갖고 살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남들 눈에 이상해 보이지 않게, 사회에 스며들어 자연스럽게 살아갈 수 있다는 걸 모두에게 '증명'해 보이고 싶던 시절도 있었다. 그러나 그 과정 중에서 나의 나됨을 부정하거나 원하지 않는 행동을 했어야 하는 날들도 아주 많았다. 결국 그러한 생각은 나를 불행 속에 빠뜨렸다.


가장 나답게, 그리고 나 자신을 사랑하고 지켜낼 수 있는 방식으로, 더 이상 '증명'하지 않아도 되는 삶을 살고 싶다. 그러나 우리는 앞으로도 끊임없이 평가받아야 할 것이고, 그러면서 어쩌면 그토록 하기 싫었던 '증명'이라는 것을 어느정도 선에서는 해야 할 일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과정 중에서도 비어스 아니 캐롤이 남겼던 그 말만은 마음 속에서 잊지 않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만약 좀 더 어릴 때 이 영화를 봤으면, 정상성을 '증명'하기 위해 몸부림 치지 않아도 됐을텐데, 내 행동이나 말투로 비난받던 일 때문에 움츠러들 필요도 없었을텐데, 수없이 많은 좌절 앞에서도 '세상에 부정당했다'는 생각으로 우울함에 빠지지 않았어도 됐을텐데.


인터넷에서 보았던 사진에서, 캡틴 마블 수트를 입고 환한 표정으로 브리 라슨의 싸인을 받던 아이의 얼굴이 잊혀지지 않는다. 이 영화를 본 아이들의 미래가 어떻게 될지,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다.


비어스, 아니 캐롤은 나에게도 히어로가 되었다. 서른 살이 넘은 사람에게도 히어로가 생길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러한 존재가 있는 삶을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큰 힘을 주는지,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깨달았기에 캐롤의 등장이 더욱 기쁘다.


앞으로도 불편함 없이 볼 수 있는 히어로물을 더 많이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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