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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선의 Apr 09. 2024

나와 남편과 에어랩

남편이 또 총선에 출마한다. 또, 또, 또! 

4년 만의 설욕전이다. 오매불망 손꼽아 기다리던 그 날이 어느덧 보름 앞으로 다가왔다. 어떤 설욕전인가 하면, 우리 남편 얘기다. 그이는 제 22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경기 ○○을 지역에 출마하는 후보다. 남편이 정치에 입문한 지도 10년이 훌쩍 넘었다. 그간 당이 어려울 때마다 구원투수처럼 나서서 매스컴에서 상대 진영을 비판하는 데 앞장서 왔지만 안타깝게도 ‘금배지’는 아직이다. 십수년을 계속 지망생이다 보니 나도 ‘의원님 싸모’ 소리는 못 듣고 항상 ‘후보님 싸모’에 그친다. 4년 전 선거에선 진짜, 정말 너무 아깝게, 3%포인트 차이로 졌다. 후유증은 생각보다 오래 갔고 거리에서 만나는 사람들 모두가 상대 당을 찍은 사람들처럼 보여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하필이면 올해, 둘째가 초등학교에 입학을 했다. 발바닥에 불이 나도록 뛰어다녀도 모자랄 판인데 왜 난 하필 8년 전에 아이를 낳았담. 마음 같아서는 아이 등하교는 비서에게 맡기고 싶지만 그러다간 등하굣길에 마주치는 학부모들 사이에서 뒷말이 나올까봐 내가 직접 데리고 다니기로 했다. 어찌 보면 입학식이 절호의 찬스다. 이 동네 유권자들이 우르르 대부분 부부 동반으로, 아니 운이 좋으면 그 집 할머니 할아버지까지 한 아이당 4명의 유권자가 참석할 테니 선거운동엔 제격이다. 입학식에 가져오라는 아이 준비물보다도 명함 수백장을 제대로 넣었는지 확인 또 확인했다. 남편 앞머리가 제대로 바짝 섰는지 다시 만져주고, 선크림은 얼룩진 데 없이 발렸는지 확인하고 집을 나섰다. 


  전략은 주효했다. 어떤 학부모들은 교문에서 남편을 힐끔거리며 “선거가 아직 멀었는데 왜 학교 입학식까지 와서 선거운동이야?”하고 수군거렸다. 멀리서 봐도 우리 욕을 하고 있다는 게 느껴지던 학부모들을 교실 앞 복도에서 다시 마주치자 태도가 180도 돌변했다. “어머나~ 수아 아버님! 아, 따님이 이번에 학교 들어가는 거예요? 그러셨구나~ 우리 시후랑 같은 반이구나~ 잘 부탁드려요! 아휴 올해는 꼭 되실 거예요~ 암만요! 그동안 우리 지역에 봉사하신 게 얼만데~!” 우리 둘째 수아와 같은 반이 된 아이의 부모들이 먼저 와서 알은 체를 한다. 그동안 남편이 TV에 수없이 나가서 한 얘기 또 하고 또 하며 부지런히 얼굴을 비춘 보람이 있다. 나도 같은 반 아이들 이름을 잽싸게 외우며 아이 엄마들과 휴대전화 번호를 부지런히 교환했다.


  입학 후 3주가 지났다. 오전에 큰애와 둘째를 등교시키고 나서 우리 당의 상징 색깔 점퍼를 입고 동네 복지관, 문화센터, 시장을 샅샅이 훑느라 정신이 없다. 밥 먹을 틈도 없이 금세 아이가 하교할 시간이다. 학교 끝나고 영어학원에 보내기까지 시간이 조금 떠서 우리 수아는 학교 앞 놀이터로 돌진해 노는 놀이터 멤버가 됐다. 나도 별 수 없이 아이들 노는 것을 먼발치에서 지켜보며 같은 반 엄마들과 대화를 나눈다. 입학식날 내가 의원 후보 부인이라는 걸 만천하에 공표했기에 엄마들의 반응은 각기 다르다. 누구는 나와 말 섞는 것조차 부담스러워 하고, 누구는 우리 당이 마음에 안 드는지 나까지 위아래로 훑어보고, 누구는 부러 다가와서 짐짓 친한 척을 한다. 이러나저러나 다 품어야 하는 사람들이다. 자고로 정치인의 부인이란 그런 것이다. 좋아도 싫은 척, 싫어도 좋은 척. 있는 듯 없는 듯. 이해심과 인내심은 하해와 같이 깊고 넓어야 한다. 누가 우리 애를 밀치거나 할퀴어도, 속으로는 천불이 날지라도 “아유, 애들이 놀다 보면 그럴 수 있죠”라며 호호 웃고 넘어간다. 


  요즘 날 조금 귀찮게 하는 사람은 같은 반 민재 엄마다. 민재 엄마는 이 동네에 얼마 전에 이사 온 데다 민재가 외동이라 모르는 게 많은 것 같다. 동네 소아과는 어디가 잘 보는지, 태권도 학원은 어디가 좋은지 나만 보면 질문을 쏟아낸다. 나도 여러 번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키운 첫째의 노하우를 둘째에게 이제야 적용해보는 참인데, 이게 어디서 날로 먹으려고. 하지만 눈을 반짝이며 해맑게 물어보는데 안 가르쳐줄 수도 없고, 얄밉단 티를 낼 수는 없다. 최대한 웃으며 다 답해주면서 속으로 생각한다. 이렇게 민재엄마랑 아빠까지 두 표 확보했겠지. 다른 당 찍기만 해봐라. 선거가 일주일 남으면 저 멀리 지방에 사시는 친정엄마를 모셔와 아이 등하교를 부탁할 참이다. 그럼 난 명함 돌리고 악수만 하면 되니 엄마들 비위까지 맞추고 스트레스 받을 일은 좀 줄어들겠지.


  오늘도 무려 3만보를 걷고 집에 왔다. 애들 학교, 학원 따라다니고 구석구석 지역구까지 훑으며 비서진과 운동을 다닌 날은 만보계가 3만보를 넘기는 날이 허다하다. 오늘도 목표를 달성했다는 애플워치의 잔망스러운 알림이 그닥 반갑지만은 않다. 천근만근인 몸을 이끌고 씻고 나와 거울을 본다. 봄볕에 모자 없이 나다녔더니 금세 기미가 생겼다. 얼굴도 많이 탔고 목은 후두염으로 늘 부어있다. 나도 소싯적 한 미모 했는데. 곱게 화장하면 봐줄 만한데 엄마들과 지역구 주민들 만날 땐 그럴 수가 없다. ‘같은 고민을 함께 하는 소시민 애엄마’란 인상을 주려면 선크림에 림밤만 발라 ‘꾸안꾸’ 화장을 해야 한다. 빵빵한 머리 볼륨을 담당하던 에어랩은 서랍 깊숙이 넣어뒀다. 난 정말 왜 이러고 사는 걸까, 여의도라도 입성해 봤으면 내 말을 않지. 내 처지가 한탄스러워서, 찰싹! 문자에 답장해주느라 바쁜 남편 등을 때려본다. 
 “아유 내 팔자야! 얼굴도 모르는 사람 문자에 답장하지 말고 내 얼굴에 팩 한 장이라도 붙여줘 봐. 내가 어쩌다 당신을 만나서 이러고 사나 몰라. 당신 진짜 이번에도 못 들어가면 나랑 갈라설 줄 알아! 내가 말이야, 저, 저 에어랩 사놓고서 쓴 적이 세 번도 안 된다고! 작년에 우리 수아 유치원에서 누가 밀어서 이마 팅팅 부어왔을 때도! 내가 속에서 천불이 나도! 당신 이미지 망가질까봐 한 마디도 못하고 말이야!” 애 얘기가 나오니 갑자기 목이 멘다. 하아, 그만 해야지.


   대학에서 정치외교학을 전공할 때만 해도 내가 정치에 입문할 수도 있겠단 생각은 했지만, 정치인의 부인이 되리라곤 상상조차 못했다. 아니 아직 배지를 못 달았으니 정치인의 부인은 아닌 건가. 그래, 정치인 지망생의 부인 정도로 해두자. 캠퍼스 커플로 만나서 일찍 결혼을 하고, 정치하겠단 남편을 뜯어말리다 싸우다 달래다 결국 내가 지고, 갑작스레 찾아온 아이를 어느새 둘이나 낳고, 그 사이 당에서 주는 월급에 정치후원금으로 살면서 우리 친정에서 있는 돈 없는 돈 박박 긁어다 쓰고, 낙선에 낙선이 이어지고... 흘러흘러 오늘이 됐다. 여행스케치 노래 가사처럼 산다는 게 다 그런 것 아니겠는가. 누구도 알 수 없는 것. 그러니 보름 뒤 선거 결과도 나는 모른다. 이제껏 여론조사 업체가 들이민 결과가 맞았던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까봐야 아는 거다. 보름이 지나면 나는 ‘의원님 싸모’가 되어 여의도에 입성할 수 있을까. 3만보 걷기 따위는 때려치우고, 다시 에어랩으로 머리를 정성껏 말고 풀메이크업을 한 채 기사님이 운전해주는 차 뒷좌석에 앉아 여유롭게 다닐 수 있을까. 그리하여, 지긋지긋한 엄마들과의 놀이터 회동에도 안 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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