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해야 산다.
고등학교 동문 모임에서 알게 된 선배들과 술자리를 갖었다.
나보다 거의 스무 살이 많은 분들.
솔직히 내키지 않는 자리였다.
이 나이에 내가 막내 하랴!
약속한 한국식당으로 갔다.
술 주문부터 심상치 않았다.
4명이 자리에 앉자마자 소주 4병을 시켰다.
웨이트리스가 놀란 눈으로
"4병이요?"
"응, 4병..!" 말 짧은 선배. 노인네였다.
소주 4병은 각자 한병 씩 이라며 나눠 갖었다.
나 빼고 모두가 익숙한 듯 각자의 소주를 본인들 잔에 따랐다.
술 따라주고 건배하고 그런 거 없단다.
귀찮게 하지 말고 알아서 마시란다.
이건 또 뭐지?
나도 만만치 않게 술자리 가져 봤지만 이런 룰은 처음이었다.
그 후에는 진짜 알아서 자기의 소주병만 탐하면 됐다.
어색한 자리 탓에 내 소주병이 가장 먼저 비었다.
트잡이 선배의 병은 거의 비어 가고 다른 두 분의 병은 아직 반 이상
남아있었다.
소주 두 병을 새로 시켰다. 한 병은 내 앞으로
다른 한 병은 트잡이 선배에게로 갔다.
최고의 안주거리. 술이 얼큰해지자,
모두가 싫어하는 H선배에 대한 험담이 시작됐다.
딱 여기까지가 즐거웠다.
오늘의 주도(酒道)를 창시(?)한 트잡이 선배가 말이 많아졌다.
처음에는 투잡이(Two Job)로 잘못 들어 Job이 두 개인 선배로 알았다.
알고 보니 그냥 트집잡기를 잘해서 트잡이
타고 있는 삼겹살을 뒤집으니 뒤집 지 말란다.
술 마시러 왔지 고기 뒤집으러 왔냔다.
'그럼 고기가 알아서 지가 뒤집나요?' 입안에서 맴 돈 말이었다.
주문한 찌개가 나왔다.
막내인 내가 그릇에 찌개를 나눠 드렸다.
알아서들 떠먹으면 되는데 왜 나눠주냔다.
'아니 그럼 말하면서 침 좀 튀기지 마시던 가! 뱉네 뱉어!' 이번에도 혼잣말이었다.
누구의 아이디어였는지 모르겠는데 노래방으로 자리를 옮겼다.
트잡이 선배의 활약을 제대로 볼 수 있었다.
찬 맥주 시키고는 맥주가 차서 이가 시리단다.
노래 안 하면 노래 안 한다고..
팝송 부르면 왜 팝송 하냐고..
춤을 추며 노니까
자기 무시하냐고.. 눈치는 빠르십니다.
갑자기 계산서 가져오라고 소리를 질렀다.
고작 30분 정도가 흐른 시간이었다.
주문한 맥주는 딱 두 모금을 마셨고 개봉 전의 맥주가 눈에 선하게
들어오는 때였다.
트잡이 선배가 점원의 손에서 빼앗듯이 계산서를 받아 들었다.
"뭐가 이리 비싸!" 소리를 질렀다.
그와 동시에 모두가 손사래를 치며 점원을 내 보냈다.
트잡이 선배의 손에 있던 계산서는 그 옆의 선배에게 건네 졌다.
"오늘은 내가 쏜다! 더 놀자!" 감사합니다. 선배님..
흐리멍덩한 눈의 트잡이 선배가 전화기를 노려보더니 이번에는 택시를 부른다.
먼저 가려나보다 했는데..
뜨악! 사람 수대로 택시를 4대나 부른다.
급히 취소를 하려 했지만 두대는 올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그게 다행이었다.
택시가 도착하고 나는 그걸 핑계로 그 자리를 벗어났다.
절대로 취할 수 없는 밤이었다.
다음 날, 아내에게 어제 겪었던 몇 시간의 이야기를 했다.
아내는 고등학교 동문 노인들과의 술자리 자체를 이해 못 했다.
처음부터 내키지 않던 자리에 나가 수발들다가 왔냐는 투다.
생각해보니 그러네,
힘이 없어 원치 않는 자리에 나간 거 같아 찝찝하다.
만나면 좋은 사람들과의 술자리도 힘든 상황인데 시간 낭비, 감정 낭비를
왜 했을까?
역시 아내 말이 옳다.
어느 선배에게 물었다.
"트잡이 선배님 원래 그러세요?"
"응, 원래 그래. 모든 게 불만이야.. 본인이 본인도 싫다는 사람이야."
"아니.. 형수님이 다 참아주세요?"
"괜찮아, 10년 전에 이혼당했어!"
젊음이 자연히 체득됐다면,
늙음에는 기술이 필요하다.
노친네를 위한 나라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