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대학 학생의 특권으로, 공강이나 방과 후, 구석진 서가의 쇼파에서 잠을 청했던 일도 많았다.
지하 1층의 생협에서 먹어치운 컵라면과 부리또와 김밥과 커피가 몇개, 몇잔이었는지는 셀 수도 없다.
새벽 세시에 갑작스런 한기에 오들오들 떨며 못다한 시험공부와 과제를 했던 기억도 아련하다.
그 공간 중에서 가장 좋아했던 곳을 굳이 꼽자면, 000번 서가였다. 문학 서적이 가득한 800번대 서가와 볕좋은 날이면 아주 밝은 햇살이 쏟아져 들어오던 5층의 커다란 창이 있는 서가도 무척 좋아했지만, 000번대 서가는 정말 특별한 곳이었다. 왜냐하면 그 곳은 '책에 대한 책'이 가득한 곳이었기 때문이다. 책을 정말 사랑하는 사람들이 쓴, 책을 정말 사랑하지 않고는 쓸 수 없는 책들. 그런 책들이 가득한 곳이었다. 당시 책을 굉장히 좋아해서 출판사에 들어갈 준비를 하던 나 또한 그런 책들에 푹 빠져 살았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지금은 다른 종류의 책들도 많이 읽는 편이지만, 이 책은 오랜만에 그 시절의 추억을 떠올리게 해 주었다. 영국인 저자가 썼기에 영국의 북숍이 절반가량, 그리고 유럽, 북미, 남미, 아프리카, 오세아니아, 아시아 등지 전세계의 특색있는 북숍들을 소개하고 있다.
이미 너무나도 유명한 파리의 <세익스피어 앤드 컴퍼니>, 제인오스틴도 즐겨 찾았다고 하는 <P & G 북스>같은 기라성같은 서점들로부터, 영국 소도시 곳곳의 작은 서점들, 그리고 세계 곳곳의 서점들의 이야기를 아주 풍부하게 담았다. 이 책은 에세이이다. 즉 픽션이 아닌 실제 사례를 담고 있다. 그런데 그 어떠한 소설보다도 흥미진진하고, 손에 땀을 쥐게 하고, 놀라움을 금치 못하게 하는 이야기들로 가득 차있다.
가만보면 영국은 정말 신기하고 재미있는 나라다. 우리나라로 치면 고창, 의성 등 군 지역 읍이나 면 정도의(기차를 타고 서울에서 몇시간 이동해야 하고 하루에 차도 몇대 다니지 않는) 지방 소도시에서도 북숍들이 오랫동안 명맥을 유지할 수 있는 비결이 뭘까? 그만큼 그 북숍을 사랑하고 즐겨 찾는 사람들이 많다는 의미가 될 것이다. 영국인들은 책 속에 담긴 이야기, 책 속에 담긴 새로운 의미, 자신이 몰랐던 새로운 사실을 찾고 싶어하고, 돈을 지불하기를 아끼지 않는다.
작년 말 <퇴사준비생의 런던>을 읽으며 <골즈보로 북스>라는 책방을 알게 되었다. 이 책방에서는 2만원짜리 고서적을 경매를 붙이거나, 양장으로 책 수리를 하거나, 책에 얽힌 스토리를 알림으로써 가치를 높이는 작업을 통해 200만원에 팔고 있다고 한다. 처음 이 이야기를 접했을 때는, '대체 누가 그런걸 이백만원을 주고 사?'라고 생각했지만, 실제로 영국인들은 그마만큼의 돈을 지불하고 있었다. 책과이야기에 가치를 부여하고, 또 그 값어치를 인정하는 영국인들. 그랬기에 이 나라에서 세익스피어가 나왔고 조앤 롤링이 나왔을 것이다. 이런 문학가들이 생산한 글은 오랜 기간동안 사랑을 받고, 또 끊임없이 재생산되는 생명력을 자랑한다.
또 한가지 흥미로운 것이, 의외로 헌책방 및 고서점 사업을 '수익성'이 있다고 판단하는 경영인들도 있다는 점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천덕꾸러기 취급 받고 있는 사양 산업이지만, 영국에서는 오히려 관광업이나 출판업, 인쇄업등과 연계하여 애초부터 '수익성'있는 사업으로 판단하여 전략적으로 뛰어든 경영인들도 제법 있었다. 결국 이는 튼튼한 소비층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겠지. 영국의 탄탄한 문화적 배경이 참으로 부러워졌다.
그리고 책의 반은 영국 밖 세계의 서점 이야기에 할애했다. 세계의 책방 이야기를 읽다보면, 그 나라 그 도시의 풍경을 상상하게 된다. 또 그러한 풍경 가운데에 있을 이 책방은 과연 어떤 곳인가, 어떤 사람들이 오고가는가, 하는 궁금증이 절로 스며온다. 지금 당장이라도 그 곳으로 달려가보고 싶은 마음이 든다. 책 한권으로 세계 곳곳을 돌아다니는 기분이다.
외국에서 음악당과 콘서트홀 등을 찾아 음악이나 공연을 접하다보면, 말도 잘 통하지 않고 머리색도 눈동자색도 다르고 사고방식도 생활방식도 다른 이 이방의 사람들과(엄밀히 말하자면, 그 사람들의 입장에서 내가 이방인인 것이지만) '음악'이라는 소재로 공명할 수 있다는 사실이 참으로 신기하게 느껴졌었다.
그리고 이렇게 공통감을 느낄 수 있게 해준 또 하나의 소재는 바로 '책'이었다. 가끔 인심좋은 외국의 도서관들이 아무런 Identification(신분증명)이 되지 않은 일개 관광객에게도 문을 활짝 열어주는 일들이 있었다. 그토록 머나먼 곳에서도 책을 사랑하고 아끼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니, 가슴벅차는 일이다. 그리고 외국 도시에 가면 그 지역의 서점을 꼭 가 본다. 책의 제목이나 내용같은 것은 모두 이해할 수 없다고 해도, 세상에는 정말 다양한 책이 있고, 서점이 있고, 책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실시간으로 체감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