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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nry Hong May 10. 2024

선물협정

저 모르시나요?

아무짝에도 쓸데없는 것을 선물로 받았다.

나에게는 이미 두 개나 있는 것을 선물로 받았다.

내가 버리려고 했던 것을 선물로 받은 적도 있다.

액자, 컵, 목도리, 수건, 지갑, 화분, 텀블러까지 다양하다.

화부터 난다. 이 사람이 나를 이렇게 몰라?

나에게는 짐만 되는 물건들. 쓰레기를 선물로 줘?

쓰레기를 고르느라 애썼을 그분의 노고를 생각하면

더 화가 난다.

그래도 내 생각을 한 거리고? 

아니 내 생각을 그 정도밖에 안 한 거야! 

차라리 뭐가 필요한지 물으세요?

어색해서 주는 선물 꼭 받아야 하나?


운동에 투자하지 않는 시간만큼

오래 살 수 있다고 믿는 아내가,

운동용 장갑과 고무줄 몇 개가 들어있는 선물세트를 받았다.

선물 보관소로 이용하는 여행용 캐리어로 직행이다.

운이 좋으면 다른 임자를 만날 테고 아니면 몇 년이고

자리만 차지하고 있을 것이다.



선물에 대해 부정적 생각을 갖고 있는데 선물할 일이 종종 생긴다.

나 같이 삐딱한 시선의 중년들이 옆에 차고 넘친다.

선물을 고르는 일에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고민 끝에 선물권으로 대신하는 경우가 많은데 어디까지가 예의 인지 혹은 예의에 어긋나는지도 모르겠고,

돈 많은 사람에게는 적절치 않다는 생각마저 든다.

그 사람들이 필요한 것? 도대체 모르겠다.

이미 다 갖고 있잖아.

마음으로 됐다고? 내 마음이 편치 않다.

내 마음 편하자고 아무거나 줄 수도 없다.

잘 알지도 못하는데 선물을 준다는 것 어렵기만 하다.


아는 분이 집으로 초대를 해 주셨다.

몇몇 지인의 캐주얼한 만남이라 별생각 없이 참석하게 됐고,

빈 손이 부끄러워 내가 즐겨 마시는 싸구려 와인을 한 병 사갔다. 그런데 알고 보니 이 분이 와인 애호가였다.

김치 냉장고는 없는데 와인 냉장고를 두 개나 갖고 있을 정도였다. 듣도 보도 못 한 와인의 설명이 이어졌고,

내가 사간 와인과는 비교도 안 되는 비싼 와인의 코르크가 열렸다.

손이 부끄러워 가져간 와인에 얼굴이 달아올랐다.

잘 모르는 사람에게 섣불리 준비한 선물이 후회스러웠다.

그동안 지인이라 생각한 사람을 나는 얼굴만 알고 있었던 것이다.


쓰레기를 선물로 받았다는 생각은 과한 면이 있지만,

선물 준 사람이 나를 모르는 것에 대한 섭섭함은 있다.

우리 사이에 본인 마음 편하려고 주는 선물 같은 거 필요 없잖아..

나를 알만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어정쩡한 선물을 받으면 분노가 치미는 이유다.

그게 나 좀 알아 달라는 어리광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우리끼리라도 이러지 말자! 너 나 알잖아..” 정도의

수줍은 하소연.


나와 아내는 서로에게 주는 선물을 끊었다.

생일을 비롯한 어떤 기념일에도 선물을 주고받지 않는다.

대신, 무엇이 건 줄 때면 선물이라고 부른다.

만두가 먹고 싶다는 아내에게 만두를 사다 주며 선물이라고 한다.

떡볶이, 순대, 김밥이 선물이라 불린다.

아내가 대박 세일에서 우연히 발견한 셔츠를

생일 선물이라며 건네줬다.

지금은 5월이고, 내 생일은 9월인데도 말이다.

그래도 밥상 선물은 제 때에 받고 있으니 다행이다.

아내와의 선물협정, 나름 제 역할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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