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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nry Hong Mar 07. 2023

어느 날 극장에서

그놈이 아닌 그 아이

합격만 하면 그만이었던 고등학교 입학시험이 끝났다. 

중3 겨울방학, 고등학교 입학까지 긴 휴식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영화에 대한 굶주림 때문일까? 별 다른 할 일이 없어서일까? 틈만 생기면 영화를 보려 했다. 보고 싶은 영화의 광고를 보면, 거리는 상관없었다. 지하철이 지금처럼 없던 당시, 버스를 갈아타는 것 정도는 일도 아니었다. 그저 영화를 보고자 하는 욕구뿐이었다.


그날은 마포의 집과 멀리 떨어진 미아리의 대지 극장까지 가게 됐다. 낯선 곳이었다.

비장한 각오로  영화가 있기에 그곳까지 갔다. 그런데 지금은 제목도 기억나지 않는다.


지루하게 영화가 시작되기를 기다리는데 내 또래보다 조금 어려 보이는 아이가 과자, 사이다, 오징어가

잔뜩 든 목판을 들고 우리 앞에 당당히 섰다.

엿장수 목판 같기도 하고 구두닦이 함 같기도 한 아무튼 아이의 몸집에 비해 커 보이는 목판이었다. 얻어 입었을 것이 확실한 팔길이 안 맞는 잠바는 때로 반들거렸다.


측은해 보이던 아이가 갑자기 반말을 했다.


"야! 니들 사이다 하나 사라!


나와 동원이는 어처구니없는 얼굴로 서로를 마주 보고 그 아이를 올려봤다.


"뭘 봐!.. 내 말 안 들리냐!"


대꾸할 틈도 없이 아이가 우리를 몰아세웠다.

덩치도 조그만 이 놈이 지금 뭐라는 거야.. 웃어야 하나? 깡다구가 있어 보이긴 했다. 그래도 그렇지 밀면 그냥 나동그라질 체구였다.


"야! 돈 없어! 딴 데 가봐. “뭐라 말할지 망설이는 나보다 동원이가 먼저 나섰다.


일단 뭐라 대꾸한 건 좋았는데 그제야 주변을 살피니 우리 보다 덩치가 훨씬 큰 판매원들이 극장을 돌고 있었다. 우리 앞의 조그만 놈에게 믿는 구석이 있었던 거다. 뒤늦게 눈치를 살피는 나와 동원이


상황을 눈치챘는지 조그만 놈이 이제는 눈을 부라린다.

앞 좌석 등받이에 내려놓았던 판매대 한 번, 우리 얼굴 한 번을 쳐다보며,


"야! 무거우니까 사이다 한 병 사라고!" 이제 목소리까지 올라간다.


그런데 문제는 동원이나 나에게는 돈이 없었다는 거다. 사고 싶어도 살 수가 없었다. 집에 돌아갈 버스권 밖에 없었다.


“돈이 없는데.. ”동원이가 좀 전보다 기죽은 목소리로 대답을 했다.


"그걸 믿으라고? 너 죽을래!"


"믿어도 되는데 진짜 돈 없는데.. " 나는 주머니를 까 뒤집는 시늉까지 했다.


조금만 놈이 한숨을 내 쉬었다. 바로 그때 영화를 시작하려는 듯 조명이 약간 어두워졌다.

나는 나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안도의 웃음이었다. 앞에 놈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주먹을 쥐어 내게 보였다.


"너희 영화 끝나고 죽었어!"라는 말을 남기고 그놈은 사라졌다.

그러던가! 말던가! 그런데 그놈이 다시 나타났다. 목에 걸려있던 목판은 안 보였고 스크린에 가까운 비상구 쪽에서 우리를 보고 있었다. 영화의 밝은 장면 때마다 보이는 그놈의 눈은 정말 우리를 죽이려는 듯했다.

어느새 동원이도 그놈을 본 거 같았다.


"야 도망가자!"


"그래도 영화는 봐야지.. 여기까지 왔는데.."


"그럼 자리를 옮기자!"


"그래" 우리는 영화의 어두운 장면에 타이밍을 맞춰 자세를 낮추고 자리를 옮겼다. 되도록이면 그놈의 시선에서 먼 곳. 사람들이 있는 곳. 평일 극장의 듬성듬성한 관객이 아쉽기만 했다.


그런데 그놈은 보통 놈이 아니었다. 어둠 속에서 우릴 찾아 나섰다. 그리고 우릴 찾았다. 나와 동원이는 자리를 다시 옮겼다. 그럼 그놈은 또 우릴 찾았다. 영화가 진행 중이라 차마 우리에게 다가오지는 못하고 우리와 가장 가까운 비상구 암막 커튼에 몸을 기댄 채 우리를 지켜봤다. 이제는 극장 밖으로 도망갈 기회도 놓쳐 버렸다. 나와 동원이 그리고 그놈은 극장 안을 옮겨 다니며 숨바꼭질을 하게 됐다. 이쯤 되니 영화 보는 건 완전 포기. 쫓고 쫓기는 추격신을 극장에서 하게 될 줄이야.. 영화가 끝나지 않기를 바라기만 했다. 그런데 집은 어떻게 가지? 무서움으로 속이 메스꺼웠다.



조마조마 안절부절못하며 극장 안을 누볐다. 끝나지 않기를 바랐던 영화가 끝나고 극장 안이 밝아졌다. 좀 전까지 보이던 그놈이 안 보였다. 기회다 싶어 사람들 사이에 몸을 숨겨 빠져 나가려는 계획을 세웠다.

그런데 그놈은 어디 있는 거지? 추격자가 눈에 안 띄면 더 불안한 심리. 도리도리 주변을 살피며 추격자를 잦고, 어른들의 발걸음에 맞춰 출구를 향했다.

커튼을 제치고 문 밖으로 나올 때  매점 구석에 서 있는 그놈을 봤다. 처음 봤을 때와 같이 그의 목에는 힘겹게 판매대가 걸려있었다. 그의 옆에는 아까 봤던 키 큰 두 명도 함께였다. 나란히 서 있는 3명 그리고 그 앞에는 귀를 덮는 머리에 배 바지를 입은 아저씨가 위압적으로 욕을 해대고 있었다.

뺨이라도 한 대 칠 기세였다. 어쩌면 이미 때렸을지도 모를 상황.

어른들 틈에 묻혀 슬금슬금 곁눈질을 하며 극장을 빠져나오며 살아있음을 확인했다.


무슨 영화를 봤는지도 기억 안 나는 옛날 옛적,

아저씨 손에 걸려 있던 짧은 담배, 고개를 주아리고 바닥만 바라보던 풀 죽은 눈길. 기껏해야 내 또래였을 아이들.

협박을 해서라도 매상을 올려야 했던 소년의

때 묻은 얼굴이 아직도 선명하다.

영화 상영 내내 숨바꼭질을 했으니 무슨 영화였는 지 기억날 리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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