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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nry Hong Jan 10. 2023

인종 차별의 결말

그러길래 왜 그러셨나요?

어느 가족 이야기다.

잘 살아 보려고 미국 이민을 오게 됐다.

짧은 영어 때문에 손짓 발짓으로 하루하루를 견디는 날들이었다. 축난 몸을 이끌고 집에 와서는,

딸의 재롱에 웃을 수 있는 것에 감사했다.

이 아이가 있어서 버틸 수 있던 날들.

어렵기만 했던 시기를 거치며 애지중지 키운 딸에게 남자 친구가 생겼단다.

아버지는 교회에서 만났다는 딸의 남자 친구가 그냥 친구려니 하고 신경을 안 썼다. 아니 못 썼다.

자녀들은 어느 정도 컸고 사업으로 바쁜 나날을

보낼 때였다.


딸의 남자 친구가 신경에 거슬리는 일이 생겼다.

아내에게 딸의 남자 친구가 반만 한국 사람이라는 얘기를 들었다.


"그럼 나머지 반은?"


"베트남" 아내의 짧은 대답


아버지가 한국 사람이고 어머니가 베트남 사람이란다. 미국에 살고 있으니 타민족 사위를 상상하긴 했어도 의외였다. 그 많은 나라 중에 하필 베트남

하필....


고민 끝에 헤어지라고 했다. 다른 좋은 남자 만날 거라고 했다.

"정들기 전에 헤어져라!"


반 베트남 사람이라 안된다는 얘기는 차마 못 했다.

딸이 말을 들을 리 없다.


아버지는 딸을 한국 친척 집으로 보냈다. 대학교 학기 중이었지만 그런 건 안중에도 없었다.

몇 달 헤어져 있으면 마음이 바뀌겠지 하는 마음이었다. 딸은 한국에서 3개월 정도를 신나게 놀았다.

한국말이 짧았는데도 숱한 소개팅을 했다. 그러나 그게 끝이었다.

미국으로 돌아와서는 반 한국인을 다시 만났다.

아버지의 고민은 깊어만 갔다. 헤어지게 만들

궁리로 사업에 지장이 생길 정도였다.


"정은 이미 들었어요! 헤어질 수 없어요.."

딸은 단호했다.


밤 잠에 새벽잠까지 설치던,

아버지는 큰 결심을 하게 된다.


"우리 캘리포니아로 이사 간다!"


갑자기?

아내, 딸 그 밑의 아들은 놀라서 어처구니가 없을

지경이다.

뉴욕에서 캘리포니아는 비행기로 5시간이 넘게 걸린다. 영어 쓰는 다른 나라처럼 느껴지는 곳이다.

가까스로 이민 터전을 세웠는데 다시 시작하잔다.



아버지는 옷가게를 정리했다. 어머니는 이사 준비를 했다. 그 가족은 2개월 여만에 뉴욕을 떠났다.

한국 사람의 빨리빨리 DNA는 영원하다.


얼떨결에 시작하게 된 캘리포니아 생활

생각대로 될 리가 없다. 옷가게 자리 찾기가 너무 힘들었고, 둘째를 위한 학교를 찾는 것도 쉽지 않았다.

매일매일이 도전의 연속이었다.

낯 선 학교에 가게 된 아들은 누나 탓을 했고,

딸은 편입할 학교를 찾지 못했다.

그 와중에 여자 친구의 캘리포니아행을 알게 된

남자 친구는 삼일 밤낮을 운전해 캘리포니아로 달려왔다. 남자 친구는 바퀴벌레가 우굴거리는 싸구려 모텔에서 생활하며 여자 친구의 부모 몰래 여자를 만났다.

남자는 결심을 하게 된다.

폴리스 아카데미에 들어가자. 괜찮은 직업을 얻으면 여자 친구의 아버지가

만남을 허락하실지도 모른다.


이쯤 해서 결론을 얘기하자면 그 두 사람은 몇 년 후, 결혼을 했다.

결혼식장에서의 아버지는 울고 또 울어서.. 딸의 가슴에 못 박는 일을 잊지 않으셨다.

결혼한 두 사람은 딸과 아들을 두었다.

할아버지는 더 이상 울지 않고 손주들 자랑으로

매일이 즐겁다.


결혼을 결사 반대하던 아버지가 결혼을 승낙한 이유는 자식을 이길 수 없다는 깨달음 때문이었다.

그리고 딸의 남자 친구가 싫었던 이유가 너무도 보잘것없었다.

반 한국인이라는 것. 50%가 한국 사람이 아니었다는 이유.


사돈과의 첫 만남에 사위의 아버지가 말씀하셨단다.

결혼 반대의 이유를 잘 알고 있다고.. 말씀 안 하셔도 잘 안다는 내용

예전에 사돈 양반이 베트남 여자와 결혼을

한다고 했을 때 집안에서 난리가 났었단다.

40여 년 전 한국에서 있었던 일이니 상상이 된다.

오죽했으면 미국 이민까지 오시게 됐을까.


반 한국인과의 결혼을 결사 반대하던 아버지는,

내 아내의 이모부다. 반 한국인과 결혼한 여자는

아내의 사촌 언니다.

지금은 금슬 좋게 잘 살고 있는 모습이 너무 보기 좋다. 사위는 여름마다 캠핑카로 장인, 장모를 모시고 여행을 떠난다.

부모의 사위 칭찬이 이어지기 일쑤다.


장모님과 이모님


어엿한 경찰 간부가 된 사위가 어느 날 이모부에게 질문을 했단다.

어눌한 한국말로 "아버지 그때 제가 왜 그렇게 싫으셨어요?"

이모부는 아무 말씀도 할 수 없으셨단다.

어색한 미소로 궁핍한 변명을 대신했다.


이야기는 이렇게 끝나지 않는다.

노총각으로 늙던 이모부의 아들, 내 아내의 사촌 오빠가 부모님께 인사시키려 데려 온 여자가 베트남 여자란다.

이번에는 반 베트남도 아니다.

미국에 베트남 인구가 많은 것도 아닌데 희한한 인연이긴 하다.

아무튼 곧 상견례가 있을 예정이라는데,

상견례에 나간 이모부의 얼굴이 궁금해진다.


아니 그러길래 그때 왜 그러셨어요?


사람 인연이라는 것, 누구도 알 수 없다는 흔한 말

그 말을 되새기게 된다.

그 어떤 인연도 함부로 하면 안 될 일이다.


그런데 이쯤 되면 이모부께서 베트남 친선 대사 같은 거라도 해야 되는 거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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