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nnecting the Dots
피디가 되고 싶었던 이유는 단순했다. 당시 유행하던 쇼미더머니가 너무 재밌었다. 그렇게 하라는 연습은 안 하고 쇼미더머니와 힙합 음악에 빠져 나도 저런 거 만드는 사람이 될 거라 외쳐대는 내게 엄마는 말했다. 그러면 너 이렇게 바이올린을 안 한다고 될 게 아니고 인서울에 있는 좋은 대학 나와야 하니까 더 연습해야 해.
당시 사춘기를 씨게 앓고 있던 나는 바이올린을 그만 둘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엄마는 당신의 딸이 악기를 그만두길 원치 않았다. 엄마는 내게 항상 말했다. "수미의 소리는 특별해. 정말 잘하는 것보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게 있어."
엄마는 내가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걸 누구보다 좋아했다. 매일 찬송가를 연주해 달라 했고 나는 매번 탐탁지 않아 하며 찬송가를 연주해 줬다. 엄마는 바이올린을 하는 나를 자랑스러워했다. 그렇지만 나는 청개구리처럼 굴었다. 고슴도치도 자기 새끼는 이쁘다고. 나는 엄마의 말을 항상 곧이곧대로 듣지 않았다. 계속되는 경쟁에 지쳐 있던 나는 바이올린으로 더 이상 최고가 될 수 없으리란 생각이 싹트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그렇지만 피디가 되려면 좋은 학교를 가야 한다고라?
그렇게 나는 다시 바이올린에 사활을 걸었다. 그렇게 방황하던 사춘기를 끝내고(?) 예술고등학교에 진학했다. 하지만 예고 생활은 녹록지 않았다. 매 학기에 두 번씩 점수로 매겨져 등수로 치환되는 내 실력의 현 위치를 보며 나는 그 안에서 더욱 작아졌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영어공부와 책을 손에서 놓진 않았다. 피디는 책도 많이 읽어야 하고 영어도 잘해야 한단다. 나는 어쨌든 방송국 피디가 될 거니까.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
그렇게 어찌어찌 학교 생활을 버티다 고3 입시 철이 다가왔다. 당시 공부는 어느 정도 잘했으나 악기 등수는 비교적 낮았던 나였기에 나의 담임 선생님은 내게 청주에 있는 한 국립 교대원을 갈 것을 권하셨다. 그리고 그 권유에 나는 단칼에 No! 를 외쳤다. 그 이유인즉슨 첫 번째, 나는 음악 선생님이 세상에서 제일 싫었다. 두 번째, 인서울이 아니다. 피디가 되려면 서울에 가야 한다고요.
그렇게 나는 선생님의 추천을 무시한 채 서울에 있는 학교들을 지원했다. 그런데 나의 간절한 바람과는 다르게 나는 서울에 있는 대학 진학에 실패했다. 그래도 재수 정도는 괜찮지. 그런데 그마저도 실패. 그렇게 삼수의 길에 들어서며 음악을 하는 것은 나의 길이 아니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때 맛본 패배감이란. 고등학교 시절부터 지속된 바이올린 점수 매기기는 나 스스로에 대한 믿음을 바닥까지 끌어내리기에 충분했다. 그런데 가장 견디기 힘들었던 건 이 시간을 보내는 나만 힘든 것이 아니라 엄마 아빠 모두가 나와 함께 힘들어한다는 사실이었다. 당시 우리 집을 감돌던 무거운 분위기를 기억한다. 그 고요의 시간, 앞이 보이지 않는 한 길 속에서 나는 이제 오랜 방황을 끝내고 현실을 직시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심연에서 나오는 방법은 간단하다. 발버둥 쳐 다시 위로 올라오는 것. 일단 대학은 가야 할 것 같았다. 뭐라도 하면 이 어둠에서 빠져나올 수 있을 것 같았다. 심연 속에 수개월 빠져있었던 나는 정신을 차리고 부랴부랴 한 달여간 다시 바이올린을 붙잡았고 그렇게 기적적으로 대학을 갈 수 있었다. 지방에 있는 대학이라 내가 꿈꿨던 서울에서의 대학 생활은 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때 내게 엄마가 다가와 해준 말이 잊히지 않는다.
"수미야, 살아갈 때 언제나 높은 곳만을 바라보지 마.
그곳에 다 있는 것 같아 보이지만 그건 환상이고 결국 좋은 건 다 땅에 있어.
땅에는 흙도 있고, 물도 있고, 나무에서 떨어지는 열매도 있어.
언제나 낮은 곳으로 가는 사람이 되자."
그렇게 나는 낮은 곳으로 가며, 그리고 엄마도 나를 낮은 곳으로 보내며
우리는 함께 성숙해졌다.
대학에 들어갔을 때, 더 이상 엄마 아빠를 힘들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일단 주어지는 대로, 닥치는 대로 최선을 다했다. 일단 바이올린으로는 한번 실패했다 생각했다. 그래서 내가 잘할 수 있는 것을 최선을 다해하리라 다짐했다. 그러던 중 대학에서 나는 우연히 국제 정치학 수업을 듣게 되었다. 그 수업을 통해 나는 다시금 잊고 있던 방송국에서 일하는 꿈을 그리게 되었다. 이번엔 예능 피디가 아닌 카메라를 들고 세계를 누비며 취재하는 외신 기자. 상상만 해도 가슴 뛰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리하여 그곳을 향해 계속해서 문을 두드렸고 기적같이 길이 열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나는 인서울 대학을 졸업하지 않았지만 메이저 언론사에서 첫 사회생활을 시작할 수 있었다. 피디가 되겠다고 영어와 책만큼은 놓지 않았던 게 그때서야 빛을 발한 것일까. 나를 제외한 모두가 교포 혹은 원어민 수준의 영어를 구사했기에 내가 들어간 것 자체가 기적이었고 힘든 날도 있었지만 너무나 즐거웠다. 그리고 엄마 아빠는 그런 날 자랑스러워했다. 그렇게 나는 처음으로, 엄마 아빠의 기쁨이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그렇게 나는 바이올린과 멀어졌다.
언론인으로서의 삶은 쉽지 않았다. 야근은 부지기수였고 주말에 출근을 할 때도 많았다. 게다가 언제나 아이템을 찾아야 하는 삶을 살다 보니 쉬는 시간에도 온전히 쉬지 못했다. 때때로 엄마가 원했던 바이올린을 계속했으면 어땠을까, 아빠가 원했던 음악 교사를 했으면 어땠을까를 생각했다. 그렇게 힘든 이 생활에 지쳐갔다.
게다가 저널리즘판에 몸을 담그고 바라보는 저널리즘은 내가 상상했던 것과는 달랐다. 사람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미치고 싶어 들어간 이곳은 일반 회사와 다를 바 없었다. 메시지보다 중요한 것은 유튜브 조회수와 사람들의 댓글 반응. 얼마나 이 아이템이 사람들에게 잘 팔릴 것인가가 중요한 것을 바라보며 이게 정말 저널리즘이 맞는지에 대한 회의감이 들었다.
그렇게 직업에 대한 회의가 들던 당시에 우연히 마주하게 된 교회 내 단기 선교 모집 공고. 그래, 사람들에게 직접적으로 영향력을 미치는 일을 하자! 그렇게 지긋지긋한 방송국 일에서 탈출하고 싶었던 마음 반, 그리고 이곳으로 가면 정말 내가 바랐던 일을 할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감 반으로 나는 2023년 3월, 레바논으로 향했다.
하여간에 언제나 기대하고 선물 상자를 까보면 늘 내가 생각했던 것과는 다른 것들이 튀어나왔다. 레바논에서의 선교 생활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힘들었다. 일단 가장 힘들었던 건 아랍어 공부. 그 어렵다는 중국어도 난 배워봤고, 영어도 꽤 하는 나라 아랍어도 쉬이 배울 수 있으리라 자만했던 나의 오만함은 도착한 지 한 달도 채 되지 않아 미친 아랍어 체계에 완전패를 외쳤다. 그냥 멘붕이었다. 의사소통이 돼야 여기 있는 시리아 애들이랑 친해지기라도 할 텐데, 언어가 통하지 않으니 몸짓 발짓 섞어가며 언어를 쓰다 보니 매일 너무 피곤했다. 나 외에도 6명의 팀원들이 함께 레바논에 갔는데 실제로 같이 갔던 다른 팀원 중 한 명은 두통을 달고 살았다.
그러던 어느 날, 시리아 난민학교에 가서 다 같이 찬양을 할 기회가 생겼다. 다들 각자의 포지션을 맡게 되었다. 기타 칠 애는 기타리스트로, 찬양 부를 애들은 싱어로. 나는 바이올린을 맡아 반주를 하게 되었는데, 그날. 같은 팀원들이 갑자기 독주를 하라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자신이 없었다. 졸업 후 몇 년 간 악기를 손에서 놓고 있기도 했고, 난 언제나 내 연주가 부족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일단은 해야만 했다. 우리가 도착하자 수십 명의 아이들이 학교 앞 작은 공터에 모여 옹기종기 모여 앉았고 우리는 최선을 다해 번역한 아랍어로 찬양을 했다. 그리고 다가온 내 독주 시간. 가사도 없는 내 음악을 좋아해 줄까는 의구심이 들었지만 일단 최선을 다해, 온 마음을 다해 연주를 했다.
오분 간의 연주가 끝나고 인사를 하려 눈을 떠 앞을 봤을 때의 광경을 잊지 못한다. 나를 쳐다보고 있던 수백 개의 빛나는 눈동자들. 그리고 여기저기서 눈물을 훔치고 있는 레바니즈 선생님들. 연주가 끝나고 그들은 일면식도 없던 내게 다가와 너무 감동적인 연주였다고 계속 말해주었다. 나는 평생을 내가 바이올린에 있어서는 실패자라고 생각하며 살아왔는데, 그들은 그런 내 연주에 감동을 받았다니. 그 순간 늘 말해왔던 엄마의 그 말, 수미의 연주는 특별하다는 그 말이 나의 귓가에 맴돌았다.
그때부터 평생도록 쓸모없다고 생각했던 바이올린의 진가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언어가 통하지 않는 그 나라에서 악기는 나의 의사소통 수단이 되어주었다. 길에서 연주를 하면 모르는 사람도 다가와 내게 말을 걸었고, 동네 사고뭉치 꼬마도 내가 바이올린을 연주를 하면 얌전해졌다. 아이들은 나에게 다가와 바이올린 켜는 시늉을 내며 알려달라 했고 우리는 언어가 통하지 않아도 친구가 되었다. 그렇게 레바논에서 있는 마지막 날까지 나의 바이올린은 나와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이어주는 도구로 열심히 일해주었다.
어릴 적 포레스트 검프를 테이프가 늘어지도록 봤다. 그 영화에서 나온 명대사, "인생은 초콜릿 박스와 같다. 열기 전까지는 뭘 집을 지 알 수 없어." 그때는 너무 어려 이 대사를 이해하지 못했는데 이제야 나는 그 대사가 어떤 의미인지 이해하게 되었다.
난민을 도우러 간 레바논에서 나는 오히려 그들에게 더 큰 위로를 받았다. 나는 평생을 내가 바이올린에 있어서는 실패자라고 생각하며 살아왔는데, 그들은 그런 내 연주에 감동을 받았단다. 그렇게 낮은 곳에서 나는 또 한 번 채움을 경험했다. 나는 조수미처럼 퍼스트클래스를 강아지와 함께 타고 세계를 누비는 연주자는 되지 못했지만, 레바논이라는 그 아름다운 땅 이곳저곳을 누비며 연주한 바이올리니스트가 됐다. 나의 바이올린이 이렇게 사용될지는 꿈에도 몰랐다.
엄마의 희생이 헛되지 않았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밤늦도록 나의 레슨비를 위해 일하던 엄마의 수고가 이 머나먼 중동 땅에서 결실을 맺었다고.
엄마가 바이올린을 시켜주지 않았더라면, 나는 이 사람들과 이렇게 친해지지 못했을 거라고.
그들 마음속에 나의 작디작은 연주가 영원히 남길 기도했다.
그렇게 그들의 마음속에 나와 엄마가 남겨지길, 그들의 마음속에 우리 모녀가 영원히 살아 숨 쉬길.
나는 살면서 한 가지 큰 오해를 하며 살아왔다. 바로 내가 '어떤 사람이 되어야만' 엄마 아빠가 날 사랑해 줄 것이라는 것. 하지만 지금에서야와 보니 엄마 아빠는 언제나 나에게 무조건적인 사랑을 주는 사람이었다. 내가 바이올린을 잘하지 못해도, 내가 영어를 잘하지 못해도 나를 사랑해 주는 사람. 그걸 알지 못하고 나는 언제나 높은 나무를 오르려 애썼다. 그게 맘대로 되지 않을 때 언제나 나는 좌절했다. 그런데 꿈은 변하고 상황은 변해도 단 한 가지 변하지 않는 게 있었다. 바로 부모님의 사랑. 내가 바이올린을 잘하지 못해도 엄마는 변함없이 나를 사랑해 줬고, 백수여도 엄마는 여전히 나를 사랑해 준다는 사실을 모른 채 살아왔던 것이었다. 그런데 그 사실을 깨닫고 나자 내 인생에 추구하던 그 모든 것이 의미 없게 느껴졌다.
불확실성의 시대에서 '나'를 찾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닫게 되었다. 내 인생의 궤적이 어떻게 보면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인생을 산 것 같이 보이지만 이 모든 발걸음이 결국 '나는 누구인가'를 찾기 위한 발걸음이었음을 나는 안다. 이제 나에게 있어 '꿈'이라는 것은 없다. 나는 더 이상 명사로 내 삶을 규정짓지 않기로 결심했다. 다만 누군가를 사랑하며 살고 싶다. 엄마가 여태껏 나를 사랑해 줬듯. 그리고 최선을 다해 행복할 것이다. 이제 미국이라는 나라에서 여는 초콜릿 박스는 어떨지 궁금하다. 그곳에서도 선물 같은 일들이 일어나겠지. 또 까보면 내 예상과는 다르겠지만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