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Henry Hong Dec 22. 2021

밥상 앞 죄책감

식탐 상실

고급 레스토랑 첫 방문

사치도 해 본 사람이나 할 수 있는 법


대학을 다닐 때였다.

먼저 졸업한 여자 친구가 취직을 했다.


취직턱을 내겠다며 근사한 식당을 예약하겠단다.

서양 음식에 익숙할 때도 아니고

식탁 매너도 모를 때였다.

먹으러 가는 일에 부담이 되었다.


식당을 예약한 여자 친구는 한껏 들떠 있었다.

메뉴를 미리 볼 수도 없었던 시절

여자 친구는 알음알음 식당의 정보를 알아갔다.

 

'One if by land, Two if by sea'

땅으로 오면 하나의 등불을, 바다로 오면 두 개의 등불

독립전쟁 당시 암호로 쓰였다는 글귀가 식당의 이름이다.

지극히 미국적인 생각의 식당 이름

음식은 전혀 미국적이지 않다.

뉴욕에서는 로맨틱 장소로 유명하다는데,

전쟁 당시의 암호로 식당 이름을 지은 건 무슨 연유인지 모르겠다.


졸업식을 위해 가져 온 단 한벌의 정장을 꺼내 입고,

약간은 긴장한 마음으로 식당을 찾았다.

낡은 건물에 조그만 간판, 비좁은 문.

안으로 들어서니 실내는 무척 어두웠다.

촛불만 켜 놓으면 로맨틱한 건가?

매끄럽게 차려입은 홀 매니저가 우리를 안내했다.

의자를 앉기 좋게 꺼내 주는 서비스

말을 할 때는 허리를 굽혀, 앉아 있는

우리들과 눈높이를 맞춰주었다.

어느새 영화에서 본 서비스를 받고 있었다.


웨이터가 테이블로 와, 자기소개를 하고 메뉴를 건넸다.

짧은 음식 이름에 긴 설명.. 영어 사전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그것도 모자라 웨이터는 갈 생각을 안 하고

오늘의 특별 요리가 어쩌고 저쩌고.. 메뉴를 설명한다.

처음 경험해보는 일이라 부담스럽기만 했다.

이야기를 다 들은 여자 친구가 내 몫까지 주문을 해줬다.


여러 가지 음식 맛을 보자며 Chef's Tasting Menu를 선택했다.

음식에 맞는 와인 페어링(Pairing) 따로 주문을 했다.


기다리던 첫 음식이 테이블에 놓였다.

커다란 접시에 소꿉장난 하듯 놓인 음식

접시가 놓이자 좁던 테이블은 더 비좁아졌다.

좁은 테이블 위에 촛불, 물 잔, 와이 글라스, 빵과 버터, 올리브 오일 등이

가까스로 자리를 잡았다.

이제 맛을 봐야지 할 때, 주방에서 셰프가 우리 테이블로 왔다

그리고 시작된 요리에 대한 설명.

길지 않은 설명이었지만 길게 만 느껴진 시간이었다.

Please, Enjoy!라는 말과 함께 셰프가 퇴장했다.


드디어 맛을 볼 시간. 한 입에 넣을 수 있는 크기의 음식을

4 등분했다.

한 입에 넣었다가는 여자 친구에게 한 소리 들을 거 같던 예감 때문이었다.

뭘 먹었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맛? 그냥 음식 맛이었다.

오랜만에 입은 정장이 거추장스러웠고 소매가 잔을 건드릴까,

긴장했던 순간들만 기억에 남아있다.


5번 정도의 음식이 나오는 동안 매번 셰프는 테이블로 왔고,

음식 설명과 함께 맛이 어떤지 물었다.

나는 모르겠는 음식 맛을 표현할 수 없었고, 내 관심은 와인에만 있었다.

여자 친구는 매번 채워지는 와인에 지쳤고, 나는 내 몫을 바로 마셔 버리고,

꽉 찬 여자 친구의 와인 잔과 바꾸기에 바빴다.

음식에 관심 많은 여자 친구는 내가 모르는 단어를 섞어가며

셰프와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나야 뭐 흡족한 듯한 표정을 지으며 앉아있으면 그만 이었다.

침묵하면 중간은 갈 테니까..



식당에 들어 가 음식을 다 먹고 나오는데 2시간이 넘게 걸렸다.

와인만 마셔대던 내가 불쌍했는지

웨이터는 내 잔이 비면 더 따라주기까지 했다.

보통 다음 순서의 음식으로 넘어가면 그러지 않는다고 하던데..라는 이야기는

한참 후에 들었다.


가격?

비쌌다.


음식값에 세금, 팁이 더해지니 500불이 넘었다.


난생처음가 본 고급 레스토랑의 기억은 와인 자국만 마음에 남았다.


호사를 누린 그다음 날이었다.

저녁 7시에 끝나는 수업까지 마치고 나니 배가 너무 고팠다.

뭘 먹을까? 하는 고민도 잠시, 버스 정거장에서

가장 가까운 '웬디스'로 뛰어 들어갔다.

치즈 버거, 프랜치 프라이, 콜라, 아이스크림..

5불짜리를 건네주고는 거스름 돈까지 받았다.

적당한 구석자리를 찾아 앉았다.

맞은편 벽을 바라보며 버거와 프랜치 프라이를 목으로 쑤셔 넣었다.

입과 손이 바빠지며 배 속은 만족감으로 채워졌다.

배가 불렀다. 한 숨을 내쉬고 트림을 거하게 한다.

그제야 정신줄  붙들고 다시 멍하니 벽을 쳐다본다.


식탐에 대한 죄책감이 들었다.

500불짜리 저녁.. 그리고 오늘의 저녁

먹는데 돈 쓰는 게 아깝다는 생각을 했다.

20여 년 전, 어느 저녁이었다.


그때의 여자 친구는 아내가 됐다.

고급 식당?

내키지는 않지만 1년에 한두 번은 간다.

식당을 갈 때마다 웬디스가 떠오르는 건 어쩔 수 없다.



매거진의 이전글 아내의 우정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