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싹 속았수다.
알람이 울리기 전에 눈을 떴다. 사방이 조용하다.
잠을 깨서 꿈을 꾸는 기분.
방은 어두웠다. 커튼은 닫혀있다.
일어나자마자 커튼부터 열어젖히는 아내가 옆에 없다.
오늘은 커튼을 하루 종일 닫아 놓을 셈이다.
화장실 용무를 보고 반항적으로 변기 커버를 활짝 열어 놓았다.
세면대 밖으로 튄 물기를 닦지 않았다. 추상화처럼 보인다.
유튜브를 뒤적인다.
이어폰을 끼지 않고 볼륨을 한껏 올려 매불쇼를 듣는다.
한국어가 소음으로 들리는 사람은 이 집에 없다.
토스트 한 빵에 잼을 잔뜩 묻혀 한입 베어 물며 부엌을 나온다.
입안에 달콤함이 한가득이다.
의무적으로 먹었던 설탕기 없는 뻑뻑한 요거트는 오늘 생략.
몸에 좋을진 몰라도 맛도 없고 목만 멘다.
단 빵을 씹으며 매불쇼에서 눈을 안 뗀다.
밥상 앞에서 비디오를 본다. 일탈이다.
접시 하나뿐인 설거지를 마치고 집을 나선다.
20분 정도 걸려 사무실에 도착한다. 집에는 아무도 없다.
퇴근 후에 뭘 하면 좋을지 가슴이 뛴다.
오랜만의 홈 얼론, 출근하자마자 기다려지는 퇴근.
시간은 더디기만 하다.
5시 정각, 길어진 낮 시간. 날씨는 맑기만 하다.
술 한잔 시작하기에 딱 좋은 여건이다.
고민한다. 누구와 한 잔을 할까?
선배? 후배? 그냥 사람?
술 많이 마시며 말수는 적고 알콜성 치매가 있는 사람이 좋은데..
고민하며 운전하다 보니 집에 거의 다 왔다.
선택 장애를 탓하며, 어느덧 현관문을 열고 있다.
어쩌다 보니 집에 와 버렸다.
기왕 집까지 왔으니 씻고 나가자.
샤워를 하면서 누구와 술 한잔을 할지 다시 고민에 빠진다.
씻고 나니 종전보다 훨씬 상쾌한 기분이 된다.
너무 들뜬 기분 탓일까? 출출하다.
냉장고를 열어 본다. 건강에 좋을지는 몰라도 나를 우울하게 만드는 것들.
생 야채, 삶은 야채 몇몇 과일..
그렇다 나는 지금 집에 혼자다.
눈치 안 보고 죄책감 안 느끼며 라면을 먹을 수 있다.
대범하게 메뉴를 짜파구리로 정했다. 최소한 2봉을 먹어야 하는 메뉴.
언제 사놓은 너구리 인지 스프가 굳어 있다. 그딴 게 문제가 될 리 없다.
굳은 스프를 열심히 비벼대 분말로 만든다.
아들 때문에 사놓았던 짜파게티는 별 문제없다.
내가 한 음식이 이렇게 맛있을 수 있다니.. 진정 내가 만든 음식인가!
조금 느끼하다고 느낀 건 마지막 젓가락 질을 하고 있을 때였다.
냉장고에서 맥주를 꺼내 컵에 따른다.
숨 쉴 틈 없는 원샷! 그래 이맛이지.
입 안이 맑아지며 직감을 한다.
나가긴 어딜 나가냐! 바로 한 병을 더 마신다.
TV를 켠다. 넷플릭스로 들어간다.
아껴 두었던 '폭싹 속았수다'의 마지막 편을 플레이한다.
어처구니가 없다.
각본, 연출자가 아예 작정을 했다. 배우는 미쳤다.
눈물, 콧물 다 흘리게 만든다.
숨이 막혀 누워서 볼 수 없었다.
술맛도 떨어졌다.
병실에서 아버지와 딸이 과거를 회상하는 장면에서는 통곡을 할 뻔했다.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고 나에겐 딸이 없어 다행이라 생각했는데,
아버지가 아들에게 짜장면을 사주는 장면에서 또 위기가 닥쳤다.
소파에 꼿꼿이 앉아서는 훌쩍거린다.
중년의 남자가, 있는 청승, 없는 청승을 떨고 있다.
작은 집이 커 보이는 나 홀로 집.
다시 한번 다짐을 한다.
내일은 기필코 한 잔을 할 것이다.
오늘은 억울하게 '폭싹 속았수다'에 일격을 당했지만.
내일도 유튜브와 넷플릭스에 의지하고 싶지 않다.
그다음 날은 아내가 돌아온다.
시간이 없다.
내가 이러고 있는 것 아내는 모른다고 믿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