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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년 만에 만난 여사친

그 가늘고 긴 연줄의 시작과 끝

by Henry Hong

그 아이를 처음 만난 건 유치원에서였다.

얼굴에 눈 밖에 안 보이던 아이라서 눈에 띄는 아이였다.

유치원 때 사진을 보면 이상하리만치 그 아이가 내 옆에 붙어 있는 사진이 많다.

왜인지는 나도 그 아이도 모른다.

그 아이를 다시 만난 건 초등학교 6학년 때였다.

중고등학교는 남녀공학이 흔치 않던 시절.

당시 초등학교 졸업의 의미는 남녀 학생 사이에 장벽이 세워지는 거였다.

기껏해야 학교 축제 때나 보려나?

중학교를 가면 앞으로 못 보겠지 하는 아쉬운 마음으로 서로의 연락처를 교환했다.

아주 가끔 편지를 주고받았고 그 보다 덜 통화를 했다.

지금 생각해도 내가 한 말은 별로 기억이 안 나는 걸 보니.

이야기를 듣는 쪽은 내가 아니었을 까 짐작된다.

입시를 앞두고는 연락이 끊겼다.

입시가 끝나고 만남은 이어졌다.

만나서는 술을 마셨다.

술을 아주 많이 마셨다.

술은 그 아이가 더 마셨다.

술 값 계산은 그 아이가 했다.

내겐 돈이 없었다.

아버지 사업은 망했고 1학년만 마치면 군대나 가야겠다는 생각을 할 때였다.

생각보다 시간은 잘도 흘렀고 제대 후 복학을 했다.

연락이 끊긴 상태라 선뜻 전화하는 게 쉽지 않았다.

어느 날, 종로 YMCA 빌딩 앞에서 우연히 그 아이를 만났다.

그 아이가 먼저 아는 척을 해 주었다.

반갑지만 서먹했다. 서먹해서 과한 반가움을 표했다.

그 후로 가끔 연락을 해서 그 아이를 만났다.

만나면 술을 마셨다.

아주 많이 마셨다.

술 값 계산을 할 때면,

내 주머니 사정 뻔히 아는 그 아이가 본인의 지갑을 테이블 밑으로 넌지시 건네줬다.

창피하지 않았다. 창피함을 모르는 놈이다 보니 뻔뻔해졌다.

어느 때는 그 아이를 만나자마자,

"야! 지갑 좀 줘봐!"라고 말한 적도 있다.

지갑의 내용물을 보고 오늘 뭐 할까?를 내 멋대로 정했다.

이렇게 살기는 누구보다 싫었지만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몰랐다.

공부는 당연히 뒷 전이었다. 어차피 하기 싫은 전공이었다.

술을 토하도록 마시다가,

난데없이 유학을 결심했다.

뱁새가 황새 따라가다 가랑이 찢어진다는 친척들의 비아냥이 있었다.

정작 내 걱정은 비자 심사에 떨어지면 따라 올 쪽팔림이었다.

그 좌절감을 어쩌랴..

친구들에게 쉽게 유학 결심을 이야기 못 한 이유다.


하늘은 무슨 뜻이었을까?

형편없던 은행 잔고 증명에 유학 비자를 내줬다.

얼떨결에 뉴욕행 비행기에 올랐다.

비자받는 게 목표였던 놈의 유학 생활이 평탄할 리 없다.

거기다 돈도 없다.

다음 끼니를 걱정해야 했다.

유학 비자를 유지하는데 필요한 최소한의 클래스를 들으며 일을 시작했다.

졸업이 늦어질 수밖에 없었다.

귀국 소식은 연예가 중계로 알게 될 거라고 큰소리친 게 공허하기만 했다. 살아남는 게 목표였다.

쉬는 날 같은 건 생각도 안 했다.

모든 게 사치스럽다고 생각하던 시절이었다.

뱁새가 황새를 쫓았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학교와 두 군데의 알바. 옷 가게, 운동화 가게를 오가는 시간이었다.

권총 강도를 당하고도 일자리 걱정을 하던 시기였다.


그 아이의 결혼 소식을 들었다.

아니 벌써?

고맙다는 말도 못 했는데 시집을 가 버렸다.

그렇게 그 아이는 잊어졌다.

그리고 그 아이가 보고 싶어졌다.

간혹 꿈에 나타나기까지 했다.

하지 못 한 말이 하고 싶어졌다.

10여 년 전부터 친구들을 동원해(?) 그 아이의 행방을 묻기 시작했다.

한국을 방문할 때는 예전에 그 아이가 살던 집에 가보기도 했다.

그 아이의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대학원까지의 흔적을 찾았다.

동문 모임 같은 곳도 기웃거렸다.

그러나 찾을 길이 없었다.

그 아이의 행방을 아는 친구는 아무도 없었다.

어떻게 친구들 사이에서 감쪽같이 사라질 수 있단 말인가!

나쁜 일이 생긴 건 아닐지 걱정이 따랐다.

그렇게 시간은 또 흘렀다.

그리고 2023년 여름, 서울에 있을 때였다.

친구의 지성이면 감천이랄까..

작은 단서에서 상철이가 그 아이 비스름한 사람을 찾았다.

하지만 찾은 건 이메일 주소뿐이었다.

고민 끝에 내 소개를 하고 그 아이가 아니라면 실례했다는

내용의 글을 보냈다.

긴장을 하고 답장을 기다리는 동안,

뉴욕으로 돌아갈 날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읽음 표시가 생기고 3일 후에 답장이 왔다.

그 아이였다.

조심스럽게 만나자는 이야기를 꺼냈지만 바쁘다는 이유로 거절을 당했다.


2024년 봄, 서울

또다시 그 아이에게 연락을 했다.

이번에는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 아이 이름을 부르려는데 목이 메었다. 고맙다는 말을 못 했다.

그 아이를 만나기로 했다.

만나서 얘기할 수 있어 다행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그 아이를 만날 수 없었다.

약속 당일 날, 그 아이에게 급한 일이 생겼다.

나는 또다시 끈적끈적한 아쉬움을 품은 채, 뉴욕으로 돌아왔다.

나를 피하는 걸까?라는 생각을 잠시 했다.

피한다고 해도 이해했겠지만 말이다.

소득이 있었다면 전화 통화를 했다는 것.

그 아이의 이름을 30여 년 만에 불렀다는 것.

이 아이 이름을 이렇게 힘들 게 부르게 될 줄은 몰랐다는 것.

예전에는 정말 몰랐다는 것

그래도 목소리를 들어서 인지 어떤 안도감이 들었다.

그러길래 고맙다는 말 같은 건 30여 년 전에 했어야지,

나 자신을 책망했다.


그 아이와의 인연은 끝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나의 존재가 그 아이에게는 악몽일 수도 있다는 지극히 당연한 생각을 했다.

나쁜 남자보다는 나쁜 놈이었으니까.

그럼에도 또 연락을 했다.

간절한 마음 때문이었다.

어차피 서울에 갈 일이 있으니 마지막으로 연락을 해보기로 했다.

도움을 주고 응원해 준 친구들에게 만났다는 소식을 전하고도 싶었다.

유치원앨범.jpg


그리고 2025년 1월 4일, 서울, 이대 앞, 커피도가

드디어 그 아이와 카페에 마주 앉게 됐다.

그토록 보고 싶었던 사람이 눈앞에 앉아 있었다.

32년 만의 일이다.


연대앞전경.jpg


그 아이를 만나러 가는 길.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중년이 된 아저씨는 생각만 많아졌다.

빈손으로 가기에는 좀 그런데..

박카스를 사갈 수도 없고..

홍삼?

케이크를 사가? 웬 케이크?

기프트 카드? 이건 또 무슨!!

지하철을 타러 가는데 가슴은 진정이 안되고,

머리만 무거워졌다.

그때 보인 게 꽃집이었다.

평소에는 먹지도 못하고 시들어 버릴 꽃을 왜 사냐며 아내를 타박하던 내가 꽃집에 들어서고 있었다.

꽃 주문은 어떻게 하는 거지?

이름도 모르는 꽃뭉치를 들고 꽃집을 나섰다.

꽃을 들고 지하철을 타는데 왜 이리 창피한지..

최대한 자연스럽게 행동하려는데 왜 몸은 뻣뻣해만 지는지..

그 아이를 만나기로 한 이대 앞 역에 내려

출구 번호에 의지하며 지상으로 나왔다.

이대 앞, 이곳 역시 30여 년 만의 방문이다.

30여 년만에 누군가를 만나기에, 꽤 적당한 장소라는 생각을 했다.

그 아이가 정한 장소였다.

그렇게 나는 시간 여행을 하듯 갑자기 20대로 돌아가 버렸다.

약속 시간보다 40여분을 일찍 도착한 덕분에 이대 앞 주변을 둘러볼 수 있었다.

이쯤에 소극장이 있었고, 이쯤에 빌리지가 있었고..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카페들에서 수다를 떨던 시절이 떠 올랐다.

지금의 상황이 너무 비현실적이라 들고 있던 꽃의 냄새를 맡아보았다. 이런 게 꽃 냄새였나?

다른 건 다 변해도 이대 앞 큰길은 안 변한 거 같다고 느낄 때쯤,

약속한 카페로 갈 시간이 되었다. 막상 그 아이를 곧 보게 된다니 마음이 가라앉았다.

가슴이 계속 뛰었다면 부정맥을 의심할 나이 맞다.

주변을 둘러보고 쉽게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던 카페가 보이지 않았다.

내 전화기에는 길 찾기 앱이 없었다.

마음이 급해 지나가는 사람에게 길을 물었다.

꽃을 든 아저씨가 어리바리해 보였는지 여학생 둘이 열심히 주변을 살핀다.

옆에 있던 오토바이 청년이 나서기까지 했다.

자신들의 GPS를 동원한다. 그제야 동서남북을 구별하는 나.

도움을 준 세 분께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네, 커피도가 찾던 그 사람 맞습니다."


그 아이를 만나기로 한 카페가 눈에 띄었다.

약속시간 5분쯤 전이었다.

무거운 문을 밀었는지? 당겼는지? 카페에 들어섰다.

일관성 없어 보이는 가구들이 나를 노려보듯 했다.

크지 않은 실내를 둘러보니 그 아이처럼 생긴 아줌마는 없었다. 다시 밖으로 나왔다.

문 앞에서 그 아이를 기다렸다. 손에 든 꽃이 아주 조금 익숙해졌다.

추위를 못 느낄 정도의 기다림 끝에 그 아이가 눈앞에 섰다.

한눈에 알아볼 수 있을 만큼만 늙어 있었다.

웃음이 났다.

딱 그 아이가 이 아줌마가 됐네..

무슨 정신으로 카페에 들어와서 자리를 잡았는지 모르겠다.

나는 얌전히 테이블 앞에 앉아 있고

그 아이가 커피를 오더 하고는 내 앞에 앉았다.

커피를 들고 온 것도 그 아이였다.

아 쉬.. 또 얻어먹은 거야! 이런 생각을 할 겨를도 없었다.

뭐 떨리기는 그 아이도 마찬가지였나 보다..

그 옛날 어색할 때 짓던 그 표정을 그 아이가 짓고 있었다.

입가의 주름만이 낯설었다.

어색한 공기를 회피하며

서로 살아온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큰 딸이 있고 군대 간 아들이 있단다.

믿기 어려웠지만 사진을 보여 달라고는 안 했다.

다소 가볍게 가족 얘기를 나누는데,

갑자기 그 아이가..

내가 기억하는 자기는 무엇이었냐고 물었다.

왜 그토록 자기를 찾았냐고 물었다.

그렇다 나는 이 아이를 찾던 이유가 있었다.

본론을 이야기할 때였다.


그 아이의 말로는 내가 미국에 간다는 말도 없이 가 버렸단다.

나를 향한 예전 그 아이의 마음을 몰랐다면 거짓말이다.

나를 소중히 대했던 그 아이의 마음을 애써 외면했었다.

불투명한 미래에 불안해하며,

나를 향해야 했을 고민과 갈등은 길을 잃고

감사할 사람에게 향했다.

그렇다고 그 아이에게 화를 낼 용기가 있지도 않았다.

싸움이나 언쟁을 해 본 적도 없다.

내가 나를 너무 몰라 답답하기만 했다.

그냥 마음 내키는 대로 제 멋대로 행동했다.

그 아이가 감당해야 했을 마음의 상처를 무시해 가며....


뱃속 어딘가에서부터 울리는 떨림을 애써 억누르며,

그 아이에게 이야기했다.

보잘것없던 놈의 옆에 있어 줘 고맙다.

지금의 나라는 인간이 되는데 네가 한몫을 해줬다고 했다.

너를 찾던 이유는 고맙다는 말을 얼굴 보며

진심으로 하고 싶었기 때문이라 말했다.

그동안 한 번도 너에게 고맙다는 말을 한 적이 없었으니까.

별 볼 일 없던 놈을 소중히 대해 준 고마움,

"넌 늘 나에게 고마운 사람이었다."


32년 만의 만남은 오후 2시에 시작해 4시에 끝났다.

2시간의 만남 후,

같이 카페를 나서 그 아이가 멀어져 가는 뒷모습을 한 동안 지켜봤다.

그 가늘고 길었던 인연의 끝이라 예감되니,

자꾸 고개가 숙여졌다.

쓸쓸하게 다가오는 애틋함을 어쩔 수 없었다.


내 마음의 무게를 덜어 내려고 그 아이를 만난 건 아니었는데..

그 아이가 얼마나 좋은 사람이었는 지를 알려 주고 싶었는데..

고맙다는 말로 내 마음이 얼마나 전해졌을지 모르겠다.

아마도 그 아이는 오늘 이 자리에 나오기까지 커다란 용기가 필요했을 거다.

그럼에도 기꺼이 모습을 보인 아이.

예나 지금이나 나보다 용기 있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훨씬 좋은 사람.

그 아이가 본인이 얼마나 좋은 사람인지를 알고 살아갔으면 하는 바람이 든다.


그 아이의 걸음걸이, 뒷모습 변한 게 없어 보였다.

그러고 보니 헤어 스타일도 30여 년 전 그대로였다.

신발은 캔버스 운동화.

꾸안꾸 스타일?

점점 작아지는 그 아이의 형체

이제야 한숨이 나오고 술 생각이 났다.

친구들의 단톡방에 글을 올린다.

'낮술 가능한 사람?'

창오가 제일 먼저 손을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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