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루 뉴욕 4화
쉽게 생각했던 시작만큼 모든 일이 순조롭게 진행됐다. 그녀의 순진한 모습이 걱정스러울 때가 있지만
이런 게 사랑의 감정이라고, 지레짐작되는 시간이었다.
서점 4층에서 그녀를 기다린다. 내 시선은 에스컬레이터를 향하고 있다. 에스컬레이터의 움직임 때문에
비 현실적으로 등장하는 그녀. 그녀의 동그란 이마부터가 보인다. 자신감이 엿보이는 가슴. 날씨와 관계없이 항상 열려있는 재킷. 유난히 길어 보이는 종아리. 이 모든 것이 영화의 슬로모션처럼 서서히 내 눈앞에 나타난다. 꿈같은 상황인데 그녀는 내 쪽으로 걸어와 나와 눈을 마주치고 있다.
나를 보며 미소를 짓는다. 감사한 마음이 절로 든다.
그녀가 산다는 한국의 동네로 짐작 건데, 일본을 오가며 사업을 하신다는 아버지의 재력이 상당하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사실 그녀가 언뜻 말한 한국의 주소를 인터넷으로 찾아봤다.
부잣집 딸로 자라서 일까? 걱정은 다른 세상 사람들 이야기라고 여기며 성장했을까?
순진함이 행동에서 묻어 나온다. 연습으로 단련된 세련됨 하고는 질적으로 다른 순수한
우아함이 그녀에게는 있다.
고전 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자연스러운 우아함.
힘들이지 않고 보여주는 우아함이 그녀에게는 있었다.
그녀와의 만남은 주로 유니언 스퀘어 근처였다. 그녀의 학교가 근처 SVA였고,
내가 다닌다고 했던 NYU도 근처였기에 자연스럽게 만나기 좋은 장소였다.
너무 달아서 구역질이 날 것 같은 도넛을 먹으며 단 맛 얘기를 나누고,
유명하다는 국숫집에서 국수를 먹으며 짜장면의 역사를 얘기한다.
단 맛과 어울리는 맛은 어떤 것이 있을까? 짠맛? 너무 흔하잖아..
짜장면의 발상지가 인천? 아무거나 주워 넣은 음식 재료를 감추기 위해 소스를 검은색으로 했다는
노래방 사장의 말은 맞나?
그녀에게 나의 과거를 숨기고 거짓말을 해서일까?
대화를 나누면서도 다른 생각이 드는 걸 멈출 수 없다.
내가 지금 그녀에게 하고 있는 거짓말들을 하나하나 기억하기가 쉽지 않다. 무척 조심성이 요구된다.
그녀를 만나고 들어온 날은 잠자리에 일찍 들어야만 했다.
정신노동의 강도가 높다는 것을 체험으로 알게 됐다. 하지만 나의 거짓말을 내가 인지 못하는 그날, 그러니까 내 입을 떠난 소리가 나에게 조차 인정될 때까지는 긴장감을 늦추지 말아야 한다.
그녀를 조금씩 알아가던 시간들. 그녀 또한 나를 알아가는 시간들, 하지만
내가 아는 그녀보다 그녀가 나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고 있지는 않을까?
나는 그녀에게 한 가지를 얘기하면.. 부가적인 설명을 곁들여야 했다.
말이 길어진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말이 길어지면 실수는 생긴다.
내가 한 말을 통해 그녀가 알고 있을 나는, 어릴 적부터 영화를 좋아해 어머니의 반대를 무릅쓰고 영화학과를
선택했다. 학교를 마친 후에는 영화 제작사에서 일을 했다.
사람 사는 바닥이 모두 비슷한지 노래방에서 사장이나 취객들과의 에피소드를 영화 제작사나 연예인 얘기로
각색만 조금 하면 내 과거 얘기가 될 수 있었다.
인터넷 기사만 읽으면 누구나 알 수 있는 얘기였지만 그녀는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나에게 집중해 주었다.
뉴욕으로 오게 된 이유는 가방끈 짧은 제작사 사장에게 점점 질려가고 있을 무렵, 영화 쪽일 하는 걸 못마땅해
하시는 어머니의 권유로 MBA 과정을 공부하러 왔다. 하지만 그건 나의 도피를 위한 핑계였고, 어머니 모르게 영화 공부를 계속하고 있다. 공부를 마치고는 영화과 교수가 되는 게 목표이다. 그런데 생활비 보내 주시는 어머니께서 무슨 눈치라도 채셨는지 경영학 공부에 대해 요즘 자주 물으신다.
아버지 사업 물려받을 사람이 나밖에 없다고 누차 말씀하시는데 그것 때문에 요즘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
창피하게도 지금은 생활비를 받고 있어 잔소리를 참고 있다. 고....
데이트 비용으로 지출이 늘어나 은행 예금도 많이 줄었는데, 이다음에 궁핍한 생활을 하게 돼도 어머니와
다툰 후 생활비가 끊겼다는 핑계를 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이토록 그녀와의 관계에 주도 면밀해 있다. 바둑의 고수가 몇 수 앞을 내다보며 수를 쓰듯, 나는 대화를 나누면서도 몇 수를 내다봤다. 그러면서 조심스럽게 내 인생의 묘수를 한 점한 점 채워 나갔다.
그밖에 내가 그녀에게 들려주는 얘기는 캄캄한 강의실에서 영화 보고, 영화를 보고 난 후에 항상 이어지는 열띤 토론 분위기 모습. 아마도 이 정도가 그녀가 알고 있는 나. 그렇다면 나는 그녀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과거가 없는 인간. 인간은 과거를 통해 본인의 존재감을 확인할 수 있다. 살아있음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그 존재를 거부하게 된 나. 나는 이렇게 해서라도 다시 태어나고 싶은 것이다.
그전까지 나와 시간을 보낸 모든 사람이 나에게는 무의미했다. 나 또한 그들에게 무의미한 존재였을 것이다.
무의미이든 아니든 지금 와서 무슨 의미가 있을까?
뉴욕에는 과거 없는 인간 투성이다.
나는 그 인간이 싫다. 과거를 지우고 새롭게 살고 싶은데 방해꾼이 생겼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