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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루나 Feb 07. 2023

#1 장기하와 얼굴들 <나란히 나란히>

'일방적 사랑'이라는 형용모순

"

나는 너를 등에다가

업고 걸어 보기도 하고

자동차에다가

태워서 달려 보기도 하고

헬리콥터를 빌려

같이 날아다니기도 하고

돛단배를 타고

끝없는 바다를 건너 보기도 했었네

달나라로 가는

우주선을 예약하고 있을 때

나는 깜짝 놀랐어

이미 너는 떠나가고 없었어

한참 동안을 멍하니 앉아서

말도 안 된다 혼잣말 하다

너의 얼굴을 그려 보려는데

이상하게도 잘 떠오르질 않네

"


노래의 도입부부터 누군가에게 뭘 자꾸 해준다는 얘기가 나온다. 상대방이 누구인지에 대한 정보는 전혀 없다. 등에 업었다 차에 태웠다 헬리콥터를 빌리고. 그 스케일이 점점 커져 심지어 달나라 가는 우주선까지 태우려고 하는데. 그제야 옆을 보니 그 대상이 없어졌다. 그걸 뒤늦게 알아차리는 노래 속의 화자. 그 자리에 주저 앉아 이 사실을 받아들일 수가 없다. 그런데 막상 상대방 얼굴이 떠오르지가 않는 이런 당황스러운 상황.


<장자>라는 텍스트의 '노나라 새' 이야기가 떠올랐다. 노나라에 새가 날아들어 임금이 반가운 마음에 술도 권하고 고기도 권하고 풍악을 울리며 그 새를 극진히 대접했는데, 그 새는 아무 것도 먹지 않고 시름시름 앓다가 사흘만에 죽어버렸다는 얘기.


핵심은 심플하다. 상대방의 욕구, 바람, 감정을 고려하지 않은 일방적으로 주어지는 애정과 관심이 폭력이라는 점. 새를 진정 사랑했다면 고기, 술 대신 새모이를 줬어야 한다. 비록 노나라 임금에게는 새모이가 맛이 없었더라도. 노나라 임금은 "내가 좋아하는 것은 상대방도 좋아할 거다."라고 지레짐작하는 우를 범하고 결국 새를 죽음으로까지 몰아넣은 것이다. 이런 비극은 생각보다 주변에서 자주 일어난다.


다시 노랫말로 돌아가면, 인상적인 점은 내가 뭘 해줬을 때 상대방의 반응이 어땠는지 상대방이 누구인지는 전혀 묘사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사실 노래의 화자는 애초에 상대방 반응 쯤이야 안중에 없었을 수 있다. '이걸 하면 분명 좋아하겠지.'하는 확신을 갖고 상대방의 피드백은 유심히 살피지 않은 것이다. 아니면 상대방의 반응이 미지근할 때마다, 마음에 대해 묻기 보다는 '아 이 정도로는 약하구나. 분명 더 스펙타클한 걸 원하는 게 틀림없어.'라고 지레짐작하고 더 큰 이벤트를 꾸몄을 수도 있다. 어느 쪽이었든 결과는, 이별이었다.

 

갓 스무살이 되었을 때 한달 사귀고 헤어졌던 그 친구가 떠올랐다. 연애라는 것도 몇번 안해봤지만 관계 자체에도 심히 서툴었던 그 때의 나. 나는 매번 묻지도 않고 행했다. 그녀가 좋아할 거라고 생각하고 한겨울 새벽 차디찬 어느 빌라의 계단에 쪼그리고 앉아 이어폰을 한 쪽씩 나눠 꽂고 내가 당시 꽂혀 있던 브릿팝 밴드의 락음악을 들려줬었다. 그녀가 좋아할 거라고 생각하고 아침 일찍 체육관으로 불러내 농구를 하고 배드민턴을 쳤다. 그녀도 내가 좋아할 거라 생각하고 밤새 (속이 안 좋아서 토해가며) 발렌타인 기념 초콜렛 한판을 만들었다며 건넸다. 우리는 상대가 일방적으로 들이미는 것에 최소한의 예의로써 반응을 하긴 했지만, 진심으로는 기뻐할 수 없었고 그 무감동이 어쩔 수 없이 상대에게 전해졌을 것이다. 그렇게 서로 지쳐가던 우리의 한 달간의 연애는 자연스레 끝났다. 삼각관계여서 같은 과에서 가장 친했던 동성 친구를 잃으면서까지 사귀기로 한 결정이었기에 그 대가가 매우 컸음에도, 그 관계는 그렇게 허망하게 끝이 났다. 나는 자격지심에 과생활에서 점점 멀어졌다. 큰 수업료를 치렀던 셈이다.


"

나란히 나란히 걸어다닐 걸 그랬어

마주보며 웃을 걸 그랬어

나란히 나란히 걸어다닐 걸 그랬어

자주 손을 잡을 걸 그랬어

가만히 가만히 생각해 볼 걸 그랬어

정말로 네가 뭘 원하는지

나란히 나란히 걸어다닐 걸 그랬어

마지막일 줄 알았다면


어쩌면 나는 결국 네가 정말로 원하는 건

단 한 번도 제대로 해줘본 적이 없는 건지도 몰라

진짜로 그랬는지 아닌지는 이제는 물어볼 수조차 없어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고는 가만히 누워 외로워 하는 것뿐이네

"


뼈저린 후회와 반성의 시간을 갖는 화자. 그나마 다행이다. 떠난 사람을 찾아가고 따라다니는 스토킹까지는 안 갔으니까. 스토킹은 일종의 망상적 신념에 갇혀 있는 상태로 더욱 심각하다. "니가 원하는 걸 다 해줬는데 니가 안 좋아해? 좋아하는 거 다 알아!"라는 위험한 확신에 가득 찬.


이 화자는 뒤늦게 상대가 어땠을지 짐작은 하지만, 이미 떠난 님이기에 물어볼 수도 없고 그야말로 오리무중 속에서 표류하는 수 밖에 없는 상황이다. '나란히' 걷는다는 건 상대방의 속도에 맞춰야 하는 가외의 노력을 요한다. 내 걸음이 빠른지 느린지 스스로 점검하며 상대에게 맞춰야 하는 것이다. 특히나 혼자 가는 길이 아니라 누군가와 '같이' 길을 가는 것이라면. 이런 통렬한 반성의 시간을 가진 화자의 다음 관계는 어땠을까? 아마도 더 나은 사랑을 했었으리라 믿는다. 스무살 이후로 내가 그랬듯이.


노랫말의 비유들을 굳이 남녀관계의 사랑에만 한정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돌봄과 보살핌이 요구되는 모든 관계에 적용 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사랑을 뭐라 명확히 정의할 순 없지만, 받는 사람이 그렇게 느껴야 사랑이다. '일방적 사랑'이라는 것은 앞의 '일방적'이라는 형용사가 꾸미는 '사랑'이라는 명사와의 관계가 성립이 되지 않는 '형용모순'에 해당된다. '일방적 폭력', '일방적 명령'은 말이 되어도 '일방적 사랑' 이라는 건 없는 것이다. 사랑은 상호적이고 양방향이어야 한다. 그래야만 사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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