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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nry Hong Dec 31. 2021

있는 척을 해봤다.

그래 봤자 술 한잔

라디오에서는 연말 분위기의 음악이 쉴 새 없이 흐른다.

참고로 내 아내는 11월부터 캐럴을 듣기 시작했다.

11월부터 시작된 캐럴 듣기는 12월 31일 까지,

차 만 타면 들어야 하는 우리 집 연례행사다.


연말에 치르는 아내와의 행사를 하나 더 꼽자면

고급 바에 가서 칵테일 한 잔을 마시는 거다.

아주 어쩌다 두 잔을 마실 때도 있다.

세 잔 까지는 무리다.

돈이 아까워 도저히 그럴 수가 없다.


올 해는 맨해튼 칼라일 호텔(Carlyle Hotel)의 Bemelmans Bar로 갔다.

뉴욕 최고의 부자들이 모여 사는 어퍼 이스트.

76가 메디슨 에비뉴에 자리하고 있다.

근처 상점들은 모두 부티크 샵들이라 윈도쇼핑을 하기에도 부담스러운 동네다.

메디슨 에비뉴 바로 옆은 명품 상점이 즐비한 5 에비뉴다.


아내가 며칠 전부터 어디 가서 한 잔을 할지 고민을 시작하며,

나름 각오는 하고 있었다.

코로나 핑계로 외식을 극도로 자제하며 보낸 한 해였다.

연말에 칵테일 한 잔이야.. 하고 보자는 마음이었다.


간단한 스낵류와 칵테일 두 잔에 200불 정도 내가 쏜다!!

1년에 딱 한 번!!

새해를 잔소리 없이 시작하고 싶다~


12 시에 오픈하는 바 시간보다 일찍 도착했다.

호텔 앞의 나이 든 안내원이 회전문을 부담스럽게 밀어줬다.

둔중한 회전문은 몹시 무거웠다.

차라리 자동문으로 교체를 할 것이지..

아 그러면 일자리 손실로 이어지려나?!


바가 오픈할 때까지 호텔 로비에 앉아 있었다.

영국의 왕족들이 뉴욕에 오면 묵는 호텔이라고 하던데 호텔 로비는

작고 어두웠다.

오래된 호텔이라 엘리베이터는 불안해 보이기까지 했다.

로비에 앉아,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관찰했다.


10여 분간 로비에서 본 손님은 100% 백인이었다.

그중 단 한 명도 파카류를 입은 사람은 없었다.

유명 브랜드의 점퍼류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한결 같이 캐시미어 코트를 입고 있었다.

캐시미어 코트 안에는 캐시미어 스웨터가 엿보였다.

다소 추워 보이는 옷차림의 사람들

그런데 이들이 여름만 되면 더워 보이는 옷차림으로 바뀐다.


추울 때 춥게 입고

더울 때 덥게 입는 게 그들의 스타일?


안내원이 다가와 바를 오픈 했다고 친절히 알려줬다.

드디어 바 입성!

은은한 조명, 낡은 실내 장식들 그랜드 피아노,

나이 든 바텐더.. 오래된 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

나와 아내를 맞았다.

이른 시간이라 우리가 첫 손님이었고 앉고 싶은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자리에 앉아 여유롭게 주위를 둘러봤다.

바를 둘러싼 벽화는

매들린 그림책으로 유명한 Ludwig Bemelmans 작가가 직접 그렸다고 한다.

센트럴 파크 전경을 동심의 모습으로 그린 것이

바의 무거운 분위기와 묘한 대조를 이뤘다.


문 앞에서 우리를 맞아 준 나이 든 바텐더가 술 메뉴를 전해줬다.

웨이터가 출근 전이라 본인이 서비스를 한단다.

스낵 메뉴를 물으니 음식 서브는 4시부터 란다.


앗싸! 돈 굳었다. 

간단히 굴 한 접시와 치즈만 시켜도 100 달러가 넘었을 거다.


나는 폴란드 보드카를 넣은 더티 마티니를,

아내는 스웨덴 보드카에 레몬을 넣은 마티니를 주문했다.

방 번호를 묻기에

이 호텔에 묵고 있지 않다고 하니,

크레디트 카드를 달라고 한다.

주문할 때마다 계산을 하는 게 번거로워 마지막 주문까지

크레디트 카드를 자기네가 가지고 있는 단다.

네, 어련하시겠습니까.


조금 있으니 넛트류, 구운 치즈와 칩이 담긴 안주가 전달됐다.

공짜였다.

넛트 중에 가장 싼 땅콩은 보이지 않았다.

마카데미아, 아몬드, 피켄, 캐슈 등이 섞여 있었다.

(Macadamia, Almond, Pecan, Cashew)


드디어 마티니..

올해 수고 많았다는 의례적인 인사를 아내와 나누고 건배!

술맛?

역시나 그냥 술맛.. 술맛은 분위기가 99% 아닌가요?



분위기에 취해 아내와 이런저런 올 한 해에 있었던 일과

내년 계획 같은 걸 이야기했다.

1 시가 조금 넘자 사람들로 실내가 채워졌다.

우리야 날 잡아서 왔지만 뭐하는 사람들이기에 대낮에 술?

새참에 막걸리 마시는 문화가 이들에게도 있나?

단지 술 종류만 다른 거였어?


아내가 한 잔을 더 하겠다며 체리 마티니를 주문했다.

역시 나보다 대범하다.

조금 후, 술기운에 나도 대범해진다.


메뉴를 자세히 살펴봤다.

한 잔에  980 달러 짜리가 눈에 띄었다.                 

2 온스(약 59 밀리리터)이니 예전 야쿠르트 용량보다 작다.


위스키 한 잔의 가격(달러)


메칼란 엠(Macallan"M")의 1824 시리즈였다.

한 잔에 980 달러 오늘의 환율로 계산 해 곱하기 1188원

술 한잔 가격이 무려 1,164,240원

이게 팔린다고?


궁금증을 도저히 못 참고 바텐더에게 물었다.

이게 팔려?

응, 팔려..

누가 마셔?

음.... 침묵

바텐더는 알듯 모를 듯한 미소로 대답을 대신했다.


바에는 두 시간 정도를 머물렀다.

어두운 조명을 등지고 밖으로 나오니 꿈에서 깬 듯한

기분이 들었다.

갑자기 현실 세계를 마주 해 정신이 없었다.

알딸딸한 정신을 잡아보려

아내에게 걷자고 한다.

5 에비뉴를 건너 센트랄 파크로 들어섰다.

겨울의 쓸쓸한 벤치들만 눈에 띄었다.


맨 정신으로 있으려고 술을 마신 게 아닌데 

자꾸 술기운이 소멸 해 갔다.

기분이 나빠졌다.

이 돈으로 삼겹살에 소주를 마셨으면 

좋은 기분이 좀 더 지속되지 않았을까?


아내에게 등 따귀 예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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