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마지막 달동네 백사마을에도 봄은 오는가?
봄이 왔지만 봄 같지 않게 추운 날씨가 계속 이어진다는 뜻
3월이 어느새 절반을 훌쩍 넘어섰다. 겨우내 입고 지내던 패딩점퍼를 장롱 가장 깊숙한 곳에 다시 넣어 두고 그 자리에 있던 조금은 멋 부리기 좋은 옷들을 꺼냈고 항상 외출로 맞춰 놨던 보일러는 샤워할 때나 설거지할 때 말고는 켜는 일이 없어졌다. 겨울이 끝나기는 할까 싶었는데 나름의 봄 채비를 하고 생활 습관이 바뀐걸 보니 봄이 오긴 오고 있나 보다.
모처럼 따뜻했던 3월 어느 날 중계동 백사마을에 다녀왔다. 출사라는 거창한 표현까지는 쓰고 싶지 않지만 춥다는 핑계로 등한시했던 카메라에게 사과하는 의미에서 '백사마을 출사'라는 타이틀을 달고 집을 나섰다. 백사마을은 1967년 도심 재개발로 거주 지역에서 강제로 쫓겨난 철거민들이 모여 형성된 마을로 밖에서 보는 백사마을은 중계본동 104번지 일대에 형성돼 있다 해 백사(104) 마을이라 부르지만 안에서는 초기 마을의 모습이 흙과 모래가 깔린 허허벌판이라 백사(白沙) 부른다고 한다.
마을 입구에서부터 가장 눈에 띈 건 제 색을 잃은 연탄재였다. 서울에서 연탄을 떼는 곳은 기껏해야 일부러 허름한 인테리어를 고집하는 고깃집이 전부일 텐데 이곳은 아직 물을 데우고 방을 덥히는 용도로 사용중이었다. 그러고 보니 추위가 찾아 올 무렵이면 학생들은 봉사활동 점수를 위한 누군가는 자기만족을 위한 또 누군가는 의무감으로 혹한의 추위와 싸워야 되는 어르신들을 위한 봉사활동이 이뤄지는 곳이 바로 이곳이었다.
커다란 카메라를 든 낯선 이의 방문이 반갑지만은 않을 것 같아 조심스레 걸음을 옮겨 마을 안쪽으로 향했다. 이곳저곳 기웃거리는 풍경이 이상 했는지 누구네 집 찾아왔냐고 물으시는 할머니의 대답에 그냥 구경 왔어요 라는 답을 건넸다.
그렇게 할머니와 나와의 대화는 눈 깜짝할 사이에 끝났지만 내가 건넨 몽매한 대답은 마을을 벗어나는 내내 마음 한편에 남아 있었다. 구경이라니...
마을 초입에 있는 집들은 온기는 느껴지지 않았지만 사람이 살고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허리를 숙이지 않으면 오르기 힘들 정도로 경사진 언덕 양옆으로는 사람의 흔적이라는 좀처럼 찾아볼 수 없었다. 속살이 들어 날 정도로 녹이 슨 대문과 재색을 잃어버린 담벼락, 흔적만 남겨져 있는 집 터에 잔뜩 쌓인 쓰레기 더미들. 한눈에 봐도 여긴 사람이 사는 곳, 아니 사람이 살 수 있는 곳 같지 않았다.
새로운 이야기는 시작됐지만 십 년 가까이 끝나지 않고 있는 그리고 해피엔딩은 아닐 것 같은 백사마을.
백사마을의 살림을 담당하고 있을 것 같은 수퍼마켙과 몇 달이 지나도 풀리지 않는 뽀글뽀글 파마 전문일 것 같은 미용실, 뭐든 받아줄 것 같은 고물상, 따뜻한 손길이 모여 만든 목욕탕이 전부다.
저녁 준비로 집집마다 맛있는 냄새가 흘러나와야 하는데 백사마을의 저녁은 멀리서 들려오는 개 짖는 소리, 까마귀 울음소리, 겨울을 버텨냈던 나뭇잎이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가 전부였다. 차갑고 어두운 마을을 더욱 을씨년스럽게 만들어주는 장치가 아닐까 하는 바보 같은 생각까지 들었다.
백사마을 가장 높은 곳에 오르니 근처 아파트 단지들이 한눈에 들어왔다. 1km도 채 되지 않는 거리일 텐데 여긴 아직도 연탄과 LPG가스가 없으면 생활하기 어려운 곳이라니. 세상 참 아이러니하고 불공평한 것 같다.
내려갈 땐 올라올 때 보다 몇 배로 더 힘들었다. 반쯤 숙였던 허리는 배까지 내밀며 꼿꼿이 폈고 털레털레 내딛던 발걸음은 종종걸음으로 바뀌어 있었다. 잠깐 사진 몇 장 찍으러 온 나도 이렇게 귀찮고 힘든데 매일 같이 이 길을 오르는 사람들은 어떨까 싶었다. 내려오는 길 마주친 마을 주민의 걸음 소리엔 한숨이 가득 섞여 있는 듯했다.
3월의 두 번째 절기를 맞았다. 오늘도 어김없이 인터넷 뉴스는 봄의 향기로 가득하고 라디오에선 봄이면 어김없이 나오는 노래가 흘러나오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떠난 백사마을에도 어김없이 봄은 찾아왔지만 남아 있는 사람들은 아직 혹독한 겨울을 견디고 있는 것 같다.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찾아오는 봄이었으면...
모든 사진은 시그마 아트 35mm F1.4로 촬영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