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할 말은 없었다

블루 뉴욕 8화

by Henry Hong

그녀를 JFK 공항 앞에서 떠나보낸 게 8일 전이었다.


공항으로 향하는 택시 안에서 그녀의 손을 놓을 수 없었다. 그녀와 손의 열기를 주고받았다.

그 점성 같은 열기가 거부할 수 없는 사랑이라고 느꼈다.


"여자 친구분이 한국 가시나 봐요?" 라며 묻는 한국 콜택시 기사의 질문에.


"여자 친구 아니에요. 저 애인이에요"..라고 대답했던 그녀. 그 대답에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던 나.


기사분 기다리게 하는 것도 예의가 아니라며.. 내릴 필요 없다며.. 나를 택시 안으로 떠민 것이 8일 전이었다.



그랬던.. 그녀를 오늘 브루클린에서 봤다.

그녀와 같이 살 집을 살펴보고, 계약금을 지불하고 나오는 중이었다.

바람이 기분 좋게 앞머리를 스치고 지나갈 때였다.

멀리서도 눈에 확 띄는 나비 같은 그녀가 보였다. 긴 종아리의 그녀가 하늘하늘 춤추듯 걷고 있었다.

연두색 원피스를 입은 그녀가.. 어깨를 다 드러낸 그녀가.. 흑인의 팔짱을 끼고 발랄하기만 했다.

시린 눈을 몇 번이고 비벼가며 다시 쳐다봤다. 그녀는 교태스러워 보이기까지 했다.

틀림없는 그녀.. 정연이었다. 데루꼬.. 나의 그녀였다. 무릎에 힘이 풀리고 현기증이 났다.

어찌할 바를 모르고 숨만 가빠졌다.


당장이라도 뛰어가서 어찌 된 일인지 물어야 하는데.. 갑자기 엄마가 생각날 뿐이었다. 엄마가 초연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익숙한 엄마의 그 눈동자.. 그녀의 뒷모습은 멀어져만 갔다. 길거리를 지나는 사람들의 얼굴이 희미해졌다. 사람들 얼굴이 무서워졌다. 이제는 사람들 얼굴을 구별할 수 없다. 확실한 것이 없다.

의식과 무의식 사이.. 확실한 것을 가늠할 수 없었다. 확실한 것은 그녀였다는 것뿐이었다. 8일 전 한국으로 떠난 그녀였다는 것. 눈 큰 흑인의 팔짱을 끼고 웃음을 흘리고 있었던 그녀가 그녀였다는 것뿐이었다.



집까지 어떻게 돌아왔는지 모르겠다. 침대에 누워있다.

온갖 시선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다. 엄마의 눈이 그 중심에서 나를 노려본다. 눈을 피할 수 없다. 수많은 시선이 나의 눈동자를 쫓는다. 그 시선들은 비수가 되어 나의 눈을 뚫고 뒤통수까지 침투 해온다.

그 시선들은 다시 뒤통수를 지나 시신경을 통해 내 눈밖으로 튀어나온다.


침대에서 기어 내려왔다. 이민가방을 찾는다. 수면제를 찾는다. 수면제 몇 알을 물 없이 입에 털어 넣는다.

침대가 아닌 곳에 쓰러짐을 느낀다. 순간 전화기는 어디 있지? 그녀에게서 전화가 올 거다. 전화기는 침대 위에 있다. 전화기까지 거리가 멀게만 느껴진다. 그 때다 전화기가 울린다. 그렇다 그녀가 전화를 걸어온 거다.

하지만 침대까지의 거리가 멀기만 하다. 약물이 생각의 스위치를 내린다. 눈꺼풀이 내려진다.

그녀에게 모든 걸 이해한다고 얘기해 주고 싶다.


정연아! 걱정 마.. 내일 오빠가 전화할게....


안 떠지는 눈을 애써 떴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는지 모르겠다. 이미 어두워진 창가에 놀란다. 누군가가 아파트

문을 심하게 두들긴다. 누굴까? 언제부터 두들긴 걸까? 소리는 점차 커진다. 그녀가 온 것이다.

빨리 문을 열려고 하는데 몸이 말을 안 듣는다.

약기운 때문인지 바닥에서 일어나 방문까지, 방문에서 현관까지 가는 게 힘겹기만 하다. 어지러워 벽에 몸을

기댄 채 걷는다.

힘겹게 문 앞까지 왔다.


정연아! 잠깐만.. 하고 소리를 질렀는데 입 밖으로 튀어나왔는지는 모르겠다.


손잡이를 더듬어가며 문을 열었다. 문 앞에 룸메이트가 서 있다. 문을 두드린 건 룸메이트였다.

뭐하다가 문을 늦게 여냐고 투덜거린다. 10여 분을 문 앞에 서 있었단다.

혀를 차며 귀가 먹었나! 라며 나에게 까지 들리는 혼잣말을 한다.


열쇠를 놓고 나간 건 내가 아니잖아..


갓댐.. 잇! 나도 모르게 욕이 튀어나왔다.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랭귀지 다니는 주제에 욕은 영어로 배웠네 씨발!" 이죽거리는 소리가 고개 숙인 나에게 들렸다.


그 순간 고개를 들었다. 룸메이트의 눈과 마주쳤다. 모멸감을 느끼게 하는 노래방 사장의 눈. 나는 현관 앞의

캔버스를 들어 그자의 머리를 내리쳤다. 그자가 비명을 지른다. 아팠나 보다. 그자는 벽에 걸려있던 옷가지들을

나에게 던졌다. 대항 치고는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던져진 어떤 옷에 내 얼굴이 가려졌다. 캔버스를 인기척이 나는 곳을 향해 마구 휘둘렀다. 캔버스가 부서졌다. 그 자를 때린 건지, 벽을 친 건지 알 수 없었다.


내 그림! 내 그림! 고함을 치며 그자가 달려든다. 거지새끼가 그림 망쳤다며 울부짖는다. 울부짖고 싶은 건,

나인데 그 자가 울부짖는다. 우리는 짝퉁.. 어차피 같은 종류의 인간 이잖아!

그 자가 밀면 나도 밀고, 그 자가 때리면 나도 때렸다. 얼굴을 가린 옷 때문에 앞을 볼 수가 없었다.

싸움을 끝내려 손에 들려있던 부서진 캔버스 조각으로 그자를 찌르기 시작한다.

몇 번을, 어디를 찔렀는지 모르겠다.

손이 끈적이고 쥐가 나서 찌르기를 그만뒀다. 그 자가 내 몸에서 떨어져 나갔다.

내 얼굴 부분에 걸쳐 있던 뭔가를 걷어 올려보니 미술 앞치마였다.

그자의 피가.. 마치 빨간 물감처럼 보이는 앞치마를 힘껏 뿌리치듯 걷어냈다.

룸메이트는 현관에서 몇 발자국 떨어진 곳에 엎어져 있었다.

나는 그때야 전화 생각이 났다. 내방으로 급히 뛰어가 불을 켜고 전화기를 찾는다. 부재중 전화를 확인한다.


[창아! 엄마다.. 전화 좀 줘라]

엄마에게서 온 문자 13통...



방의 라잇 스위치를 내린다.

어둡고 고요한 시간이다.

방문에 기대어 앉는다.

시린 눈을 감는다.


시티항공밤.JPG


양치기 소년의 거짓말은 외로움 때문이었다. 지독한 외로움....

이전 07화같은 종류의 인간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