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야 보이는 것들
3년 4개월 만에 한국을 방문했다.
비행기를 타기 24시간 전에 코로나 음성 확인서가 필요해,
음성 확인서를 손에 쥐기까지는 모든 게 확실치 않은 여행이었다.
다행이었다.
코로나 음성을 알려 온 이메일이 반갑기만 했다.
이제 내 나라로 갈 수 있다!!
다음 날 비행기를 탔다. 코로나 양성 반응이 나와 비행기를 못 타는
경우를 우려해서 그랬는지 들뜨지 않던 기분이 이제야 슬슬 뜨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보는 어머니에게 무슨 요리를 해 달라고 할까?
친구들과는 어디로 갈까? 요즘 핫하다는 성수동?
서울에 가서 행할 리스트를 긁적이고 있었다.
기상 탓에 조금 연착된다는 기장의 알림이 있었다. 지루해져 영화를 보기 시작했다.
하지만 비행기는 좀처럼 활주로를 벗어나지 못했다.
시간은 흐르기만 했다. 그때까지도 고생의 서막을 몰랐다.
어느덧 활주로 위에서 봄날이라는 영화 한 편을 다 봤다. 상태의 심각성을 조금씩 느끼게 됐다.
활주로에 있던 비행기가 터미널로 돌아왔다.
식사를 나눠줘 밥까지 먹었다.
지상에서 먹는 최초의 기내식이었다.
최대한의 인내심을 발휘하는 어른들과 달리 아기들에게 그런 게 있을 리 없다.
한 아기가 울고 다른 아기가 울고.. 여기저기서 아기가 울고..
안절부절 못 하는 아기의 부모들.. 나는 울고 싶은 심정이 된다.
침묵을 유지하던 기장이 소식을 알려왔다.
대기 시간이 길어져 승무원 교체를 한단다.
항공 수칙에 따라 승무원의 근무 시간은 일정 시간을
초과할 수 없단다. 승객의 안전을 위한 아주 지당한 수칙이다.
승무원 교체가 이루어지면 바로 이륙하겠단다.
그럼 새 승무원은 어디서 오는 걸까? 시간은 얼마나 걸릴까?
5분 대기조 같은 거라도 있나?
그런 걸 알려줄 리 없다.
천재지변 때문에 이륙이 지연되고 비행기 급유를 다시 해야 했고,
이제는 승무원 교체를 기다리는 상황.
지상의 비행기에 앉은 채로 7시간 이상이 흘렀다.
그 누구도 탓할 수 없는 순간에 나를 탓하게 됐다.
왜 하필 이 날을 택했을까?
작년에 삼재가 끝난 게 아니었나?
어릴 적 스치듯 봤던 제임스 딘이 나오는 자이언트라는 영화를 봤다.
언젠가는 다시 보고 싶었던 영화,
길이가 길어 엄두가 안 났던 영화.
그렇게 3시간 21분 길이의 영화를 활주로 위에서 봤다.
그리고 비행기는 지상을 벗어났다.
비행기가 뜨기만 했는데도 기뻤다.
아직도 14시간이 넘는 비행시간이 남아 있다는 건 문제가 아니었다.
갑자기 불려 와 손님을 맞이하고 있는 승무원들이 안쓰러워 보이기까지 했다.
비행기는 나르고 날라 인천 공항에 도착했다.
오후 5시 35분에 도착 예정이었던 비행기는 날을 바꿔 새벽 1시가 넘어 도착했다.
비행기 안으로 들어가서 비행기 밖으로 나올 때까지
약 22시간이 걸렸다.
승객 모두가 제정신이 아닌 것처럼 보였다.
울다 지쳐 버린 아기들.. 더 지쳐 보이는 부모들.
바꿔 타야 할 비행기를 놓쳐 망연자실한 외국인들.
그 와중에 싸우는 부부.
그들을 멍하니 바라보는 나.
그러게 왜 유학은 가 가지고.. 그러게 왜 미국에는 살아가지고..
이 순간에 젊은 날의 원죄가 생각나는 건 우연이 아닐 거다.
한국에 온 걸 실감하듯 입국 수속은 속전속결.
입국장을 벗어나자 마중 나온 동생이 환하게 웃어준다.
새벽에 끌려 나와 웃고 있는 이 사람은 무슨 원죄가 있는 걸까?
동생아 형이 미안하다..
그러게 왜 유학은 가 가지고.. 그러게 왜 미국에는 눌러앉아가지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