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루 뉴욕 6화
한국과 일본의 문화.. 어느 중간 지점, 아침에 마시는 찬 우유, 미야자키 하야오의 하얀 머리,
비 내리는 날의 소호 거리, 나얼의 노래들. 약간 녹은 바닐라 아이스크림, 추운 날에 마시는 스텔라 맥주,
하루키의 섹스 묘사, 매 년 생일에 피우는 담배 한 개비, 장강명 작가의 당황한 얼굴,
푸른 하늘의 구름 한 점….
한국 이름 정연, 일본 이름 데루꼬.
정연이 좋아하는 것들을 알아가는 시간이었다. 그녀가 그녀에 대해 말하는 것을 들으며 알아가는 것도 있었고, 내가 관찰과 추측으로 배워가는 것도 있었다. 어느 것이 그녀의 실체와 가까운지는 모르겠다. 그녀의 목소리로 전해지는 내용으로 판단하는 그녀의 모습에는 실체가 없었다. 실체라고 느껴지는 것은, 내 눈을 통해 전해지는 정보밖에 없었다. 아니 그것 밖에는 믿을 수 없었다. 관계의 시작도 끝도 언어이지만 공기 중으로
내뱉자마자 흩어져 버리는 언어는 어차피 실체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녀는 무남독녀 외동딸이다. 어릴 적부터 이뻤을 얼굴. 누가 봐도 아름다운 지금의 얼굴.
어릴 적부터 특별한 대우를 받았을 얼굴... 얼굴 때문에 가려지는 탐스러운 몸매
특별 대우는 그녀에게 기품을 만들어 준다. 자연스럽게 그녀는 행동해야 할 것과 아닌 것들을 터득했을 것이다.
나는 그녀를 통해 배우고 싶은 것이 많다.
세상에는 신데렐라를 꿈꾸는 것이 여자만이 아니라고 생각하며.. 냉소 짓는 일이 자주 있는 날들...
그렇게 냉소적 현실과 희망적 미래의 어중간한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그녀와 같이 5번가에 있는 세인트 페트릭 성당에서 예수 탄생을 축하했을 때였다. 무슨 때만 되면 절에 가서
받아오는 떡으로 냉장고 구석구석을 채워 넣던 엄마가 생각났다. 결국에는 냉장고 안에서 곰팡이가 피던 떡들.
단상 앞에 꿇어앉아 머리 위 십자가를 올려봤다.
내 삶이 요즘 같기만 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했다. 성탄절을 같이 보내고 며칠 후에는 타임 스퀘어에서 새해를
맞이 하기도 했다. 정말 사람밖에는 볼 게 없었던 뉴욕의 새해 전야. 화장실이 가고 싶었지만 자리를 뜰 수 없어 팽창해가는 방광의 고통을 느끼며 맞이한 새해였다.
어떤 부푼 계획이라든지, 무엇을 하고 싶다든지 하는 생각은 할 수 없었다.
부풀어 오른 방광을 걱정하고.. 행복에 겨워 걱정을 하고..
그녀의 옆모습을, 뒷모습을, 정면을 바라보며 그녀와 같이 할 미래만을 머릿속에 그려 보았다.
그녀와의 시간은 내가 살아있음에 감사하는 마음을 갖게 했다. 그날도 그녀를 집까지 바래다주고 온 밤이었다. 내 방앞에 편지가 떨어져 있었다. 발신자는 내가 다니는 어학원이었다. 예상했던 편지였다. 봉투를 열며
전화기의 사전 기능을 찾는다. 언뜻 편지 내용을 해석해도 예상했던 내용이었다. 출석 부족 때문에 보내온
경고장. 이민국에 연락을 취할 수 있다는 내용은 나를 놀라게 하지 않았다. 하지만 내가 봉투를 열기도 전에
반쯤 열려 있던 봉투의 한 부분이 무척 신경 쓰였다.
우연이라는 생각보다는 나의 멈출 수 없는 의심. 룸메이트의 짓이다.
이사 나갈 날을 손꼽아 본다.
어학원에서 보내온 경고장은 금방 잊혔다.
그녀와의 첫 번째 발렌타인스 데이가 마침 주말을 끼고 있어 보스턴에서 함께 보내기로 했다.
별 다른 준비를 할 것도 없었고 차를 렌트하며 여행 준비는 끝났다.
평일에는 하루 60불 정도라는 렌트비가 80불로 올라 있었다. 다행히도 소형차들 밖에 남은 게 없었다.
소형차 말고는 모두가 하루에 100불이 넘었다.
주말을 이용해 뉴욕을 떠나려는 사람들로 렌터카 회사는 붐볐다.
여행객들의 가방은 무거워 보였고 그들의 얼굴은 가벼워 보였다.
아는 얼굴을 만났는지 반갑게 인사하는 그들의 얼굴.
아는 사람을 만났다고 기뻐할 수도 있는 건가?
정연을 그녀의 집 앞에서 만나자마자, 소형차 밖에 없어서 화가 난다는 이야기로 인사를 대신했다.
"아.. 열 받아! 주말이라고 바쁜지 소형차 밖에 없더라고!"
연료를 아낄 수 있어 좋지 않냐는 그녀의 대답인지 물음인지 모를 말이 돌아왔다.
운전을 하는 동안은 그녀와 대화를 하는 것보다 음악을 듣고, 말없이 각자 생각하는 시간을 갖었다.
나는 그녀와의 미래 계획에 가슴이 벅차 올라 몇 번이고 긴 한숨으로 마음을 진정시켜야 했다.
침묵이 두렵지 않은 관계가 된 거 같아 내심 안심이 됐다. 그녀도 나와 같은 생각인지 무심히 차창 밖을
쳐다보거나 본인이 선택한 음악에 집중하는 듯이 보였다.
5시간 정도를 운전 해 보스턴 시내로 들어섰다.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떠난 여행이 아니어서 보스턴 시내를 거닐고, 눈에 띄는 선술집에 들어가 맥주와
스낵으로 요기를 했다. 음식 주문이 서툰 나를 대신해서 그녀는 나의 먹을 것을 책임져 주었다.
2월이었지만 하버드의 교정에는 눈이 드문드문 쌓여 있었다. 교정을 걸으며 영화 러브 스토리 얘기를 했다.
그녀는 보지 못한 영화여서 내가 줄거리를 얘기해 주어야 했다. 여자 주인공이 죽어 어차피 신파로 끝날 것인데 왜 그리 인기가 많았었는지, 어떻게 그리 많은 사람들이 공감을 해주었는지에 대해 얘기했다.
그녀의 결론은, 사랑의 완성은 죽음이라는 것이었다.
그녀는 매일매일 학교 수업 때문에 바쁜 일정을 보냈다.
미국의 대학은 들어가기는 쉬어도 졸업하기가 힘들다고 하던데 그녀의 스케줄을 보니 정말 그런 거 같았다.
어느 때는 한잠도 못 잤다며.. 아무것도 하기 싫다며.. 내 옆에 누워 잠만 자기도 했다.
그럴 때면 내가 하는 일은 그녀 옆에 누워 팔베개를 해주고 그녀 얼굴을 바라보는 거다.
가만히 바라 보기만 해도 지루한 줄 모르겠는 얼굴..
그녀가 알고 있는 나는 중요치 않다.
나는 두려운 마음보다 설렘이 앞서는.. 그저 행복에 겨워 살고 있다.
한 사람을, 그녀를 알아가고 있다는 것에 의미부여를 하는 매 시간과 하루하루를 보냈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