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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뉴욕댁 Oct 11. 2024

남편의 백마디 위로보다 엄마의 말 한마디


"신부님이 말씀하시는 그 스튜디오는 이미 예약이 다 차서 일 년 후에나 가능해요."

"아, 그럼 남자친구랑 상의하고 다시 연락드릴게요. 감사합니다."


요즘 한국 청년들은 거진 비혼주의라더니 원하는 곳 예약은 왜 이렇게 어려운 건지. 남편의 뉴욕 자취방 식탁에 앉아 한참을 사진만 들여다보고 있으려니 뒷목이 뻐근해왔다.


"이거 봐봐, 여긴 어때?"

"응응. 예쁘다."

"뭐야, 반응이"

"솔직히 내 눈엔 다 똑같아 보여. 수미가 좋은 곳으로 정해."


실장급, 이사급, 대표급에 따라 달라지는 가격은 내 머리를 더 아프게 만들었다. 계속 가격표와 사진을 비교하며 비슷해 보이는 사진들을 들여다보고 있자니 머리까지 지끈해 수십 개의 인터넷 창이 열려있던 노트북을 덮었다.





"엄마, 입술이 왜 이렇게 빨개?"

"신부 화장이라 그래."



나의 갓난아기 시절 다음 장에 나오는 엄마 아빠의 결혼사진. 그 사진 속 엄마는 엄마 같지 않았다. 평소 화장을 하지 않는 엄마의 모습과는 사뭇 다른 모습에 이게 정말 엄마인지 아닌지 어린 마음에 한참이고 들여다보았다.



"엄마, 나 육아 일기 있어?"

"없는데."

"그럼 나 어린 시절 캠코더로 찍은 건?"

"없어."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나의 어린 시절이 궁금했다. 단편적으로 남은 사진 속 내 모습이 아닌 글과 영상으로 나의 과거를 보고 싶었다. 나의 과거라기보단 내가 커갈 때 엄마는 나를 어떤 마음으로 키웠는지, 나는 어떤 행동을 했는지 알 수 있을 그런 기록물을 보고 싶었다. 그리고 그때부터였다. 내가 나 스스로를 기록하는 일에 유난을 떨게 된 것이. 내 휴대폰 속엔 미처 지우지 못한 오만여장의 사진이 있고 나는 매년 새로운 일기장에 일기를 쓴다. 언젠간 나의 아들 딸이 나의 과거를 궁금해할까 싶어서. 그런 나였기에 나는 단 한 번밖에 없을 내 결혼식을 정말 잘 기록하고 싶었다.





"진짜 한국 결혼 문화 이상해."


스튜디오와 메이크업만 예약하면 되는 줄 알았지만 스튜디오 촬영을 위해 준비해야 할 게 생각보다 많았다. 촬영을 위해 피부관리와 다이어트는 기본에다 제모, 염색, 네일, 패디큐어까지. 꾸미는 거에 이렇게까지 나의 시간과 노력을 들여야 하는 것이 맞나 싶다가도 한 번 밖에 없을 촬영인데라는 생각이 들 때면 모든 게 용인되었다. 문제는 나만 할 순 없으니 태평양 건너 타국에 있는 남편을 챙겨야 한다는 것이었다. 곁에 있으면 내가 옆에서 세심하게 챙겨줄 수 있을 텐데 그러질 못하니 계속 원치 않는 잔소리를 하게 되었다.


"팩 열심히 하고! 피부 관리 잘하고!"

"알겠어요. 잘하고 있어, 걱정 마."


준비를 하면 할수록 이걸 왜 찍어야 하는지 나 스스로도 납득이 되질 않았다. 아무것도 모르고 남들 다 하는 걸 아무 생각 없이 다 예약한 걸까. 이렇게 힘들 줄 알았으면 하지 말걸 싶다가도, 아니야 남들 다 하는 데는 이유가 있을 거라는 생각이 하루에도 수십 번씩 내 머릿속을 교차했다.





"신랑님, 신부님. 서로 더 가까이 다가가세요."



스튜디오 촬영은 예상외로 너무 재밌었다. 작가님도 너무 프로페셔널한 자세로 우리를 담아주셨지만 작가님 뿐만 아니라 보조 작가님, 헤어 변형 원장님, 드레스샵 이모님, 웨딩 플래너님 모두 그 자리에서 우리 인생 최고의 모습을 담아주기 위해 노력해 주신 덕분에 소위 말하는 인생샷을 건질 수 있었다. 중간에 친구들이 응원차 쿠키와 커피를 사 와서 예쁘다고 응원을 해준 것도 너무나 감동이었다.



"수미야, 너무 예쁘다."


서로 마주 보는 촬영 씬에서 대뜸 나에게 예쁘다고 하는 남편. 그리고 그 순간 지난 우리의 만남, 헤어짐, 그리고 다시 만나 결혼까지 하기까지의 타임라인이 한 줄기 곡선처럼 눈앞에 그려졌다. 왈칵 눈물이 차올랐지만 비싼 메이크업 가격을 생각하며 꾸역꾸역 눈물을 참아냈다. 신부가 주인공인 촬영 내내 내가 너무 예쁘다고 칭찬해 주고 나를 맞춰주는 남편을 보며, 또 촬영이 너무 즐거웠다는 그의 말에 그간 이 말도 안되는 촬영에 공을 들인 보람을 느꼈다.





그렇지만 예기치 못한 말다툼은 스튜디오 촬영을 마친 다다음날 양가 상견례를 하기 위해 부산에서 서울로 올라오는 우리 부모님을 모시러 서울역으로 가는 길에서 일어났다.



"축가랑 주례를 왜 벌써부터 생각해. 나중에 생각해."

"아니, 네가 한국에 있을 때 같이 이야기하면 좋잖아."


그간 혼자 결혼을 준비하느라 힘들었던 게 상견례를 가는 길에서 터지고야 말았다. 이제 남은 본식 결혼식에 있을 세부 사항을 결정하던 중 남편은 아직 많이 남은 웨딩 일정에 대해 의논하길 원치 않았고, 나는 미국에 있는 남편이 한국에서 나와 같이 있을 수 있을 때 한 개라도 더 많은 것을 상의하고 싶었다.


남편이 스튜디오 촬영과 상견례를 위해 이 주간 한국에 오는 동안 한 치의 오차도 없게 스케줄이 진행되기 위해 나름대로 고군분투했던 시간이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그런 내 수고로움은 몰라주고 앞으로 있을 결혼식 일정에 대해 나중에 이야기하자는 저 놈 자식이 괜히 얄밉게만 느껴졌다. 엊그제 나에게 예쁘다고 해주고 다 맞춰줬던 기억은 싹 사라진 채 내가 혼자 고군분투하며 준비해도 알아주지 않는다는 기분에 괜히 억울했다.


더 이상 버스에서 다투고 싶지 않아 입을 꾹 닫고 창밖을 보며 화를 삭였다. 좋은 날 다투고 싶지 않은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운한 마음에 눈물이 주룩주룩 흘렀다.


그렇게 서로 감정을 갈무리하지 못한 채 서울역에 내려 부모님을 모시러 역사 안으로 올라갔다. 예정 시간보다 늦게 도착한 부모님 때문에 이미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카카오 택시 기사님은 얼른 오라고 성화였고, 때문에 서로 인사도 제대로 못한 채 부리나케 서울역에서 기다리고 있는 커다란 밴에 뛰어 들어간 후에야 서로 인사를 했다.



"와, 무슨 이렇게 좋은 택시를 잡았대."

"엄마 아빠 오시는데, 편하게 잠실까지 가야지."

"옥수수 싸왔다. 옥수수 먹어라 희승아."



차에 타자마자 다투지 않은 척 일부러 밝은 목소리를 내며 우리의 스튜디오 촬영이 얼마나 재밌었는지 친구들이 남겨둔 현장 촬영 사진을 보여주었다. 그런데 사진을 한참 들여다보던 엄마는 진지하게 날 보며 말했다.


"수미 노력이 사진에 다 녹아 있네. 고생했네."


그 말을 듣는 순간 순식간에 눈물이 차올랐다. 때마침 앞자리에서 뒤를 돌아보던 남편과 눈이 마주쳤다. 나에 대한 눈치가 빠삭한 남편은 내 마음을 읽기라도 한 마냥 그제야 내가 얼마나 예뻤고 수미 덕에 얼마나 잘 끝났는지에 대해 이야기했다. 서울역에서 잠실까지 가는 길, 내 앞에서 노력하는 남편 덕분에 다시금 눈물을 꾸역꾸역 참아냈다. 그리고 우리는 상견례를 잘 마쳤다.




나에게는 엄마의 그 한마디가 가장 필요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삼십 년 가까이 나를 키우며 내가 어떤 사람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엄마. 물론 남편도 충분히 내게 수고했다 고생했다 말해줬지만 이프로 부족한 무엇인가가 있었다. 그런데 그 공백을 엄마의 한마디가 한순간에 채웠다. 이로서 나는 엄마 뱃속에서 나온 자식임을 뼈저리게 실감했다. 그 이프로는 공감 능력 구십 구 퍼센트에 달하는 남편이 노력한다고 채울 수 없는, 바로 모정(母情)에서 나온 한 마디였다.


하지만 이제는 그런 부모가 내 곁에 없다. 대신 내 남편이라는 존재가 내 옆을 지키게 된다. 나는 남편을 무척이나 사랑하지만 때론 나를 완전히 이해해 주는 부모님을 뒤로한 채 나는 떠난다는 사실이 가끔 사무치게 슬프다.


어찌 보면 아이러니이다. 안락하고 편한 곳을 떠나 가시밭길일지도 모를 결혼 생활을 시작한다는 것이. 하지만 나는 안다. 나는 남편에게 무언가를 받기 위해 떠나는 것이 아니다. 나는 이제껏 그저 받기만 했던 부모님의 내리사랑을 주러 가는 것이다. 남편에게, 그리고 훗날 태어날 나의 자식들에게. 그저 받기만 했던 시대는 막을 내렸지만, 괜찮다. 지금껏 차고 넘치게 받았으니. 추억할 육아일기도, 사진도 없었던 나였지만 진짜 추억할 수 있는 사랑은 언젠가 지워질 사진이나 일기가 아닌 영원히 마음속에서 기억된다는 것을 이제야 깨닫는다.


지나고보니 나는 혼자 결혼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나와 언제나 함께해주는 남편이 있었고, 부모님이 있었고, 시부모님이 계셨다. 물론 홀로 짐을 지고 있었던 것은 나였지만 그들은 내가 넘어지지 않게 사랑으로 나를 봐주었고 나의 수고로움에 항상 감사해줬다. 그저 내가 부족한 인간이기에 그의 표현에 충분히 감사하지 못했던 것이 나의 억울함에 불씨를 지폈을뿐. 나는 이 경험을 통해 다시금 나의 부족함을 돌이켜보고 한걸음 성장해간다. 그리고 부디, 이렇게 알고 끝나는 것이 아닌 이 모든 과정이 지나고 난 후 나는 조금 더 괜찮은 어른이 되어있길 간절히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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