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는 기분

아빠 울리는 아들

by Henry Hong
아들이 9살 때의 일이다.


사내자식에게 운동 하나는 시켜야지 하고, 고심 끝에 선택한 운동이 펜싱이다.

과학적 근거는 전혀 없지만 태권도나 다른 격투기는 다리가 짧아질 것 같은 우려가 되었다.


짧은 다리로 평생을 살고 있는 아빠의 당연한 우려입니다.


나는 취미로 검도를 하고 있지만 나이 어린 아들이 머리를 너무 맞아 뇌손상이 생기면 어쩌나 걱정돼,

검도는 포기하고 결정한 운동이 펜싱이었다.

다행히도 아들 녀석이 재미있어하고 소질도 있는지 제 또래에는 경쟁자가 없을 정도로 두각도 나타내고 있었다. 태어났을 때 굼벵이 같아 보였던 아들이 멋진 유니폼을 입고 칼을 들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자면

저절로 얼굴에 미소가 지어졌다.

이런 내 모습이 남보기에 창피하기도 하지만 무녀독남 외아들, 갖은 아빠 마음을 어찌하겠습니까?



손에 칼을 들고 하는 운동이라 그런지 의외로 펜싱과 검도는 공통점이 많다.

운동도 같이 할 겸 나는 스파링 파트너가 돼주고는 한다.


간단히 검도와 펜싱의 다른 점을 이야기하자면.

검도는 단칼에 상대방을 베는 것이 목적이고

펜싱(에페)은 상대방이 죽을 때까지 찌른다.

점수 채점 방식도 검도는 정해진 타격 부위를 두 번 치면 끝이다.

그래서 1분 안에 경기가 끝나는 경우도 흔하다.

펜싱 에페의 경우 무조건 15번은 찔러야 경기가 끝난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신체 모든 부위가 찌름의 목표가 된다.


운동을 같이 할 때는 나를 아빠로 보지 말고 코치로 보라고 하고,

아들에게 무섭고 단호하게 대한다.

집중을 안 하면 부상의 위험도 따르고 실력 향상에도 도움이 안 되기 때문이다.

더구나 펜싱은 무기를 가지고 하는 운동이기 때문에 집중을 안 하면 큰 사고와 연결될 수도 있다.


펜싱부자.jpg



아들이 평소와는 다른, 나의 모습에 섭섭함을 느낄지 몰라도 펜싱을 할 때는 윽박지르고 벌도 주고,

어떠한 변명도 허락지 않는다.

운동을 할 때는 언제나 최선을 다 해야 하고 칼을 들었을 때는 전투 중이라 생각하라고 가르쳤다.


연습은 실전이다!



그러던 어느 날, 펜싱장에서 아들이 다른 아이들과 연습경기를 할 때였다.

평소에 한수 아래라고 생각하는 아이와 경기를 하는데, 아들 녀석 움직임이 너무 굼뜨고 속수무책으로

공격만 당하고 있었다.


뭐라는지 경기 중에 상대 아이와 말까지 하네..

비록 연습 경기였지만 용서할 수 없는 일이었다.

평소에 가르친 대로 최선을 다하기는커녕 칼싸움 중에 소풍 나온 모양새를 하고 있으니,

울화통이 터지기 시작했다.

내 얼굴이 상기되어감을 나조차 느낄 수 있었다.

상대 아이가 약체라는 건 펜싱 클럽의 모든 사람이 알고 있고, 내 체면이 있어

아들에게 고함도 못 지르는 상황이었다.



인상을 있는 대로 쓰며 어디 이 녀석 오늘 연습만 끝나 봐라 하며,
운동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30여분이 흐르고 드디어 연습은 끝났다.
연습이 끝나기가 무섭게 주차장 쪽으로 애를 데리고 가 꾸짖기 시작했다.



운동을 그렇게 밖에 못하느냐!

도대체 집중을 하는 거냐!

한수 아래인 아이에게 당하는 건 너의 연습 부족이다!

창피한 줄 알아라!..

아들이 꾸짖음 중간에 뭔가 말을 하려 하는데도 변명은 하지 말라며 입막음을 하고

나의 신랄한 조롱은 계속됐다..
어두 컴컴한 주차장 구석에서 찌르기 연습을 시키기까지 했다.



그 후, 차를 타고 집을 향하면서 비로소 화를 삭일 수 있었다.

그제야 내가 아이에게 너무 했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최대한 목소리를 부드럽게 하며

아까 네가 하려던 말은 뭐냐고 물었다.

아이가 삐졌는지 됐다고 말을 하려 하지 않았다.

난 기분이라도 풀어주려고.. 괜찮으니 말하라고 재차 종용했다.

말을 안 하면 아빠가 화를 더 낼지도 모른다는 은근 협박조였다.



그때서야 아들 녀석은 억울한 듯, 울먹거리며 말문을 열었다.


상대편 아이는 연습할 때마다 모든 아이들에게 당하기만 하고 지기만 해서..

오늘은 이기는 기분을 느끼게 해 주려고 져주었단다.

아들은 가까스로 말을 끝마치고는 울음보가 터져 버렸다.
그러면서도 다음에는 최선을 다 하겠다고 했다.


그 얘기를 듣는 순간 난 뭔가에 세차게 얻어맞은듯한 느낌을 받았다..

상대방에게 이기는 기분을 느끼게 해 주려고 져 주었다는 아들의 말에..

한없이 어리석고 이기적인 어른임을 느끼고 창피해서 뭐라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목젖에서부터 뭔가 뜨거운 것이 올라오는 느낌.. 코 끝이 찡해지고..

운전하는데 방해가 될 정도로 눈은 따갑고.. 결국에는 나도 눈물이 울컥 솟구쳤다.

어린아이의 마음보다도 못한 나의 속물근성에 화가 났다.


남에게 이기는 기분을 느끼게 해 주려는 마음이라....
그 후 나는 차를 운전하며 한마디도 할 수 없었다.

행여 아들이 훌쩍거리는 제 아비 얼굴을 볼까 봐 얼굴을 옆으로 돌리지조차 못했다..
겨우 집에 도착해 차문을 열어주고, 나는 아들 녀석을 세차게 안아줬다..
고맙고 미안해서....

아들 덕분에 내 친구들 생각을 하게 됐다..


나도 모르게 나에게 이기는 기분을 느끼게 해 준 많은 친구들이 떠 올랐다.


이제야 깨닫게 됐네.. 많은 친구들이 나에게 져 주었었다는 것을..

그게 말싸움이었을 수도 있었고.. 심각하지 않은 논쟁일 수도 있었고..

어느 식당을 갈까?라는 고민..이었을 수도 있었던 수많은 갈등 끝,

그리고 이겼다는 기분..

그 우쭐했던 그 순간을 만들어 준.. 친구들아 고맙다!


펜싱마스크.JPG


걱정 많던 도쿄 올림픽이 끝났습니다.

꼭 어떤 대가를 바라고 국가대표가 된 것은 아니겠지만,

땀의 대가를 받은 선수도 있고, 대가를 다음 기회로 미룬 선수도 있을 것입니다.
국가대표라는 크나 큰 부담감을 이겨낸 모든 선수들에게 찬사의 박수를 보내고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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