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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선의 Oct 14. 2024

애증의 반려질환

매일 약을 먹는 삶 : 지랄병을 아시나요

잊을 만하면 한 번씩 뉴스에 등장하는 교통사고 소식이 있다. 도로에서 주행 중에 갑자기 의식을 잃고 가드레일을 들이받은 운전자를 뒤차 운전자가 구했다거나 지나가던 구급대원·간호사가 알아보고 응급처치를 했다는 뉴스. 인터넷에서 그런 기사를 발견하면 잠깐의 심호흡을 하고 기사 제목을 클릭해본다. 운전 중 갑자기 혈당이 떨어진 저혈당이거나 뇌경색·뇌출혈 같은 응급한 상황이 대부분이다. 열에 한둘은 이 경우도 있다. 뇌전증 발작에 의한 것. 기사에 달린 댓글을 읽어보면 병이 있으면서도 운전대를 잡은 운전자를 비난하거나, 면허를 발급해준 나라를 욕하는 날카로운 말이 가득하다. 나는 얕은 숨을 내쉬며 창을 닫는다. 




  내게는 반려질환이 있다. 뇌전증이다. 발작을 초래할 만한 신체적 이상이 없는데도 뇌 신경세포의 이상으로 발작이 반복적으로 일어나는 질환, 과거에는 간질이라 부르던 그 질환이다. 처음 알게 된 것은 20대 후반, 회사에서 한창 열심히 일하던 시기였다. 부서 이동으로 새 업무에 대한 부담감에 잠을 줄여 일하면서 스트레스를 심하게 받던 때였다. 거실 소파에서 잠든 내가 발작을 일으키는 것을 아버지가 목격했다. 아버지가 방에 들어가서 자라고 깨워서 새벽녘에 내 방으로 들어간 것은 기억이 나는데, 다음날 일어나니 온몸이 얻어맞은 것처럼 아팠다. 나중에 알게 되었다. 발작 중에 생긴 근육 강직 때문이었다는 것을. 그 무렵 회사 화장실에서 야근 중에 쓰러진 적도 있었고, 퇴근길 버스에서 친구와 통화하다 정신을 잃은 적도 있었다. 상급 종합병원 한 곳을 찾아 1박 2일에 걸친 뇌파검사 끝에 뇌전증 확진 판정을 받았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아니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다른 종합병원을 찾아 또 검사를 받아봤지만 결과는 같았다. 원인은 알 수 없었다. 교수님은 음주·수면부족·스트레스 이렇게 세 가지가 발작을 일으키는 조건이니 세 가지가 교집합이 되는 환경을 최대한 피하고 매일 두 번씩 먹으라고 항경련제를 처방해 주셨다. 그때부터 시작됐다. 반려질환을 둔 인생이.


  불행 중 다행인 것은 약을 먹은 후 한 번도 내게 발작 증상이 나타나지 않았다는 점이다. 항경련제를 통해 조절이 잘 될 정도로 개중에는 경증인 것이 다행이었다. 덕분에 나는 내게 그런 질환이 있다는 사실을 숨기고 살아갈 수 있었다. 세어보니 햇수로 13년이다. 그동안 가족과 아주 친한 친구를 제외하고는 직장 동료며 지인들에겐 내 병명을 얘기하지 않았다. 질환이 가진 부정적 이미지와 편견, 사회적 낙인이 너무 컸기 때문이다. 오죽했으면 학회에서 질환명을 간질에서 뇌전증으로 바꾸기까지 했을까.


  내게 그 편견을 얘기해준 이들은 의외로 아주 가까운 사람들이었다. “옛날엔 지랄병이라고 불렀어. 시집도 못 가는 병이었지. 그러니 행여라도 절대, 절대로 얘기하면 안 된다.” 어머니는 발병 당시 미혼이던 내게 질환의 존재 자체가 큰 흠이 된다 생각하고 입을 다물게 했다. 사실 나도 남들이 아는 것이 무서웠다. 사실을 들은 주변 사람들이 나를 거품 물고 몸을 배배 꼬며 쓰러지는 전형적인 이미지로 박제해 버릴까봐 두려웠다. 언젠가는 주치의 교수님께 회사 제출용 진단서를 떼 달라고 말씀드리자 주저하셨다. “회사에 얘기하셨어요? 진단서를 가져오라고 하던가요?” “아니요, 그런 건 아닌데 혹시 나중에 필요할 일이 있을까봐서요.” “웬만하면 회사에 얘기하지 마세요. 열에 아홉은 불이익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이제껏 그런 사례를 많이 봐왔어요.” 수많은 환자를 보시는 교수님이 그렇게 말씀하시자 이 질환이 조금 무거운 현실이라는 것이 다가왔다.


하루 두 번씩, 꼬박꼬박 약을 챙겨 먹어야만 하는 삶이 시작되었다. 20대 후반이었다. (사진 : 픽사베이)


  나는 배제되고 싶지 않았다. 사회에서, 직장에서, 친구들에게서. 나의 특이성을 감춘 채 그냥 그들의 무리에 섞여 ‘정상인’으로 살아가고 싶었다. 비타민 먹는다 생각하고 약을 하루에 두 번 꼬박꼬박 사람들 몰래 챙겨먹었다. 질환에 대해 부지런히 공부했다. 진료가 있을 때마다 수첩 한 가득 질문을 적어가면 교수님은 경증인 젊은 환자가 이렇게 불안감이 많은 것이 어찌 보면 안쓰럽고 어찌 보면 조금 귀여워 보였는지 웃으며 대답해 주셨다. 술은 완전히 끊어야 했지만 그러기가 어려웠다. 술을 좋아해서가 아니라 직업 특성상 술을 마실 일이 잦았기 때문이었다. 십수 년 전만 해도 미혼의 여기자가 술을 마시지 않는 방법은 술을 한 잔만 마셔도 쓰러질 만큼 체질적인 문제가 있거나 임신을 하거나, 둘 중 하나였다. 술을 안 마시려면 질환 명을 얘기해야 하는데, 그러고 싶지 않았다. 대신 잠을 잘 자고 스트레스를 줄이려 노력했다. 경증인데다 약 복용 후엔 발작이 일어난 적이 없었기에 교수님의 허락 하에 운전도 할 수 있었다. 운전할 때는 더욱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혹시나 집중력이 흐트러질까 음악도 틀지 않고 운전에만 집중했다. 내 아픈 부분까지 감싸 안아준 사람과 결혼도 하고 무사히 임신과 출산도 했으니 나는 누가 봐도 ‘그런 병’이 없는 사람으로 위장하는 데 성공했다.




  문제는 내 마음에 있었다. 언젠가부터 마음 한 구석에 억울함이 스멀스멀 자라나기 시작했다. 내가 잘못해서 생긴 것도 아니고, 원인도 모르고, 내가 이 질환으로 누구에게 피해를 끼친 적도 없는데 왜 말을 하면 안 되는 걸까. 언제까지 이렇게 숨기고 살아야 하나. 글을 쓰고 싶다, 뭐라도 써서 해소해야겠다고 마음먹은 것도 그때부터였다. 지인들에게 갑작스럽게 말하기엔 뜬금없고 나를 아는 사람이 그 사실을 안다는 부담감도 여전히 있으니 나를 모르는 이들에게 고백을 하기 시작했다. 처음엔 거칠었다. 몇 년 전 독립출판물 만들기를 배우는 수업에서 나는 난데없이 커밍아웃 하듯 병명을 고백하며 이러저러한 글을 쓰고 싶다고 말했다. 겨우 두어 번 만난 사이에 그런 얘기를 하자 다들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때의 경험으로 나는 초면에 과하게 내 정보를 쏟아내는 것이 어쩌면 폭력일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래, 면전에 대고 얘기할 게 아니라 글로 써보자. 나와 같은 심연에 빠져 열심히 인터넷 검색을 하는 누군가에게는 도움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브런치스토리에 작가 신청을 할 때 쓰겠다고 제출한 제목 중 하나도 ‘나의 반려질환’이었다. 그런데 작가 선정이 되고 난 후 막상 글로 쓰려고 하니 무슨 얘기를 어디서부터 써야 할지 아득해졌다. 마주하는 것이 괴로워서인지, 첫 발견으로부터 오랜 시간이 지나 이젠 너무 자연스러운 내 일상이 되어서인지 모르겠지만 다른 이야기만 자꾸 써댔다. 그러는 사이 반려질환에 대한 이야기는 이사 와서 미처 정리하지 않은 짐처럼 나를 신경 쓰이게 했다. 


  올해가 가기 전에는 꼭 그 이야기를 남길 것이다. 전조증상과 발견은 어떠했는지, 진단은 어떻게 받았으며 치료는 어떻게 하고 있는지. 임신과 출산에는 문제가 없었는지. 결국 회사 동료들에게 얘기를 했는지, 안 했는지. 용기 내어 얘기한 여러 연예인들 덕분에 공황장애가 이제 누구나 언제든 걸릴 수 있는 질환으로 인식된 것처럼, 뇌전증 역시 너무 색안경 끼고 보지 않는 질환으로 인식이 바뀌었으면 해서. 아픈 사람이 너무 쉬쉬하지 않고, 어디가 아프다고 얘기할 수 있는 세상이 되었으면 해서. 아니, 세상이 어떻고 하는 건 너무 거창한 문제고 그저 내가 나를 도닥여주고 싶어서. 애써 부정하고 반려(返戾)해온 나의 질환과 화해해 이제는 사이좋게 진짜 반려(伴侶) 질환으로 삼을 수 있도록. 


알록달록한 약의 색깔처럼, 내 삶도 덕분에 알록달록해진 측면이 없지 않다. 마주해 봐야지, 아득해도. (사진 :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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