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종류의 인간들

블루 뉴욕 7화

by Henry Hong

인간의 운명은 진정 신의 장난인가?


보스턴을 다녀오고 한 달 후쯤이었다. 화장실에 다녀오겠다며 부끄럽게 방을 뛰어 나간 그녀.

나는 그녀가 풀어놓은 머리맡 까르띠에 시계를 쳐다보고 있었다. 요즘 시간이 너무 빠르게 흐르는 게,

그저 기분 탓일까!라는 생각을 할 때였다. 초침이 1초에 한 번씩 째깍거린다. 째깍. 째깍. 째깍..

가짜.. 가짜.. 시계가 가짜다. 까르띠에의 초침은 째깍거리지 않는다. 까르띠에의 초침은 물 흐르듯이 흐른다.

지난번 그녀와 까르띠에 매장을 들렸을 때 봤다. 초침이 물 흐르듯이 움직여 신기해했던 기억이 났다. 침대에서 급히 몸을 일으켜 벗어 놓은 그녀의 옷들을 살펴봤다. 명품 로고가 명확히 새겨진 옷들.. 모두가 짝퉁이었다.

내가 갖고 있는 가짜와 똑같은 모양새. 서툰 바느질의 마무새, 꼼꼼하지 못한 로고 문양.

그녀의 샤넬 가방은 안감마저 없었다.

나는 웃음이 나는 걸 참지 못했다. 허탈감이 가슴으로부터 올라와 목에 걸렸다. 그 허탈감이 웃음을 주는지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방으로 돌아온 그녀가 왜 웃냐고 묻는다. 그래도 웃음이 멈추지 않는다.

자기는 화장실 급할 때 없냐며, 조금 토라져 버리는 그녀.

그녀를 내 배위로 안아 올린다. 그녀도 나를 따라 미소를 보인다. 그녀의 촉촉한 눈은 아름답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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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일이 있고 며칠 후, 한국에 산다는 그녀의 부모 주소지로 작은 형을 보내 볼 수밖에 없었다.

한국 최고의 자산가들이 산다는 그 동네. 예상했었지만 그 집 문패의 이름은 그녀 부모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됐다.

그 동네는 흔하게 이사 이동이 있거나 한 그런 동네도 아니었다.

묻지도 않았던 집주소를, 그녀는 큰집에 사는 부모님이 힘들어한다고 말했었다. 나는 신데렐라를 꿈꾸며 그녀가 말한 주소를 외워 두었다가 인터넷으로 확인했었다.

아마도 같은 방법으로 그녀는 누군가의 집주소를 알아냈고 그 집의 주인이 되기로 결심했을 것이다.


작은형의 수고 덕분에 나의 심증은 확증이 되는 순간이었다.


내 인생 참 흥미롭구나.... 그리고 이유를 알 수 있는 안도감에 가슴을 쓸어내렸다.


나는 그녀를 사랑한다.


공주나 여왕은 아니라도 솔직한 평민이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녀의 입에서 쏟아지는 말들은

손에 잡히지 않을 뜬구름 같았다. 실체를 구별할 수 없었고 모두가 헛 것이었다.

나는 집중해야 했다.

내가 실체라고 믿는 것이 실체이고 그녀 자신일 거라고 결론지었다.

나는 그녀의 모든 걸 이해하기로 결심했다. 이렇게 뉴욕의 겨울은 짧게 끝나가고 있었다. 이제 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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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트럴 파크에서 그녀를 만났다. 근처에는 봄바람을 맞으려는 사람들로 붐볐다. 바람이 인간을 희롱 하 듯했고, 벚꽃잎이 유난히 떨어지던 날이었다. 벚꽃의 흩날림은 바람의 존재를 상기시켰다. 눈으로 볼 수 없는 바람의 모습. 바람으로 움직여지는 사물을 보며 바람의 존재를 느낄 뿐이다. 바람이 내 가슴에 와닿을 때였다.

그녀가 말했다. 한국 다녀 올 일이 생겼다고. 헤어짐? 해고? 내손에서 문득 살기가 느껴짐을 느꼈다. 노래방에서 병으로 취객을 내려치고 싶었던 순간이 떠올랐다. 나는 그녀의 눈을 깊숙이 쳐다봤다. 보기 드문 엷은 갈색의 눈동자. 눈동자를 지나 시신경, 그 밑의 뇌 척수를 관통해 그녀 뒤의 벚꽃나무가 보였다. 꽃잎이 부스스 흩날린다. 꿈같이 느껴지는 몽롱한 기분. 그녀의 눈은 너무도 아름다웠다.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가!

그녀를 만나는 동안 난 치유되고 있었다. 사랑을 배우고 있다. 살기가 느껴지던 손이 차분해진다. 가슴속 피가 크게 펌프질을 한번 한다. 피가 돌아 손이 따뜻해짐을 느낀다.



한국에는 왜 가냐고 묻지 않았다. 둘만의 파티를 하기로 했다. 그녀가 한국을 다녀온 후에는 집을 합쳐 동거하기로 했다. 어차피 룸메이트 때문에 이사할 생각이었고 계약금이 아까워 계약기간까지 살려고 했던 것도, 이제는 무의미해졌다. 나하고는 세상 끝도 두렵지 않다는 그녀. 언제나 만남 후, 헤어짐에 몸서리치던 그녀.

그녀와 우리 둘만의 안식처를 만들어 보련다. 내가 조금 더 노력하겠다.

그녀의 사랑이 나를 치유하고 있지 않은가! 그토록 갈구했던 그저 남들처럼 사는 삶을 얻게 될 것이다.



나는 그녀에게 나의 과거 얘기를 해줄 것이다. 용서를 구할 것이다. 그녀도 나와 같은 처지라는 것을 알게 된 후, 용기를 내기로 했다. 서로의 과거를 솔직히 얘기하면 우리의 존재 이유가 성립될 것이다. 과거가 없는 인간은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기 때문이다. 그녀가 한국을 다녀온 후 모든 걸 이야기하겠다.



그날 저녁, 우리 집에서 둘만의 송별회가 있었다. 학교 스케줄 때문에 더 있고 싶어도 한국에는 열 홀밖에 있을 수 없다는 그녀의 친절한 설명. 그녀를 너무 보고 싶어 하는 아빠 때문에 다녀와야 한다는 얘기를 정말 해맑게 하는 그녀.

그녀는 학교를 다니고나 있기는 한 걸까?.. 중요치 않은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저녁 식사 시간이 훨씬 지나 특별한 밥상이라며 그녀가 음식 담긴 쟁반을 들고 방으로 들어왔다. 음식은 낮에

마켓에서 산 밑반찬과 햇반이었다. 전자랜지 덕분이겠지만 김이 찰지다.

나는 밥과 어울리지 않는 와인의 병마개를 따고 있었다.


그녀가 발랄한 얼굴로 묻는다

"오빠 룸메이트 어느 학교 다니는 줄 알아?"


"그 사람 학교는 갑자기 왜?"


"아니.. 쓰레기 버리려고 하는데 쓰레기통이 편지 봉투들로 꽉 차있더라고..

무슨 편지인가 하고 봉투를 보니까..

제니 어학원에서 보낸 편지들이더라고.. 오빠 룸메이트 NYU 대학 다니는 거 아니었어?"


"어느 학교 건 유학생이 학교 다니면 됐지 뭐.. 밥이나 먹자."


나는 애써 태연한 척하며 밥으로 시선을 돌렸다. 너무 하얀 즉석밥이 가짜처럼 느껴졌다.

나는 눈 뜬 장님이었다.

어학원이 뭐 어때서! 하지만 같은 종류의 인간이 내게 보인 눈초리는 용서할 수가 없다.


나는 실체를 볼 수 없었다. 남들이 어떻게 사는지도 모르면서 남들 같은 삶을 꿈꿨었다.


다음 날 나는 현관 앞, 신발장 옆에 쪼그리고 앉아 룸메이트가 세워둔 그의 그림들을 살펴봤다.

유화가 그려진 캔버스 모서리에는 거미줄과 먼지가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누군가에게 보이기 위해 놓아둔 그림에 관심을 갖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고 보니 룸메이트와 같이 산

지난 6개월여 동안, 그가 누굴 데려 온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는 단지, 어떤 일정한 시간에 나갔다 돌아오는 생활을 반복했다.

술이나 담배를 하는 것도 본 적이 없다.



그림 중 하나를 들고 방으로 들어왔다. 납작한 쇠자를 이용해 유화를 긁어내기 시작했다. 마른 유화 물감은

쉽게 캔버스에서 떨어져 나갔다. 이 인간이 그린 게 맞나를 생각하며 좀 더 유화를 쇠자로 밀어내는데..

물감 밑으로 다른 그림이 보였다. 그림 위에 그림을 그려?

밑그림인가? 생각했는데 자세히 보니 인쇄된 사진이었다.

그자는 캔버스에 사진을 붙이고 유화로 덧 칠을 해놓은 거였다. 유치하기 짝이 없는 짓거리로 보였다.

아무데서나 프린트할 수 있는 맨해튼 브릿지의 전경.. 그 위에 떡칠을 해 논 유화 물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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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림을 있던 자리에 가져다 놓았다. 그림들 옆에는 색 바랜 미술 앞치마가 걸려있다.

"참.. 여러 가지 한다.. 여러 가지...." 엄마가 늘 형들에게 하던 구시렁이 들렸다.


한국의 홍대.. 뉴욕의 NYU.. 라니..


모두가 같은 종류의 인간이었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