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에는 싸움으로 시작했습니다.
코로나 때문에 막막하기만 했다.
맞벌이 부부인 나와 아내가 집에 있는 날만 늘어갔다.
오전 6시 20분이면 학교를 가던 아이도 집에만 있었다.
좁은 집에 세 식구가 24시간 같이 있다 보니 스트레스가 쌓여갔다.
안 보이던 서로의 티끌이 주먹만 하게 보이다가는
어느새 산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큰 집 사는 이유를 조금 알 거 같았다.
남편으로서 아빠로서 평화주의자로서 대책을 세워야 했다.
일단은 집 밖으로 나가서 집안의 인구밀도를 낮춰야겠는데,
나가서 뭘 하지?
고민 끝에 한국인이 운영하는 비영리 재단에 연락을 했다.
"시간이 갑자기 많아진 사람인데 도와 드릴 일이라도 있을까요?"
너무 감사하다며 환대를 해준다.
뭐지? 이렇게 쉽게 집 밖으로 나갈 수 있는 거였어?
그렇게 시작된 음식 배달 봉사.
도움이 필요한 분들에게 두 끼분의 식사를 배달하는 일이었다.
다른 봉사자들과 스케줄을 나눠보니
12곳에서 15곳 정도의 집으로
1주일에 한두 번만 배달을 하면 되는 일이었다.
집에만 있던 아들도 나를 따라나섰다.
자원봉사 식당에서 음식을 픽업하고 배달할 곳의 위치를 살펴보니..
뜨악!! 맨해튼, 브루클린, 퀸즈를 거쳐야 하는 긴 경로!!
뉴욕 시내 5 자치구(Boroughs)중 3곳을 횡단해야 했다.
일단, 짜증을 뒤로하고 출발!
나는 식사를 기다리는 어르신들을 위해 봉사를 나온 거다!
첫 배달 할 곳에 도착해보니 차 댈 곳이 없다.
음식 받을 사람에게 전화를 하니 전화를 안 받는다.
주차할 곳을 찾아 한 블록을 돌았는데도 주차할 곳은 없었다.
할 수 없이 이중주차를 하고 전화를 하니 이제야 전화를 받는다.
음식을 갖고 6층으로 올라 와 달란다..
지금 이중 주차 중이라 내려와 주셔야 된다고 침착하게 답변했다.
이런 게 갑질이신가?
인내심을 짜내며.. 나는 지금 자원봉사 중이라고 다시 한번 다짐한다.
아들이 정해진 음식 봉투를 전달하고 차에 올랐다.
그리고 다음 장소로 출발!
길이 많이 막혔다. 옆에 앉은 아들의 몸이 점점 꼬여갔다.
서로 할 말도 별로 없다.
퀸즈에서 출발 해 맨해튼을 거쳐 브루클린까지 갔다가
퀸즈로 돌아온 첫날 봉사는 5시간 30여 분 만에 끝났다.
아내는 말없이 들어오는 남편과 아들을 맞이했다.
아들의 입이 한 주먹 나와있다.
행동이 느려 터졌다고 아들에게 잔소리
내 영어 발음이 이상해 이해 못했다는 아들의 핀잔
전화만 들여다보고 있냐고 하니 그럼 뭐하냐는 아들의 말대꾸
부자가 서로 감정만 상했던 봉사 첫날이었다.
다행히도 배달 경로는 매번 같아 쉽게 익숙해질 수 있었다.
길이 막혀도 그냥 그럴려니 하니 급한 마음도 없다.
아들의 음식 봉투 전달은 빨라졌고..
길이 막힐 때는 전화기보다 책을 읽었다.
아빠의 시원치 않은 발음을 차분히 고쳐주기까지 했다.
나는 아이스크림도 사주고 새우깡도 사줬다.
첫날의 기분 나쁜 기억은 당연히 사라지고
봉사 첫 주, 첫 달이 지나고
예정됐던 5월부터 8월 둘째 주까지의 봉사를 무사히 끝마쳤다.
아들과 처음으로 함께 한 봉사의 시간
내가 배운 점이 훨씬 많았다.
일단 운전이 많이 늘었다. 좁은 길에도 많이 익숙해졌다.
아들에게 생각할 틈을 줘야 한다는 것도 배웠다.
이 아이가 겪는 많은 일들이 태어나서 처음 겪는 일들이라는 것을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였다.
그리고 가장 큰 배움은 봉사받는 사람들의 마음을 헤아려야 한다는 거였다.
봉사받고 싶어서 봉사받는 사람은 없었다.
갑자기 어려워진 상황에 당황하는 평범한 나 같은 처지였다.
음식 배달하며 본의 아니게 갑질 한 게 있는 게 아닌가! 돌이켜 봤다.
6층까지 올라 와 달라고 했을 때는 이유가 있지 않았을까?
생각하게 됐다.
음식을 받을 때마다 너무 고마워하시던 분이 계셨다.
음식을 건네면 물 한병이라도 손에 쥐어 주셨던 분
아들과 좋은 일 한다며 싸만코를 준비해서 기다려 주셨던 분
차 안에서 허겁지겁 먹었던 싸만코 아이스크림
서로 입가에 묻은 아이스크림을 보고 웃었던 아빠와 아들
코로나를 겪으며 좋았던 기억 몇 가지가 있네요.
아빠와 아들 싸움이 훨씬 줄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