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루 뉴욕 3화
유니온 스퀘어의 서점, 근처에 NYU와 SVA 학교가 있어 항상 학생들로 붐빈다. 나는 이곳의 상쾌함이 좋다.
인터넷 사진으로만 봐오던 선망의 장소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자연스러움이 몸에 밴, 남의 시선이라고는 전혀 의식치 않는 내 또래들에게 경외심마저 들기 때문이다.
4층 아트 섹션에서 책을 둘러보는 것이 좋다. 일단 영어로 된 활자보다 그림 많은 책이 많다. 책 구경을 하다가 창가로 가, 건너편 유니온 스퀘어 파크를 내려다본다. 백인아이를 돌보는 흑인 보모들. 흑인들이 불어를 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아프리카에서 온 흑인들이다. 예전 프랑스 식민지였을 어느 나라에서 뉴욕까지 왔을 사람들. 나와는 아무 인연이 없는 사람들이지만 식민지라는 단어에 공감이 생긴다.
내가 언제 단 한 번이라도 떳떳하게 나의 권리를 주장해 본 적이 있었던가!
2주 전만 해도 난 부천의 노래방에서 일하는 알바 청년이었다. 이 일터, 저 일터에서 해고를 당하고 있을 때,
둘째 형의 소개로 얻은 일자리였다. 내가 일하던 곳은 제법 규모가 컸다. 근처에는 아파트 단지가 들어온다고
공사가 한창이었다. 전국에서 모여들었을 인부들은 일 끝나고 식당에서 반주를 하고는 당연하다는 듯이
노래방에 들리고는 했다.
그 때문에 노래방은 항상 술냄새를 풍겼고 노래방은 평일에도 바빴다. 내가 하는 일 이라고는 손님을 방으로
안내하고, 손님이 방을 비우면 급히 청소를 하는 것이다. 손님이 술이나 안주를 주문하면 술과 일회용 술잔을 준비하고 이모라 불리는 연변 아주머니가 건네주는 안주접시를 손님방에 전달하기만 하면 된다.
단순하고 낮과 밤이 뒤바뀐 생활을 삼 년이나 할 수 있었던 이유가 있었다. 손님 대부분은 공사장 인부이다 보니 남자 손님이 많았고, 그 손님들을 여자들끼리 온 방과 연결해 주면 나는 부수입을 올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술김에 던져주는 손님의 만 원짜리 지폐는 나의 희망이었다. 그들은 현금 자랑은 나의 미래였다.
여자 손님들은 일탈을 꿈꾸며 왔든, 재미 삼아 왔든 합석에 주저함이 없었다.
여자 손님이 뜸할 때는 도우미를 부르면 그만 이었다.
노래방에서 일어나는 부조리는 나와 관계가 없었다. 나는 인부들이 던져주는 팁을 자유의 여신상 모양을 한
저금통에 착실히 모았다.
인사동을 걷다가 우연히 발견한 저금통이었는데 한눈에 마음에 들었다.
대체 어느 나라의 누가 한국의 인사동까지 와서 자유의 여신상 저금통을 살까?라는 생각을 하며 산 저금통이었다. 하지만 내 자유의 여신상이 무거워질수록 미국을 흠모하는 마음은 깊어만 갔다.
밤과 낮이 바뀐 노래방 생활도 미국 시차와 맞아 잘됐다며 스스로를 위로할 수 있었다.
이상하게도 노래방에서의 일들이 현실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늘 술 취한 인간들 사이에 있던 나. 그들이 내뱉은 날숨에 알코올 성분이 있었나 보다. 나는 그들과 같이 호흡했고, 나는 그들과 같이 취해있었다. 취하지 않고는 버티기 힘들었던 시간들. 약을 먹어야 잠을 이룰 수 있던 날들. 헛것과 실체가 불분명했던 날들. 생각하기 싫은 과거. 새로운 인생계획만이 내가 살아 있음을 일깨워 주었다. 그리고 이제 나의 현실은 뉴요커 일 뿐이다.
지금만이 현실인 것이다. 나의 각오를 되새김질하듯 몇 번이고 곱씹는다. 살아볼 만한, 인생을 그려본다.
뉴욕에서는 모든 것이 각오로 무장되는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그리고 매일 마주하는 여자가 생겼다.
오늘도 내 시야로 그녀가 스쳐간다. 언뜻 보아도 일본 사람 같은 화장에 옷차림, 한 갈래로 단단히 묶은 머리, 야무져 보이는 콧날. 엷은 초록색 계열의 화장은 일본풍의 투명한 피부를 돋보이게 했다. 다소 커 보이는 웃옷과 짧은 치마는 언발란스한 멋으로 개성 있어 보였다. 일본 사람? 아니, 한국사람이다.
혼잣말을 한국말로 하는 일본 사람은 없을 테니까.
이 여자와 새 인생을 시작해 보는 걸 상상해본다. 내가 바라고 원하는 인생. 나도 행복해질 권리가 있다.
요 며칠간의 관찰로 내 심증이 확실하다는 것을 믿게 되었다. 자연스럽게 행동하려 하지만 어설퍼 보이는 행동, 서점의 책을 고르는데도 미세하게 떨리는 손 모양새. 그 책들이 마지막 할인이라는 뜻의 빨간 스티커가 붙은
재생지 직전의 책일지라도, 그녀는 책에 대한 어떤 존경심이라도 품은 듯 행동한다.
책 속에 모든 답이 있다고 믿는 바보다.
평일 오후 3시 30분. 3층 커피숍에서 에스컬레이터를 보고 있자면 4층 아트섹션으로 올라가는 그녀를 볼 수 있다. 오늘은 버버리 반코트에 세븐 청바지, 슬쩍슬쩍 보이는 손목의 시계는 까르띠에, 옷 색깔과 어울리는 캔버스 메신저 가방. 가는 발목을 돋보이게 해주는 단화. 항상 4층으로 향하는 그녀는 예술학교 학생이 틀림없다.
나는 다 마신 커피 컵을 쓰레기통에 던져 넣고 4층으로 올라간다. 이제 그녀가 나를 발견할 차례를 기다린다.
나를 곁눈질로 쳐다보는 그녀의 시선이 등 뒤에서 느껴진다. 흥분되는 쾌감. 어떻게 다가가 어떤 식으로 말을 걸지.. 우리의 인연이 어떤 단어로 시작될지를 상상해보는 또 다른 스릴을 느낀다. 그리고..
헬로! 우리의 인연은 헬로로 시작됐다.
헬로! 하며 그녀를 쳐다봤다. 빤히 쳐다보는 그녀의 눈에 나는 당황했다. 나는 다시 묻는다.
"캔 유 스피크 잉글리시?"
"리틀".. 짧은 대답이었다. "유 코리안?" 나는 다시 물었다.
"하프".. 또 다른 짧은 대답. "하프?" 나는 혼잣말처럼 되묻는다. 그리고 그녀의 대답.
"아이 엠 하프 코리안 하프 제패니즈"
"그럼 한국말하시나요?"
"예스!" 기다렸던 대답이었다.
저는 또 외국 분인 줄 알고.. 나는 내가 연극배우 같은 미소를 짓는 것이 우스웠다.
"엄마가 한국분이라 어렸을 적부터 한국말을 배웠어요."
"아아.. 그러시구나.." 더욱 흉내를 내는.. 어울리지 않는 웃음을 지었다.
이렇게 그녀와의 만남은.... 내가 찾던 사람이기를 바라며 시작됐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